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양진오의 대구경북의 집이야기] 화마가 삼킬 수 없는 천년 사찰, 고운사

고운사의 얼굴 가운루가 소실된 터에는 잔해만이 쌓여 있다.
고운사의 얼굴 가운루가 소실된 터에는 잔해만이 쌓여 있다.

◆불타오른 경북의 산하

2025년 3월 하순, 화마가 경북 북부 내륙을 집어삼켰다. 3월 22일 오전, 의성군 안평면 괴산리의 한 야산에서 시작된 불길은 거센 바람을 타고 안동, 영양, 청송, 영덕까지 순식간에 번졌다. 수천 채의 주택이 전소됐다. 아니, 주택이 불탄 게 아니라 삶터가 불탔다. 애면글면 터전에 새겨진 정 든 인생이 사라졌다.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대피소로 내몰렸고, 지역의 문화유산 또한 속절없이 화염에 휩싸였다.

경북의 산하는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했고, 끝내 불길을 피하지 못한 어르신들도 적지 않았다. 뉴스는 속보로 피해 상황을 전했지만 산불이 초래한 충격의 깊이는 좀처럼 가늠되지 않았다. 고운사(孤雲寺) 전각이 소실되었다는 비보에 이어, 만휴정(晩休亭)과 하회 마을마저 위태롭다는 소식이 잇따라 전해졌다. 가슴이 그을음으로 뒤덮였다.

산불화재전 경북 의성 고운사 전경.
산불화재전 경북 의성 고운사 전경.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과 인연이 깊은 고운사는 오래전부터 마음 한편에 조용히 깃들어 있던 사찰이었다. '고운'이라는 이름이 왜 그리 좋았는지, 불러볼 때마다 몸 안으로 구름 한 줄기가 드는 듯했다. 외로운 구름 같은 절집. 관광객이 북적이지 않고 사하촌엔 가게 하나 없는 곳. 그래서 더없이 청정하게 느껴졌던 곳이었다.

경내를 천천히 거닐던 그날의 고요가 문득 떠올랐다. 계곡을 가로질러 단아하게 앉은 가운루(駕雲樓)는 분별의 관념에 사로잡힌 중생을 조용히 일깨우는 전각이었다. 왕실 건물의 위엄을 품은 연수전(延壽殿)의 솟을대문과 팔작지붕, 그리고 단청의 절제된 화려함은 경외감을 불러일으켰다. 우화루에 그려진 호랑이 벽화는 호시우행(虎視牛行)의 지혜를 환기하며, 나그네의 미욱한 마음을 꿰뚫었다. 그런 고운사의 천년 보물들이 화마로 사라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계곡 위를 가로지르는 누각 중 최대 규모인
계곡 위를 가로지르는 누각 중 최대 규모인 '의성 고운사 가운루'가 이번 산불화재로 소실됐다.

◆고운사의 백미였던 가운루

경북의 산과 들을 태운 화마가 완전히 꺼졌다는 뉴스를 듣고 곧 고운사로 향했다. 대한 조계종 16교구 본사 고운사는 신문왕 원년(681년) 해동 화엄종의 종조인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된 유서 깊은 사찰이다. 창건 당시에는 '높을 고(高)' 자를 써서 '고운사(高雲寺)'라 불렸으나 신라 말기 이곳에 머물던 최치원이 자신의 호인 '고운(孤雲)'에서 '외로울 고(孤)' 자를 따와 '고운사(孤雲寺)'로 부르게 되었다.

이른 아침 고운사 산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조심스레 숲길에 발을 들였다. 천년 숲은 산불의 흔적이 역력했다. 산자락은 검게 그을려 있었고 나무 밑동은 숯처럼 거칠게 일그러져 있었다. 길가의 우람한 소나무들은 껍질이 그을린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낸 채 서 있었다. 가지 끝마다 그을음이 내려앉은 숲길은 한때 위안을 안겨주던 평화로운 풍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고운사 천년 숲길은 뜨거운 화마의 흔적이 역력했다.
고운사 천년 숲길은 뜨거운 화마의 흔적이 역력했다.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으로 향할수록 무언가 비어 있는 풍경이 시선 저편에서 서서히 다가왔다. 본래라면 천왕문을 통과하기 전, 그 너머로 가운루의 자태가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냈어야 했다. 계곡을 품에 안듯 앉아 있던 그 전각은 고운사의 아름다운 첫 인상이었다. 그러나 그날 천왕문 저 너머로 가운루가 보이지 않았다.

천왕문을 지나 고불전 앞에 다다랐을 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야말로 폐허였다. 가운루는 무너져 있었다. 기둥은 모두 타버렸고 지붕은 내려앉아 그 형태를 알아볼 수 없었으며 잔해가 터 주변을 뒤덮고 있었다. 본래 이름이 가허루(駕虛樓)였던 가운루는 계곡의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잇되 물길을 막지 않은 지혜로운 전각이었다. 언제든 전각 아래로 물이 흘러가도록 허용하여 자연의 흐름을 가로막지 않았다. 경계를 분별하지 않으며 순리를 거역하지 않는 가운루는 그 자체로 불교의 진리를 표상하는 고운사의 백미였다.

