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항일 의병의 삶을 소재로 방영한 드라마가 있었다. 주연 배우들의 러브스토리도 엮어서 뼈아픈 의병들의 역사를 절절하게 그려낸 작품은 높은 시청률을 찍으며 당시 사람들의 입에 뜨거운 감자로 오르내렸었다. 그 드라마 속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임진년에 의병이었던 자의 자식들은 을미년에 의병이 되지요. 을미년에 의병이었던 자의 자식들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요?"
어쩐지 이 대사는 오래도록 시간이 지나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구한말, 자발적으로 전국에서 모여든 의병들은 서로의 이름을 몰랐다. 그저 강원도에서 온 박 아무개, 충청도에서 온 김 아무개로 불렸다고 한다. 당장 내일 목숨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처지에, 곁을 내어준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가 혹여나 서로 운명을 다르게 한다면 받아들이기가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소중한 동지의 이름조차 모르는 채로 고달픈 항쟁을 이어갔겠지.
농부아사 침궐종자(農夫餓死 枕厥種子)라는 말이 있다. 농부는 굶어 죽어도 종자를 머리에 베고 죽는다는 뜻이다. 지금의 상황이 너무 어렵더라도 내일의 기대를 포기하면 안 된다는 의지이자 삶에 대한 처절한 애착으로 확대 해석해도 좋을 것 같다.
중국 고사에서 유래된 이 말처럼 얼마 전, 화재로 숯검정이 된 삶의 터전 속으로 농민들은 다시 걸어들어가야만 했다. 놉을 해서 넓은 밭에 농작물의 모종을 심고 살아남은 과일나무의 가지 휘기 작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따금 까맣게 탄 산봉우리를 보며 눈시울이 붉어지더라도 또 허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굶어 죽을지언정 씨앗을 품어야 다음 세대를 위해 번영의 희망을 넘겨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빼앗긴 조국을 지키려고 전국 각지에서 맨발로 달려왔던 아무개들. 위대하고 고귀한 그들에게 영웅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게 마땅하다면 활활 불타오르는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맨몸으로 뛰어든 우리들 또한 영웅이다. 몇 날 며칠 동안 집에도 못 들어가고 밤을 지새우며 불과의 사투를 벌인 그 사람들에게 영웅이 아니라면 어떤 화려한 수식어가 어울리겠는가.
단언컨대 우리의 역사는 질기고도 질긴 민초들의 끈질긴 투쟁의 기록이자, 애달픈 생존의 발자취였다. 그때 산천을 지킨 의병들처럼 폐허가 되어버린 땅을 살려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사람들. 불타버린 산과 들에서 숯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았는데도 농기구를 들고 다시 땅으로 걸어간 그들은 아무개의 후손인 농민들이었고, 우리 모두였다. 그러니까 을미년에 의병이었던 자의 자식들이 지금 무얼 하고 있냐 묻는다면, 이 땅을 지키는 영웅이 됐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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