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백정우의 읽거나 읽히거나] 엘레지를 밀고 들어오는 노스탤지어

[책] 창백한 언덕 풍경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 민음사 펴냄

[책] 창백한 언덕 풍경.
[책] 창백한 언덕 풍경.

그것은 일종의 체험이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히로시마 내 사랑'과는 다른 종류의 묘한 정조이면서 영화 '8월의 광시곡'의 체념어린 격정이 모조리 사라진 어떤 평정심 같은 것이었다. 초유의 사건을 배경으로 시공간을 넘나들며 이토록 무덤덤하게 기술하는 절제미라니. '남아 있는 나날'을 제임스 아이보리의 영화로 먼저 접했을 때, 쇠락을 딛고 선 품위 있는 미장센을 가능케 한 원작자 가즈오 이시구로에 대해 호기심을 품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

"아버지 말씀이 옳아요."

화자의 남편인 지로는 언제나 아버지 오가타 상이 옳다고 답한다. 아버지는 전쟁의 패인이 그릇된 이념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아들은 이미 미국식 문화와 기업풍토에 완벽하게 적응한 상태. 부자간의 불화를 원치 않으면서도 할 말 다 하는 며느리 에츠코는 나가사키에서 미래를 꿈꾸는 세대다. 군국주의를 체화한 기성세대와 미국식 신문물에 눈 뜬 젊은 세대 사이에 참화가 끼어 들 자리는 없다. 45년 8월의 비극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즈오 이시구로의 기묘한 데뷔작 '창백한 언덕 풍경'은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다. 현재와 과거 사이를 교차편집으로 진행되는 소설은 모든 것은 얽혀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전시한다. 작가는 등장인물 중 여성의 이름을 에츠코, 노리코, 사치코, 마리코, 기쿠코, 야스코로 붙여 일반화하는데(이름은 하나도 중요치 않다는 듯이). 구세대 인물인 후지와라 부인과 미래세대의 현재형인 에츠코의 딸 니키만이 예외라는 점은 무척 시사적이다.

전범국의 국민이면서 원폭 피해자라는 아이러니가 내재화된 탓일까. 나가사키 출신의 작가는 모순과 딜레마를 딛고 일어서려는 안간힘에 대해 조심스럽고 세심하게 다독인다. 예컨대 미군에게 자신과 딸의 미래를 맡기려는 사치코를 이해하는 에츠코지만, 시아버지에겐 사치코를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오가타 상은 절대 용납 못하는 일이라는 걸 바탕에 깔아 독자에게 행간을 부여한 것이다. 전통과 규율은 안중에도 없이 생산적 활동에만 전념했던 지로의 세대는 자식세대에게 일중독자로 낙인찍히고 훗날 버블경제의 주범으로 전락할 운명이었으니, 그가 "아버지 말씀이 옳아요."를 반복하는 것 또한 작가의 영민한 계산처럼 보인다.

2차 대전 패전 직후의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인데도 원자폭탄과 핵구름과 죽음의 서사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3쪽을 할애한 오가타 상과 에츠코의 대화 "대문 옆에 철쭉이 없는 집에서는 살지 않을 거라고"(178쪽) 말한 결혼이 결정된 날의 기억을 소환한다. "이제 생각해 보니까, 지난주 그 집 대문 옆에 철쭉이 있었던 것 같아요. 새로 이사 온 사람들도 제 생각과 같았나 봐요. 대문 옆에는 철쭉이 꼭 있어야 한다니까요."(179쪽)

영화평론가 백정우
영화평론가 백정우

시간은 흐르고, 현재는 과거가 되고 미래가 현재가 되는 유장한 삶이 있을 뿐. 나가사키에 침잠한 슬픔도, 오가타 상이 부여잡는 관습과 전통도, 사치코가 꿈꾸던 미래도 누군가의 현실이 되었고 또 과거가 될 터이다. 엘레지로 둘러쳐진 담장을 밀고 들어오는 그들만의 노스탤지어 '창백한 언덕 풍경'. 책의 마지막, 에츠코는 딸 니키에게 나가사키 시절을 이렇게 술회한다. "특별할 건 하나도 없었단다. 그저 행복한 추억이었을 뿐이야."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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