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건표의 연극 칼럼] 윤대성 작, 1974년생 <출세기>, 낭독으로 읽는 1976년생 정범철의 <출세기>

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연극. 김 교수 제공.
연극. 김 교수 제공.
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1967년 8월 22일, 충남 청양군 지하 125미터. 무너진 구봉광산 갱도에는 생존자가 없을 줄 알았다. 광업소장은 생존자 '없음'으로 보고하려는 순간, 극적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갱도 안에서 버티던 김창선 씨가 갱도 전화기를 고쳐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의 목소리는 라디오 전파를 타고 퍼지며 김창선 씨의 구출기는 국민적인 관심사로 떠올랐고, 구봉광산 갱도 진입로와 마을은 장사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언론사, 종교단체, 생환을 비는 시민들로 북적이면서 김창선 씨의 갱도 탈출은 축제 분위기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과 국가재건최고회의를 거쳐 들어선 제3공화국 시대는, 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국가적 이미지를 세우기 위해 비서관을 보내 구조 작업을 독려했다. 매스컴은 생중계를 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국민 GDP가 100달러에 불과하던 시절, 광산 산업은 국가 산업으로 장려되고 있었다. 9월 6일, 갱도에 매몰된 지 15일 8시간 만에 극적으로 구조된 당시 35세의 김창선 씨는 국민적 스타가 되었다. 이후 평범한 삶을 살았던 《출세기》의 실제 주인공 김창선 씨는 충남에 거주하다 2022년, 향년 92세로 별세해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같은 해, 28세의 극작가로 촉망받던 윤대성 작가는 《출발》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한다. 36세가 되던 해, 작가는 구봉광산의 실제 주인공 김창선 씨의 실화를 모티브로 1974년 《출세기》를 발표한다. 충남 청양군은 강원도 광산으로 바뀌었고, 생존자인 주인공도 김창호로 바뀌었다. 작품은 동랑레파토리 극단에 의해 1974년 10월 29일부터 11월 6일까지 공연되었는데,, 관객 4천여 명이 관람했다. 출연 배우로는 이호재, 윤소정, 정동환, 박영규, 전무송 등이었다. 실화가 연극으로 옮겨진 것은 구봉광산 사고가 발생한 지 7년 후였다. 광산 개발이 붐을 이루던 1960~70년대의 정치적 격동기를 겪은 극작가는 김창선 씨의 생존기를 소환한다. 작품은 인간의 기적적인 생존이 권력에 의해 매스컴의 대중적 상품으로 도구화되고, 자본과 물질만능주의 속에서 몰락해 가는 주인공을 그려내고 있다. 이 시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도로, 철도, 수출과 광산이 한국 사회의 주요 산업 기반이었던 1차 경제개발 시대에는 적지 않은 정치적 변화가 있었다. 검열의 시대였다. 1972년 10월, 유신헌법이 공포되면서 국회가 해산되고 삼권분립이 무력화되었다. 긴급조치가 발동되면서 표현의 자유, 언론과 집회, 기본권들이 제한되어 한국 사회는 유신으로 불안정한 시대를 맞는다. 1974년 8월 15일, 국립극장에서 열린 광복절 29주년 행사에서 문세광이 박 대통령 암살을 시도했고, 육영수 여사가 피격당하면서 긴급조치 1호가 발동된다. 이로 인해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언론 통제와 반정부 인사 탄압 속에서 유신체제는 한층 더 강화된다.

극작가 윤대성은 60, 70년대 정치적인 파동을 놓치지 않았다. 《출세기》는 그렇게 탄생됐다. 희곡은 언론과 권력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이 투영되면서도, 1960년대부터 1999년도에 폐지된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 검열을 피하기 위해 극중 인물 김창호의 '출세기'는 표면적으로는 27장의 옴니버스로 광부의 생존과 그 과정에서 몰락해가는 인물로 그려내고 있다. 검열을 우려한 우회적 표현이다. 김창호라는 매몰 광부의 출세와 몰락은 언론 자율성이 훼손되고 있던 검열 시대, 특종으로 뉴스를 상품화시키는 매스컴에 대한 비판성을 은유적으로 드러내면서, 《출세기》는 광부의 생존기보다는 정치적 파동을 겪으며 매스컴이 권력의 나팔수이자 소방수 역할을 하던 70년대 한국 사회의 생존기와 다름없다. 극 중에는 두 아이의 엄마인 김창호의 부인 박 여인이 셋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것으로 설정된다. 마지막 장면에는 아이가 유산되었다고 말하는 박여인과 김창호의 대화장면이 등장한다. 1990년에 《출세기》를 대학 연극반에서 공연했을 때는 이 장면을 그냥 넘겼다. 서울연극창작센터 개관 페스티벌로 진행되고 있는 故 윤대성 선생님의 《출세기》 오픈 토크를 준비하면서, '아이의 죽음'은 70년대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대적 메시지가 드러나 있다고 느껴졌다. 그만큼 격동의 70년대는 아이의 죽음을 통해 절망의 시대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윤대성 특별전 전시. 김 교수 제공.
윤대성 특별전 전시. 김 교수 제공.