한동안 폐허가 된 가운루 터 앞에 발이 붙은 듯 서 있었다. 허물어진 것은 단지 전각 하나만이 아니었다. 가운루에 바쳐진 불자와 나그네들의 지극한 원력과 선의가 함께 무너져 내린 듯했다. 가운루가 사라진 자리에 계곡의 경계가 또렷하게 드러났는데 그 풍경이 참으로 허허로웠다.

그럼에도 이 폐허 앞에서 그저 슬픔에 머물고 싶지는 않았다. 그 오래고 긴 세월을 산 가운루와 우화루 그리고 그 전각 주변에 명멸한 생명의 풍경을 기억하겠노라 다짐했다. 화마는 전각을 앗아갔지만 그곳에 스며든 선의까지 지우지는 못하리라는 믿음이 마음 깊은 곳에서 오래도록 꺼지지 않았다.

조선 왕실의 공경 정신이 깃든 연수전이 이번 산불화재로 소실돼 더는 볼 수 없다.
조선 왕실의 공경 정신이 깃든 연수전이 이번 산불화재로 소실돼 더는 볼 수 없다.

연수전이 있던 자리에 이르자 발걸음이 멈췄다. 말문이 막혔다. 연수전 터는 화마의 흔적으로 얼룩졌고 무너진 담장을 따라 타버린 잔해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탄내는 바람결에 실려 공기 속을 떠돌았고 부서진 기와 조각들은 산처럼 겹겹이 쌓여 있었다.

연수전은 단순한 전각이 아니다. 연수전은 왕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어첩을 봉안한 조선 왕실의 전각이 아닌가. 불교의 수행 정신과 왕실의 공경 정신이 고운사에서 조화를 이뤘던 거다. 불교와 유교의 지혜를 동시에 간직한 이 희귀한 유산이 한 줌 재로 변해 있었다. 연꽃과 해, 거북과 용이 어우러진 벽화들, 왕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던 글귀들은 모두 사라졌고 눈앞엔 시커먼 잔해만이 남아 있었다.

◆다시 살아날, 외롭지 않은 고운사

발걸음은 대웅보전으로 향했다. 화마의 불길 속에서도 대웅보전은 기적처럼 살아남아 있었다. 전각 안에는 스님의 독송이 잔잔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마치 그 독송은 화마의 상처를 입은 고운사를 위로하는 부처님의 노래 같았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불길 속에서 고운사를 지켜주신 부처님께 경건히 삼배를 올렸다. 종교를 따질 이유는 없었다. 불자는 아니나마 그저 이 순간만큼은 고운사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고운사는 세속의 삶에 지친 이들에게 오래도록 쉼이 되어준 터전이었다. 비단 최치원에게만 쉼이 허락된 터전이 아니었을 것이다. 근래에도 이곳을 찾아 세속의 삶을 내려놓고 쉼을 얻은 이들이 분명히 있었을 테다. 누군가는 잠을 못 이뤘을 터이며 누군가는 속절없이 괴로웠을 것이다. 그리고 끝내 누군가는 이곳에서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을 것이다.

잔해 위의 범종은 소신공양을 마다하지 않은 등신불을 연상시킨다.
잔해 위의 범종은 소신공양을 마다하지 않은 등신불을 연상시킨다.

답사를 마치고 귀가하기 전, 다시 한번 범종이 있던 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온몸이 검게 그을린 채 금이 간 범종이 잔해 위에 홀로 서 있었다. 주위는 기왓장과 돌 부스러기, 무너진 담벼락 조각들로 뒤엉켜 있었다. 산사의 보물 전각들이 무너졌지만, 범종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잔해 위의 범종은 자신을 불살라 소신공양을 한 등신불을 떠올리게 했다. 범종은 세속의 화염 속에서도 미동조차 없었던 위대한 선지식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다시 이 범종이 울릴 날이 올까, 속으로 조용히 물었다. 하지만 곧 생각을 바꿨다. 어쩌면 범종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잔해 위에서 깊게 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땅속 깊은 곳으로 하늘 너머로 고운사의 슬픔을 걷어내는 은은한 노래를 말이다. 소실된 전각 터는 폐허가 되었지만 범종은 자비로운 공력으로 그 폐허를 살릴 준비를 하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고운사를 내려다보는 등운산과 가운루, 우화루, 연수전 터를 천천히 일별한 뒤 산길을 따라 조용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언젠가 다시 이 사찰을 찾으리라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그때였다. 몸이 불편한 한 여성 불자가 느리고 고된 걸음으로 대웅보전을 향해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 발걸음 하나하나가 마치 윤희의 길을 걷는 구도자의 순례를 연상시켰다. 조용히 인사를 건넸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저기 범종이 서 있는 폐허의 잔해 위로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화마는 고운사의 모든 것을 태우지는 못했다. 고운사는 외로운 절이 아니었다.

양진오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양진오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양진오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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