매일신문

[김수지의 조선후기 당쟁사] 경종-반전(反轉) 정국

노론의 과유불급이 소론의 반격을 부르다
왕위 오른 경종에 후사 정하라 압박…이복동생인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
다음 달 국정 이양 대리청정도 요구

◆노론, 한 밤의 쿠데타 : 연잉군을 후사로 삼고 대리청정으로 국정을 맡기소서

1720년 6월 13일에 즉위한 경종은 즉위하자마자 '건저(建儲·후사책봉)'를 해야 한다는 노론의 압력에 시달렸다. 이것은 숙종이 마지막에 집권당을 노론에게 물려주고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숙종 41년(1715) '가례원류(家禮源流)' 저작권 분쟁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소론의 윤증(尹拯) 과 노론의 유상기(兪相基)가 각자 '가례원류'의 저작권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한 사건이었다. 이 분쟁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던 숙종은 숙종 42년(1716)에 노론 측에 저작권이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것을 병신처분(丙申處分)이라고 한다.

병신처분으로 숙종은 집권당을 노론으로 바꾸고 사망했다. 이로써 경종은 생모를 죽인 세력들에게 둘러싸여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가례원류(家禮源流).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유계가
가례원류(家禮源流).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유계가 '가례'를 기본으로 '주례'·'의례'·'예기와 학자들의 사례(四禮)에 관한 글을 정리하여 1715년에 14권 8책으로 간행한 예서로 숙종때 노론, 소론의 정치패권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되었던 책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당시 아직 후사가 없었던 경종은 34세였고, 계비 선의왕후(宣懿王后) 어씨(魚氏)는 17세였다. 경종 1년(1721·신축년) 8월 20일 저녁 곧 대궐 문이 닫힐 무렵 사간원 정언(正言) 이정소(李廷熽)의 상소가 올라갔다.

'저사(儲嗣·왕세자)'를 당장 책봉하라는 상소였다. 대궐문은 닫혔다. 그리고 노론 대신들만 대궐에 모여있었다. 노론 대신들은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을 필두로 밤 2경(21시~23시)에 경종을 만났다.

소론 대신들은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한 밤 중에 경종은 노론 대신들에게 대궐에서 포위되었다. 후사를 아직 낳지 못한 임금에게 당장 후사를 정하라고 압박했다. 그것은 이복 동생 연잉군을 후사로 책봉하라는 뜻이었다. 인현왕후 김씨의 작은 오빠인 민진원도 있었다. 민진원과 영의정 김창집을 비롯한 노론들은 하룻밤 안에 거사를 성공시켜야 한다고 논의했다. 이 무혈 쿠테타가 완승으로 끝나지 않으면 역적으로 몰릴 것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대비(大妃)인 숙종의 3번째 계비 인원왕후 김씨에게 경종이 청하고 승낙을 받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대비전으로 들어간 경종이 새벽녘에 언문 교서를 가지고 나왔다. 언문 교서에는 "선대왕의 골육이 주상과 연잉군뿐이니, 어찌 딴 뜻이 있겠소"라고 쓰여있었다.

이렇게 그 한 밤중과 새벽에 연잉군은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달에 노론은 경종에게 '왕세제'에게 실질적인 국정을 이양하는 '대리청정'을 요구했다. 경종은 바로 그 자리에서 승낙했다. 노론들은 너무나 쉽게 일이 진행되자 도리어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에 소론 최석항(崔錫恒)이 부리나케 대궐로 들어와 대리청정 허락을 철회해 달라고 울면서 간청했다. 그러자 경종은 바로 그 즉시 그 청을 받아들였다. 이것을 시작으로 아침에는 노론의 청을 들어주고 밤에는 소론의 청을 들어주는 경종의 행위는 10여 일간 반복되었다. 노론의 눈에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닌 것으로 보였던 경종이 사실 위장 연극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즉, 경종은 국정을 제대로 운영할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행동하여 노론으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요청하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10여 일간 허락과 철회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경종의 국정 운영 장악력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노론의 대리청정 요청은 임금을 모욕한 역모의 행위로 해석되는 상황으로 넘어갔다. 왕세제 책봉에 연이어 대리청정을 요구한 노론은 그때서야 아뿔싸 했지만 노론이 쥐고 있던 정국의 주도권은 이미 빠져나가고 있었다.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조선 숙종 46년(1720년)에 당대 유명 궁중화가들이 그린 궁중기록화첩에 나오는 노론 영의정 김창집 초상화. 경종2년(임인 1722)에 목호룡의 고변으로 사형당했다.
조선 숙종 46년(1720년)에 당대 유명 궁중화가들이 그린 궁중기록화첩에 나오는 노론 영의정 김창집 초상화. 경종2년(임인 1722)에 목호룡의 고변으로 사형당했다.
경기도 여주에 있는 김창집의 묘.
경기도 여주에 있는 김창집의 묘.