《출세기》가 발표된 지 반세기가 넘었다. 그동안 《출세기》는 90년대까지 대학 연극반의 단골 작품이 되었고, 1991년도에는 한국연극배우협회에서 협회 창립 공연으로 문예회관 대극장(현 아르코예술극장)에서 1991년 11월 15일부터 11월 28일까지 공연되었다.당시 김창호 역은 배우 길용우 씨가 맡았고, 부인 박 여인 역은 윤석화, 광업소장은 심양홍, 마을 사람으로는 고설봉 선생님이 출연하기도 했다. 이후, 《출세기》가 다루는 사회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광산의 사회적 재난은 세월호, 이태원 참사 등 수많은 재난으로 되풀이되었고, 진영 논리와 정치 편향으로 여론은 왜곡되고 진실은 은폐되는 가짜뉴스가 넘쳐나는 사회가 되었다. 난감한 것은 시민이다. 인간의 욕망, 자본, 미디어 환경, 그리고 물질만능의 세상은 삶의 극단적인 양극화를 만들어냈다. 재난의 진상 규명보다는 프레임 전쟁의 정치적 이슈로 변질되고 있다. 출생연도가 1974년인 《출세기》가 세상에 나온 지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2025년의 한국 사회는 여전히 74년생 《출세기》가 살아가고 있다.

74년생 《출세기》는 51살이 되어, 서울연극창작센터 개관 페스티벌에서 진행되고 있는 故 윤대성 작가의 세 작품 특별전(《출세기》, 《신화 1900》, 《방황하는 별들》)으로 소환됐다. 특별전 동안 서울연극창작센터 2층 연극인 라운지에는 작가로 살아온 윤대성 선생님의 인생과 삶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밀양아리나(구 밀양연극촌)에서 윤대성 극문학관 앞쪽에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의 연못을 만들고, 개관할 때 대본 하나하나를 집필하며 일화를 설명해주시던 모습 그대로였고, 윤대성희곡상을 밀양연극축제 희곡 공모 프로그램으로 재편성할 당시, 후진 양성에 애착을 보이시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출세기》보다 먼저 탄생한 희곡들부터 수사반장과 다양한 드라마 대본,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사용하시던 용품들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기획이 알차고, 작가 윤대성은 작품을 통해 여전히 살아 계신 듯하다. 함경북도 회령 출신이신 그는, 이제는 입에 담기 어려운 단고기를 생전에 좋아하셨는데, 유독 국물을 즐겨 드셨다.

낭독공연인 《출세기》에는 작품을 기억하는 이들, 혹은 《출세기》의 희곡을 듣고 싶어하는 일반 시민, 연극인, 평론가 등 다양한 관객들이 많이 찾아왔다. 낭독공연은 윤대성 선생님과 각별한 인연이 있는 연출자나 작가들이 맡았다. 《출세기》를 연출한 극발전소 301의 정범철 연출은 윤대성 선생님의 제자이자, 대학 연극반 시절 《출세기》에서 양 매니저 역할을 맡았던 특별한 인연이 있다. 《신화 1900》의 김정근 연출은 윤대성희곡상의 예술감독을 맡았던 바 있고, 《방황하는 별들》을 오픈토크로 진행하는 아스테이지의 방지영 씨 역시 윤대성 선생님의 제자다.

오픈 토크. 김 교수 제공.
오픈 토크. 김 교수 제공.

《출세기》의 낭독공연도 특별전인 만큼 공연 못지않은 입체적인 낭독극으로 선보였다. 16여 명의 배우들은 인물의 윤곽이 분명하게 전달되도록 극 중 장면을 효과적으로 담아냈고, 읽고, 말하고, 등장하고 퇴장하며 진행되는 《출세기》는 2000년대 생이 체감해도 좋을 만큼 속도감 있게 전개되었다.

1974년생 《출세기》는 2024년 12월 3일 이후 탄핵 정국을 거친 지금 시대에도, 만약 배경이 광산에서 현재로 바뀐다면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다. 정범철 연출에게 《출세기》를 60~70년대 한국 정치 상황과 연계해 설명한 후, 동시대적으로 재구성한다면 어떤 변화를 주고 싶은지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전혀 바꿀 생각이 없는데요. 《출세기》는 지금 들어도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이고, 선생님 작품을 그 자체로 무대에 올리는 것이 오히려 동시대적으로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김창호 역의 박수연, 홍 기자 역의 류진현, 광업소장 역의 오정민, 안전실장에 이규태, 그리고 목사 역으로 등장해 존재감을 보인 권태원 배우를 비롯한 16명의 배우들이 함께한 《출세기》는 귀로만 들어도 무대가 선명히 그려지는 낭독공연이었다. 이날 낭독공연에 함께한 윤대성 선생님의 수양딸 김동은 씨는 "아버지께서 생전에 《출세기》를 뮤지컬로 만들고 싶어 하셨어요. 대본을 쓰실 때도 뮤지컬로 공연할 것을 염두에 두시고 쓰셨대요. 생전에 《출세기》가 뮤지컬이 되는 것을 기대하셨는데, 결국 그걸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어요."라고 전했다. 윤대성 특별전은 《출세기》, 《신화 1900》(연출: 김정근, 오픈토크: 김기란 평론가), 《방황하는 별들》(연출: 오석준, 오픈토크: 방지영)로 이어지며, 아카이브 전시는 4월 26일까지 진행된다.

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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