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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라언덕-이화섭] '한국인은 똑똑하다'는 저주

이화섭 기자
이화섭 기자

인터넷에 도는 수많은 확인되지 않는 '썰' 중 하나인데, 도쿄에서 서울로 가는 비행기가 이륙하려다 엔진 결함으로 다시 출발한 공항으로 회항했다. 결국 승객들은 다 내리고 게이트에서 기다리는데 한국인 한 사람이 비행기에 실렸던 수하물을 빼는 모습을 보고 "어, 뺀다, 뺀다!"라고 소리쳤다.

다른 나라 승객들은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한국인들만 '아, 비행기 오늘 못 뜨는구나' 생각하고 빠르게 다른 항공편을 알아보더란다. 다른 나라 승객들은 비행기 취소 방송이 나오고 나서야 그 상황을 파악했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를 소개한 건 이 이야기의 결론이 "한국인은 성질이 급하고 똑똑하고 부지런해서 이런 상황을 가장 먼저 타개해 나간다"에서 오늘의 이야기를 출발시키고 싶어서다. 소위 '국뽕적 발언'이라 불리는 다양한 수사(修辭) 중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문장은 "한국인과 유대인이 세계에서 제일 똑똑하다"는 말일 것이다. IQ가 높다느니, 과학기술 등등에서 한국이 1등 하는 부분이나 최초로 개발한 부분이 많다느니 하는 이야기보다는 앞서 말한 에피소드를 보면 '역시 한국인들은 똑똑해'라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거릴 사람들이 많을 거다.

하지만 '한국인은 과연 똑똑한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똑똑하면 왜 행정고시를 통과한 똑똑한 중앙 정부 부처 공무원들은 의대 정원을 2천 명으로 증원할 때 '과학적 근거'를 대어 설명하고 설득하지 못하고 '못 먹어도 고' 식으로 정책을 추진했나? 성적으로만 보면 우리나라의 상위 5%에 속할 의대생들은 왜 그 똑똑한 머리로 국민은커녕 자기 학교의 타 학과 학우 한 명도 의료 정책 문제에 대해 설득을 못 시키고 미움만 받을까?

이게 혹시 '한국인들이 똑똑해서 발생한 사태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조심스레 던져 본다. 설명과 설득은 사실 머리로 하기보다는 마음도 써야 하는 부분이 있다. 소위 '눈치'라는 개념일 텐데, 눈치를 잘 봐야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니 정부 부처 공무원들은 "한국인은 똑똑한 국민이니까 우리가 과학적 근거가 있다 하면 '있으니까 저러겠지'라고 눈치껏 받아주지 않을까" 하고 추진하지 않았을까?

의대생들 문제도 이 관점에서 풀어 보면 설득보다는 실력 행사가 더 쉬운 길이라는 합리적이고 똑똑한 의대생들의 선택 때문이라 분석할 수 있다. 어차피 의료 인력, 특히 '의사' 직군은 의대생이 아니면 할 수 없기 때문에 굳이 타인을 설득시켜 우리 편을 들게 하는 번거로운 과정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정부에 의지를 보여 주는 게 훨씬 쉽고 합리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기하지 않은가? 똑똑한 한국인들이 눈치껏 합리적인 선택을 했는데 왜 우리의 삶은 괴로운지 말이다. 이런 경우는 선택의 합리성이 아니라 선택의 방향이 옳은지를 살펴봐야 하지만 그 누구도 이에 대한 반성은 없다. "남들도 다 하는데 왜 나만 갖고 그래?"라며 화를 내거나 "어차피 이렇게 안 하면 나만 죽는데 어떡하라고"라는 변명만 남아 있다.

이런 행동과 결과가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진 것이 지금 한국인들이 겪는 괴로움이리라. 이쯤 되면 한국인에게 똑똑하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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