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백정우의 읽거나 읽히거나] 불안을 감추고 선 현대인의 초상

[책]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피터 한트케 지음 / 민음사 펴냄

[책]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책]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남자는 싸운다. 공원에서 길에서 술집에서 바에서 타지에서 운동장에서. 120쪽에 불과한 짧은 이야기 안에서 대여섯 차례 싸움을 벌인다. 시비를 걸고 싸움을 거는 쪽은 늘 남자다. 왜 그럴까? 오늘 아침, 그는 실직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해고당했다(고 스스로 판단하여 일터를 떠났다). 작가는 주인공의 실직 장면을 이렇게 적고 있다. "마침 오전 새참을 먹고 있던 현장감독이 그를 힐끗 올려다보는 순간 그는 그것을 해고 표시로 이해하고 공사장을 떠났다." 희곡 '관객모독'으로 명성을 얻은 피터 한트케의 소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의 시작이다.

그의 이름은 요제프 블로흐. 실직한 이후 하릴없이 도시를 쏘다니고 들르는 장소마다 여자들에게 치근대더니 결국 극장 매표원과 하룻밤을 보내고는 "오늘 일하러 가지 않으세요?"라고 묻는 그녀를 목 졸라 죽인다.

저금통장을 가져 본 적 없고, 극장에서 손전등으로 얼굴을 비췄다고 안내원의 얼굴을 때리고, 검문하는 경찰을 전화번호부로 갈겨 기절시키는 남자. 그는 홍상수 초기영화의 사내들과 유사하다. 그러니까 섹스만 있고 관계가 없는, 일상만 있고 생활은 없는 유형의 인간. 첫 쪽의 단 두 줄만이 (골키퍼였고 공사장 조립공이던) 그가 한 때 삶의 루틴이 있던 인물임을 말해줄 뿐이다. 매표원을 죽인 후 국경의 여관과 여인숙을 전전하며 먹고 마시며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주고받다가 무의미한 언어유희를 펼치거나 시비 붙는 블로흐는 영락없는 홍상수의 사내들이다.

새삼 궁금해진다. 그는 왜 싸울까? 블로흐는 이전에 꽤 유명한 골키퍼였다. 어쩌면 그의 폭력성은 골키퍼 시절부터 차곡차곡 쌓였는지도 모른다. 몸이 부딪히는 역동적인 경기장에서 공이 날아오는 순간을 대비하며 90분 내내 극도의 긴장으로 다져진 내성 같은 것 말이다. 숱한 골을 막았거나 허용했고, 페널티킥을 마주하기도 했을 것이다. 때문인지 한쪽을 포기하고 한쪽으로만 몸을 날린다는 페널티킥을 대하는 골키퍼의 수칙. 그렇다고 해도 방향을 잘못 선택하는 순간 실점하고, 치명적 결과로 이어진다. 때론 선수 인생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 실직한 탓에 그의 불안은 극대화됐을 것이고, 심지어 살인까지 저질렀다. 손 내밀 친구도 마땅찮고, 헤어진 아내는 도움을 외면했으며 경찰의 수사망에서 언제까지 자유로울 순 없는 법이니까.

블로흐는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반응한다. 상대의 의도를 간파하려 하거나 의중을 알아보려는 노력 따윈 없다. 자의적으로 먼저 판단하고 서둘러 결정한다. 영락없는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행동양식이다. 대화는 어긋나고 말은 허공을 맴돌며 행동은 뜨악할 수준이다. 요샛말로 '난가병'에 걸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러니 소설의 도입부, 블로흐가 길에서 무심코 손을 들었을 때 "택시 한대가 뒤에 서더니 그에게 빨리 타라 했다."고 택시에 올라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영화평론가 백정우
영화평론가 백정우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은 사회조직 밖으로 밀려나 쫓기는 한 남자를 건조하고 삭막한 눈초리로 응시하는 드라마다. 작가는 도구로 전락한 인간이 활보하는 세상에 만연한 소통부재를 배경으로 깔았다. 우리라고 다르지 않다. 대화가 아닌 언어의 일방적 난사가 일상화된 시대를 살아가는, 불안을 감추고 선 얼굴들로 가득하니 말이다. 나와 당신의 일상 위로 블로흐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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