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아빠가 매어놓은 새끼줄 따라/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 나는 동요 <꽃밭에서>를 좋아한다. 여기에는 놀랍게도 '하나(一)'라는 편향성을 넘어설 '여럿[多]'의 지혜가 숨어 있다. 동요에 나오는 채송화는 브라질에서, 봉숭화는 인도-말레시아-중국에서, 나팔꽃은 인도에서 왔다. 어느 하나 우리 꽃인 건 없다. 하지만 외래종이 자연스레 우리 꽃처럼 되어 있다.
남아메리카 아마존강 하류 지역을 생활 기반으로 삼는 과라니족은 벌써 수백 년 동안이나 정글 속에서 방랑을 계속하고 있다. 이들은 이 세상의 '하나'만 있는 국가 권력을 불완전한 것, 오염된 대지를 불행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런 불행이 끊긴 오염 안 된 '둘'의 세계를 찾아 이동한다.
둘이란 결국 '여럿'의 세계를 뜻하는데, 둘의 세계에서는 인간이 신/자연이고, 신/자연이 인간이라 본다. 둘의 세계는 우주적 힘으로 움직이는데, "옥수수는 저절로 자라나고…'일'에 의해 자신을 표현하지 않는 평등한 사람들, 신-인간, 인간-신뿐"인 곳이다.
삶은 다양한 세계로의 여행이다. 내 언어와 생각으로 가닿는 곳이 다 나의 세계다. 카리브해에 주목하고, 그곳 사상가들의 지혜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있다. 각각의 다른 배경을 가지지만, 같은 바다를 바라보며, 다르면서 하나인 세계를 형성해 온 카리브해의 나라들. 서양 열강에 의한 식민지 지배의 길고 어두운 역사의 결과, 복수의 언어권으로 나누어졌다.
그러나 그 나라들은 고립된 것이 아닌, 하나의 군도(群島)로서 묶어낼 수 있다. 흩어진 섬과 섬들로 이어진 하나의 군집. '아커펠러고'(archipelago). 한 무리를 이루고 있는 여러 섬이라서 '제도'(諸島) 혹은 '다도해'(多島海)라고도 한다.군도라 하면, 공통언어가 부재해 언어소통이 어렵다. 그래서 "콜라-드링크-하세요"처럼, 정식이 아닌 중간 언어로 사용하는 피진(pidgin)이 있다.
또한 여러 문화가 혼성되는 크레올(creole)이 일상화됐다. 대륙에 속해 '네이션'을 지향하는 곳에서는 '국가, 국민, 민족'에 얽매여 살아가기에 '하나'라는 생각에 갇힌다. 반면 '네시아' 즉 섬의 언어와 문화에서는 '여럿'이라는 혼종성, 다양성이 상식이다. 따라서 군도는 직선적 진보주의를 거부한다.
목표를 정해 반드시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철썩이는 파도에 몸을 맡기고, 조수 간만에 의존하며 바다를 즐긴다. 직선적 진리가 아니라 원환의 문화와 이미지 속에서 생활하니, 서로 다른 문화와 이질의 언어가 합쳐지는 크레올화(Creolization)가 삶의 과정이다.
카리브해의 여러 나라들을 각기 고립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다양한 세계로서 인식하고, 그 독자적인 사상을 살피려는 시도들이 있다. 이런 움직임 속에 주목받는 것이, 카리브해 남쪽 섬 토바고에서 살다 죽은 에릭 머튼 로치(Eric Merton Roach. 1915-1974)의 시다.
로치의 시와 사상은 국내에 아직 소개되지 않았지만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는 시 <나는 군도(I AM THE ARCHIPELAGO)>에서 "나는 군도, 희망(I am the archipelago hope)"이라고 했다. 이외에도, 모두 사후에 출간된 것이지만, '꽃 피는 바위', '망고 그늘에서' 등 많은 시를 남겼다.
그는 시를 통해 자기 삶의 근거지인 군도가 식민지로 조각 난 역사, 파편화된 어휘가 아니라 군도의 삶 자체를 대륙의 의미로 복원시키고자 한다. '내가 군도'라며 중심을 찾고자 한다. 여기에 이르는 과정은 매우 애달프나 번득이는 지성을 읽을 수 있다.
"나는 군도, 희망/그것이 영토를 만들 것이다/파도에 밀려 부서진/작열하는 푸른 섬/그리고 모든 이야기는/노예들의 농장에서/나를 조롱하러 온다/거기서 얌과 사탕수수를 파낸다/수수밭 주위엔 더위와 증오가 가득/여동생은 사랑에도, 법률에도, 인연이 없는 아이를 가졌다/그 허접한 침대가 기른 것은/유색의 제3 계급. 그리고 지금/내 말, 내 역사, 내 이름은 죽었다/부족의 영혼과 함께 묻혔다.
그리고 지금/나는 익사했다/어떠한 사랑으로도 진정시키기 어렵다/곤궁의 바다의 거친 파도 속에서./나는 빈민가다/나는 바나나 남자, 사탕수수 인간, 면화(綿花)쟁이/여기 모든 곳, 결국 증오의 영토에선/경제가 내 땀으로 납땜된다/콩고에서, 케냐에서, 그리고 자유의, 자유 없는 아메리카에서.//내 남성성은 제국의 바퀴에서 죽었다…//하지만 이제 지성은 시간을 앞질러 가야 한다…." 죽기 십수 년 전에 쓴, 자신의 마지막을 예언하는 듯한 시다.
아메리카로부터 흘러온 흑인들의 신체적, 정신적 피폐함은 자신들의 고향 아프리카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그러나 군도의 해저엔 조상의 뼈가 산호로 납땜처럼 이어져 군도를 형성하고 있다고 믿었다. 결국 그는 독약을 마시고, 자신이 생각했던 세계의 끝인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쳐가다 가라앉았다.
혼혈 시인인 그는 군도의 역사와 현실에 개입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했다. 당시 세계사의 중심, 유럽의 언어와 사유에 짓눌리지 않고, 군도라는 여럿-복수를 발견하며, 그것이 자신이고 희망이라 했다.그렇다. 각자가 다 희망이다. '하나'만 쳐다보지 말고 다도해처럼 '여럿'으로, 주인이 되어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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