◆소론의 반격 : 왕세제 연잉군 임인옥안(壬寅獄案)의 내란수괴가 되다.

결국 노론은 소론 김일경(金一鏡) 등으로부터 격렬한 탄핵을 받는다. 경종 1년(1721) 12월 6일 김일경을 필두로 박필몽(朴弼夢), 윤성시(尹聖時) 등이 노론 4대신인 김창집(金昌集), 조태채(趙泰采), 이건명(李健命), 이이명(李頤命)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 유약해 보이고 심지어 잘 씻지도 않아 두발에 덕지덕지 기름이 끼어 머리에 쓰는 관의 크기가 점점 커져 기괴해 보였던 경종의 놀라운 행보는 이 날 일어났다.

노론의 4대신.
노론의 4대신.

경종은 마치 소론의 강경한 탄핵 상소를 기다렸다는 듯이 반응했다. 실록에는 경종이 "응지(應旨)하여 진언(進言)한 것을 내가 깊이 가납(嘉納)한다"라는 경종의 말이 기록되어있다. 경종은 상소를 올린 김일경을 일약 이조참판에 임명하고, 함께 상소를 올린 박필몽 등을 모두 3사(三司)에 임명한다. 그리고 노론 4대신을 비롯한 50여 명의 노론 인사들을 위리안치, 유배, 파직한다. 정권을 소론에게 준 것이다. 신축년의 사건이라서 이것을 신축환국이라고 한다. 이날의 일에 대해 사관은 경종실록에다음과 같이 썼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주상께서 즉위하신 이래 공묵(恭默)하여 말이 없고 조용히 고공(高拱·높은 곳에서 팔짱을 끼고 있음) 하여서…흉당(凶黨)이 업신여겨 두려워하고 꺼리는 바가 전혀 없었으므로 중외에서 근심하고 한탄하며 질병이 있는가 염려하였다. 그런데 이에 이르러 하루밤 사이에 건단(乾斷)을 크게 휘둘러 군흉(群凶)을 물리쳐 내치고 사류(士類)를 올려 쓰니, 천둥이 울리고 바람이 휘몰아치며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듯하였으므로, 군하가 비로소 주상이 숨은 덕을 도회(韜晦: 재덕(才德)을 숨기어 감춤) 함을 알았다…"(경종실록 경종 1년 12월 6일)

소론 강경파들에게 정권이 넘어가자 연잉군은 위태로워졌다. 신축옥사는 시작일 뿐이었다. 다음 해 임인년(1722)에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사건'이 발생했다. 목호룡은 남인 집안의 서얼이었는데, 시(詩)를 잘 지었고 풍수를 배워 사대부 집안의 장지(葬地)를 택하는 일을 맡으면서 노론 집안 자제들과도 어울리게 되었던 자였다. 목호룡은 노론 집 자제들이 모여서 경종을 시혜 또는 폐출시키려고 모의했다고 고변했다.

이 계획을 '삼급수'라고 했다. 경종을 내쫒기 위한 3가지 방법이라는 뜻인 '삼급수'는 대급수(大急手)·소급수(小急手)·평지수(平地水)를 말한다. 대급수는 자객을 보내는 것이고, 소급수는 음식에 독을 넣는 것이다. 마지막 평지수는 숙종의 유언을 위조하여 폐출한다는 것이다. 목호룡은 노론 대신들의 자제들과 어울리면서 들었던 내용들을 고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시 국청이 열리고 관련자들의 국문이 시작되었다.

관련자들은 노론 4대신 중의 한 명인 이이명의 아들 이기지(李器之)와 김창집의 손자 김성행(金省行) 등이 있었는데, 이들 중에 연잉군의 처(妻)인 세제빈의 친정 조카 서덕수(徐德修)도 있었다. 목호룡의 고변은 제법 그 내용이 상세했지만, 경종을 죽이는데 쓰려고 했다는 칼과 독약과 같은 물증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또 모의했다는 관련자들 대부분이 자백을 하지 않은채 고문으로 사망했다. 이 사건은 3분의 1은 사실이지만 3분의 2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처조카 서덕수가 관여됨에 따라 연잉군은 위기에 몰렸다. 목호룡 고변의 최종 칼끝은 연잉군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연잉군의 처조카 서덕수는 역모의 내용을 연잉군이 알고 있었다고 자백한 뒤에 사망했다.

연잉군을 왕세제로 만들어준 노론 4대신을 포함하여 관련자들 50여 명이 사형당하고, 170여 명이 유배, 위리안치, 삭탈관작에 처해졌다. 그리고 연잉군은 서덕수의 자백을 근거로 수사기록인 '임인옥안'에 역모의 수괴로 등재되었다. 이제 왕세제 연잉군 앞에는 오늘 죽느냐 내일 죽느냐의 선택지만 있을 뿐이었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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