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황영은] 내 고장 칠월은 산딸기가 익어가는 시절

황영은 소설가
황영은 소설가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이육사 시인의 시 '청포도'를 읽을 때면 첫 줄부터 싱그러운 냄새가 진동하는 듯했다. 나라의 독립을 염원하며 쓴 시이지만, 내게는 조국의 광복보다 진초록 산과 연둣빛 들판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알알이 영글어가는 열매의 어여쁨이나 청량한 바람의 손길이 더 와닿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육사 시인의 출신지인 안동은 내 고향 청송의 바로 옆 동네라서 어릴 적부터 자주 오갔다. 이웃인 두 지역 모두 산세가 빼어나 계절마다 수려한 자연경관을 연출했고, 귀중한 문화유산을 다량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푸른 소나무'의 뜻을 가진 청송은 '산소카페'라는 도시브랜드를 붙일 만큼 전국에서도 깨끗한 청정지역이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지질공원이기도 했으며, 전설과 비경의 주왕산을 품은 땅이기도 했다.

주왕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태어났던 나는 천혜의 아름다움 속에서 뛰어놀며 자랐다. 20미터 골목으로 빠져나가면 곧바로 도로 건너에 수심 10미터의 넓은 하천이 펼쳐졌고, 그 위로는 앞산이 이어졌다. 앞산 한중간에는 1847년에 지어진 만취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창문을 열면 언제나 시야에 들어왔던 아담하고 고즈넉했던 정각. 내 인생의 한 귀퉁이에서 붙박이처럼 박혀 있었던 정자. 계절마다 색다른 풍경화로 딱 그 자리를 지켰던 배경이 사라져 버렸다. 기둥 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새까만 잿더미가 되어 폭삭 내려앉았다. 산 한중간을 삽으로 움푹 파낸 것처럼 휑뎅그렁한 자국만 남았다.

고향을 덮친 화마는 수많은 지역민의 가슴을 태우고, 일상까지 시커멓게 집어삼켰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고 누군가 솔로몬왕의 말을 빌려 격려했다. 위로는, 두꺼운 과일 껍질을 뚫고 들어오려는 파리의 날개짓에 불과했다. 결코 내 곁에서 사라지지 않을 거라 믿었던 무언가를 잃었을 때 다뤄야 할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랬으므로 우리는 하루아침에 '내 세상'을 잃어버린 우주의 무게를 짊어졌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 대신 산딸기가 익어가는 시절이었다. 모두 다 도심에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이따금 부모님이 계신 고향에 들러 진초록 덤불 속의 새빨간 열매를 쏙쏙 빼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버티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제 우리 조상들의 청춘 같은 여름날 속에 박혀 있던 열매를 빼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하는데, 눈물 때문에 아무것도 분간할 수가 없다.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시인의 말처럼 가슴을 열고 기다리고 있으면 다시 찾아올까. 돛단배에 푸른 냄새, 싱그러운 덤불을 한가득 실어서 땅을 잃은 우리들의 눈앞으로 다시, 전해지고 또 전해지던 오래된 추억을 가지고서 시퍼렇게 살아 돌아올까. 기다리고만 있으면 말이다.

황영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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