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르포]'낡은 것은 내 손에, 새 것은 이웃에게'…故 두봉 주교 의성 사택에 남은 흔적

낡고 검소한 삶의 흔적 고스란히…'나눔과 헌신의 삶' 기억 생생
"항상 웃으며 농담하던 분"…최근 수개월 간 신변정리 모습도

의성군 봉양면 의성문화마을 고 두봉 레나드 주교 사택을 마을 주민이 바라보고 있다. 장성현 기자
의성군 봉양면 의성문화마을 고 두봉 레나드 주교 사택을 마을 주민이 바라보고 있다. 장성현 기자

11일 오전 의성군 봉양면 고 두봉 레나드(96) 주교의 사택. '두봉 천주교회'라는 문패 아래에는 고인의 선종을 알리는 천주교 안동교구의 안내문과 약력이 붙어 있었다.

봄 햇살에 집 안팎엔 온기가 돌았지만 방문객들로 북적였을 이 곳은 적막감이 가득했다.

집 안을 정리하던 오옥희(67) 씨가 간간이 한숨을 내쉬었다. 오 씨는 지난 2004년 두봉 주교가 의성에 터를 잡은 후 줄곧 '식복사(食服事)'로 고인의 곁을 지켜왔다. 식복사는 천주교 사제 대신 식사와 빨래, 청소 등 가사일을 돕는 이를 말한다.

집안 내부는 단순하고 소박했던 고인의 삶처럼 단출했다. 소파와 식탁, 책상, 침대, 탁자, 장롱 등 필요한 가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다. 모두 오래되고 손때 묻은 가구들이다.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스마트폰은 출시된 지 10년이 지난 모델. 누렇게 색이 변한 케이스를 투명 테이프로 고정해뒀다. 오래된 라디오 수신기에도 거뭇한 손때가 묻어있다. 침대 위에는 미처 정리하지 못한 듯 사제 목에 걸치는 영대가 접힌 채 올려져 있었다.

장롱 안에는 겨울 외투 서너벌과 두꺼운 상의 두 벌, 양복 3벌이 걸려 있고, 셔츠들은 대충 개어 넣어뒀다. 옷 보다는 옷장 한쪽에 쌓아둔 책과 무언가 적어 연도 별로 정리해 둔 서류들이 더 많았다. 이불 칸도 절반 정도만 채워져 있을 뿐 절반은 비어둔 채였다.

오 씨가 옷장 서랍을 열며 말했다. "이런 속옷을 20년씩 입으셨어요. 새 속옷을 사드리면 다 모아뒀다가 이웃돕기에 내놓으시고 본인은 낡은 속옷을 그냥 입으셨어요. 아휴"

고 두봉 레나드 주교의 침대 탁자 위에는 오래된 스마트폰과 라디오 수신기가 놓여 있었다.. 장성현 기자
고 두봉 레나드 주교의 침대 탁자 위에는 오래된 스마트폰과 라디오 수신기가 놓여 있었다.. 장성현 기자

서재 한쪽 벽면을 차지한 책장과 책상 위에도 새 책은 찾아 보기 어렵다. 두꺼운 프랑스 백과 사전과 성경은 금방이라도 낱장으로 분리될 듯 했다. 오 씨는 "그 책도 정말 오래돼서 투명 테이프로 이리저리 붙이고 붙여서 보던 책"이라고 했다.

이웃 주민 정숙이(76) 씨는 "주교님은 항상 친절하고 재미있으셨다"고 했다. "늘 웃으셨고, 농담도 정말 잘하셨어요. 사람들을 만나면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항상 하셨죠."

오 씨는 "주교님 사택 방 한 칸은 창고나 다름없었다"고 했다. 낡은 물건은 항상 그의 손 안에 있었지만, 그 방안에는 늘 새 것들이 가득했다. 자신이 받은 새 옷이나 좋은 음식, 귀한 물건들은 차곡차곡 모아뒀다가 필요한 이웃들에게 모두 나눠줬다.

그토록 소탈하고 여유롭던 고인도 지난해 말부터 조금 달라진 모습들을 보였다. 예전보다 예민하게 반응하거나 짜증을 내기도 했고, 우체국을 자주 오가며 바쁘게 신변을 정리했다고. 오 씨에겐 지난 20년 간 일한 퇴직금을 주기도 했다.

그러던 지난 6일 오후 1시쯤. 고인은 식사 후 손님들과 기도를 하던 중 갑자기 쓰러졌다.

고 두봉 레나드(96) 주교. 연합뉴스
고 두봉 레나드(96) 주교. 연합뉴스

달려온 오 씨는 119구급대에 연락해 두봉 주교를 안동병원으로 옮겼다. 발견 당시 두봉 주교는 눈을 맞출 수 있고 의식은 있었지만, 대화는 불가능한 상태였다.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에 '괜찮으실거예요'라고 말씀드리는데, 저를 보며 막 우시는 거예요. 저도 어찌나 눈물이 나는지…. 그 모습이 마지막이었죠."

오 씨는 "주교님 생전에는 저녁마다 집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는데, 이제 컴컴하게 불 꺼진 집을 보니 마음이 너무나 무겁고 슬프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닫히는 대문 너머, 고인이 손수 일구던 유기농 텃밭에 고추 지지대만 하릴없이 일렬로 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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