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김천의 한적한 농촌 마을이었던 율곡동은 10여 년 전 '혁신도시'라는 이름을 달고 대변신을 시작했다. 마치 외계 건축물처럼 나타난 거대한 공공기관 건물들과 함께 이곳에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그로부터 10년, 김천혁신도시는 이제 단순한 '수도권 공공기관 이전지'가 아닌 지역 발전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가고 있다. 특히 한국도로공사, 한국교통안전공단, 한국전력기술 등 3대 공공기관은 단순히 건물만 옮겨온 것이 아니라 김천에 '좋은 이웃'으로 정착해 다양한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 "배구 우승컵부터 드론 자격증까지"
평범한 지방 소도시였던 김천에 프로배구단이 생겼다. 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 여자배구단이 2014년 김천으로 연고지를 옮기면서, 이 도시에 처음으로 프로스포츠 시대가 열린 것이다.
"경기가 있는 날이면 도시가 완전히 달라져요. 예전엔 저녁 7시면 거리가 텅 비었는데, 이제는 배구 경기가 있으면 식당도 북적이고 사람들로 활기가 넘치죠." 김천시내 식당 운영자 박모(52) 씨의 말이다.
더 놀라운 것은 2017-18시즌과 2022-23시즌 우승까지 했다. V-리그 최초 리버스 스윕 우승으로 일궈낸 V2는 김천시민들에게 자부심을 안겨주었다. 매 시즌 4만5천여명의 관중이 경기장을 찾고, 유소년 배구 육성 프로그램도 운영되면서 김천은 '배구의 도시'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한편, 한국교통안전공단이 설립한 김천드론자격센터는 미래 항공산업의 인재를 양성하는 요람으로 자리 잡았다. 2023년 12월 준공된 이 센터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비가시권 드론 실기 시험을 진행할 수 있는 곳이다.
"예전에는 드론이라는 게 외국 영화에나 나오는 물건이었죠. 그런데 지금은 우리 아이들이 직접 드론을 날리고 자격증도 따요." 자녀가 드론 교육에 참여한 김모(45) 씨는 "아이의 꿈이 넓어진다"며 만족을 표했다.

◆ "청년들의 탈출구? 아니, 귀환의 땅으로"
지방 소도시의 가장 큰 문제는 청년 유출이다. 하지만 김천혁신도시는 이런 공식을 뒤집고 있다.
2014년부터 2023년까지 한국교통안전공단은 1천71명을 신규 채용했으며, 이 중 21.3%가 지역 인재다. 한국도로공사와 한국전력기술도 꾸준히 지역 인재를 채용하며 청년들의 고향 이탈을 막고 있다.
"서울로 대학을 갔지만, 졸업 후에는 고향인 김천으로 돌아왔어요. 서울보다 임금이 적을 수 있지만, 주거비와 생활비를 고려하면 오히려 삶의 질은 더 높다고 생각해요." 한국도로공사에 입사한 김천 출신 이모(29) 씨의 말이다.
더 주목할 만한 것은 세 기관이 공동 운영하는 '김천시 청년CEO 육성사업'이다. 2020년부터 시작된 이 사업을 통해 유망한 사업 아이템과 기술력을 가진 청년 CEO들을 선발해 창업활동비를 지원하고, 멘토링도 제공한다.
"창업을 꿈꿨지만 막막했는데, 공공기관들의 지원과 멘토링을 받으면서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청년CEO 육성사업 수혜자인 최모(31) 씨는 이제 김천에서 직원을 둔 스타트업 대표가 됐다.
◆ "공공기관 울타리를 넘어 지역사회로"
김천혁신도시의 3대 공공기관들은 자신들의 울타리를 넘어 지역사회와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시설 개방이다.
한국도로공사는 본사 수영장을 2019년부터 지역 주민에게 개방했고, 현재까지 누적 이용객이 9만명에 달한다. 또한 '길벗 열린도서관'을 개관해 지역 주민과 방문객에게 개방하고 있다.
한국전력기술도 지역 취약계층을 위한 다양한 봉사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김천 남산지구 주거환경 개선사업을 통해 20년 이상 된 노후주택 29가구를 수리하는 등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하고 있다.
한국교통안전공단은 지난해 김천지역 소외계층에게 연탄 1만장을 후원했으며, 까치밥 나눔냉장고 지원, 설 명절 제수용품 지원 등 다양한 나눔 활동을 펼치고 있다.
"우리 동네는 그동안 관심을 받지 못했어요. 그런데 공공기관들이 도와주면서 집도 고치고, 연탄도 공급받아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게 됐죠." 김천 남산지구 주민 박모(76) 씨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 "신산업의 메카로 도약하는 김천"
3대 공공기관의 가장 큰 기여는 김천에 새로운 산업의 씨앗을 심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도로공사가 2024년 4월 개소한 스마트 물류 복합시설은 물류기술 테스트베드와 스마트 물류센터를 결합한 국내 최초의 시설이다. 이 시설을 통해 물류 관련 기업 5개사가 김천에 둥지를 틀었고, 이를 통해 211명의 일자리가 창출됐다.
한국교통안전공단은 2023년 준공한 튜닝안전기술원을 통해 자동차 튜닝산업의 지역 거점을 조성하고 있다. 김천시, 대구대, 김천대와 협력해 튜닝 전문 디자이너 및 맞춤형 인력도 양성 중이다.
가장 최근인 2024년 말에는 한국전력기술의 원자로설계개발본부(원설본부)가 대전에서 김천으로 이전을 완료했다. 약 300명 규모의 원설본부 이전으로 김천은 원자력 기술의 중심지로 도약할 발판을 마련했다.
"원설본부의 이전으로 원전 설계, 건설, 운영, 처분에 이르는 원자력 전주기 체계가 경북에 구축됐습니다. 이는 김천이 원자력 신기술 개발의 중심지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한국전력기술 관계자의 설명이다.
◆ "다음 10년을 준비하는 혁신도시"
김천혁신도시 3대 공공기관의 10년은 단순한 '이전'을 넘어 '공존과 상생'의 모델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이들은 앞으로도 더 긴밀한 협력을 통해 지역 발전의 중심축으로 역할할 계획이다.
함진규 한국도로공사 사장은 "김천혁신도시로 이전한 후 10년 동안 다양한 상생활동을 통해 지역사회와 함께 발전하는 대표 공기업이 되도록 노력해 왔다"며 "앞으로도 지역사회와의 상생과 경제 발전을 위해 실질적인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면서 공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정용식 한국교통안전공단 이사장도 "교통안전과 지역발전을 함께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해온 지난 10년의 성과를 발판 삼아, 앞으로도 지역민과 함께 성장해가는 교통안전 공단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특히 한국전력기술 관계자는 "원설본부의 김천 이전을 통해 업무 효율성을 높이고, 원자력 기술 발전에 기여하는 동시에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이바지하겠다"고 밝혔다.
10년 전 정체된 농촌 마을이었던 김천시 율곡동은 이제 평균 연령 35세의 젊은 도시로 변모했다. 이곳의 유소년 인구는 김천시 전체 동일 연령대의 42.6%를 차지할 정도로 젊은 도시가 됐다.
김천혁신도시 주민은 "혁신도시 3대 공공기관의 '착한 이웃' 행보가 앞으로도 계속되길 바란다"며 "공공기관과 지역사회가 함께 만들어가는 이 '김천 실험'이 앞으로 어떤 결실을 맺을지 기대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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