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와를 가지런히 얹은 격조 있는 담장과 마른 나뭇가지들이 보인다. 담을 따라 나지막하게 조성한 화단의 꽃나무들이 조용한 계절이다. 모서리엔 큼지막한 괴석이 받침대 위에 놓였고, 한 가운데는 키 큰 나무 두 그루가 자리 잡았다. 사랑채에서 내다본 사랑마당일 것이다. 헛담 뒤로 보이는 기와집 팔작지붕 위에 이렇게 써 놓았다.
을유년(1945년) 청명(淸明)날 승설암(勝雪盦) 한가로운 뜰에 와서 놀았다. 상허(尙虛) 인형(仁兄)이 나에게 그림으로 그리라 하여 이 그림으로 한때의 성대한 모임을 기록한다. 함께 모인 사람은 토선(土禪), 인곡(仁谷), 모암(慕菴), 심원(心園), 수화(樹話), 소전(素荃)이다.
마지막에 '소전'이라고 멋지게 쓴 옆에 '손씨재형(孫氏在馨)' 인장이 있어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이 그림을 그리고 제화를 썼음을 알 수 있다. 일곱 분이 청명 절기를 맞아 함께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80년 전 이맘때다. 올해는 지난 금요일이 청명이었다.
이렇게 그림으로 그려 기억하자고 한 사람은 소설가 상허 이태준이다. 토선은 치과의사이자 도자기를 중심으로 명품을 모았던 수집가 함석태이고, 인곡은 승설암 주인 배정국이다. 모암은 미상이고, 심원은 한국화가 조중현 수화는 그 유명한 서양화가 김환기다.
승설암은 인천에서 사업을 하던 배정국이 1936년 즈음 서울로 이사하며 자리 잡은 성북동 그의 집이다. 정원이 일품이었다고 한다. 승설암은 만해 한용운의 집 심우장, 근원 김용준의 집 노시산방, 상허 이태준의 집 수연산방과 이웃이었다.
백양당(白楊堂)이라는 상호로 출판사를 비롯해 여러 가지 사업을 한 배정국은 예술 애호가였다. 모였던 분들은 함께 답사도 다니고 수시로 술상, 찻상을 함께하며 고미술품을 감상했다. '승설암'이라는 당호는 이 아회의 참석자들이 경모한 추사 김정희에서 나왔다. '승설'은 차 이름이다. 1810년 25세의 김정희가 북경에서 완원을 만났을 때 대접받은 차였다. 차가운 눈 속에서 움터 나온 찻잎으로 만든다고 한다. 김정희는 이 차 맛을 잊지 못했고 '승설도인'이라는 아호도 지었다.
'뚜껑 암(盦)'자를 승설암에 쓴 것도 김정희 때문이다. 북경의 옹방강이 김정희에게 보낸 글씨가 '시암(詩盦)'이다. 그래서 우봉 조희룡의 화구암(畵鷗盦), 초의 선사의 일지암(一枝盦) 등 김정희와 가까운 사람들이 '암(盦)'자를 당호에 썼다.
청명 다음 절기인 곡우 전후에 햇차가 나온다. 청명 즈음이면 차인들은 햇차를 손꼽아 고대한다. 올해는 차맛이 어떨까? 작황은 예년만 할까? 올 일 년 차 양식은 어떻게 장만할까? 등등. 승설암에서 김정희를 기리며 이런 차담을 나누셨을 것 같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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