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같은 값 주고 이런 걸 사 먹겠어요?"
젊은 남자 킬러 투우(김성철 분)가 과일가게에서 덤으로 받은 멍들고 오래된 귤을 가리키며 말한다. 바닥에 귤을 떨어트리고는 보란 듯 발로 짓이기까지 한다.
백발에 여윈 조각(이혜영)이 이 모습을 참담한 눈빛으로 지켜본다. 자신의 신세가 꼭 파과(흠집이 난 과일) 같아서일까.
조각은 40여 년 동안 단 한 번의 실수도 저지르지 않은 전설적인 킬러다. 한때는 혼자서 스물여덟명의 장정을 단번에 해치우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수전증으로 칼을 떨어뜨리기도 하고 관절이 이곳저곳이 삐걱거리는 통에 격한 동작을 할 때마다 신음이 절로 나온다. 젊은 시절이었다면 손쉽게 제압했을 만한 상대도 사생결단으로 안간힘을 다해야 대적할 수 있다.
반면 투우는 살인 청부업체 '신성방역'의 떠오르는 별이다. 혈기로 펄펄 뛰는 그는 꼭 조각의 어릴 적 같다. 남자 너댓명을 처리하는 데 채 10초가 걸리지 않을 만큼 재빠르고 힘이 넘친다.
민규동 감독의 영화 '파과'는 예순을 훌쩍 넘긴 노년의 여자 킬러 조각과 젊은 남자 킬러 투우의 대결을 그린 액션물이다. 구병모가 2013년 출간한 동명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소설은 그간 한국 문학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던 독특한 여성 서사로 독자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다. 특히 사회 주변부로 여겨지는 노년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노화와 인간의 쓸모에 대해 통찰한 점이 호평받았다.
영화 역시 이런 주제 의식을 그대로 가져왔다. 조각은 회사에서 자신의 효용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현역으로 활동하기를 고집한다. 아무리 몸이 예전 같지 않더라도 그의 신념은 늙지 않고 그대로기 때문이다.
그가 속한 신성방역은 돈을 받고 살인을 대신해주는 단순한 청부업체가 아니라, 악행을 저지르며 살아온 벌레보다 못한 나쁜 놈을 죽여주는 곳이다. 조각은 가족도 없이 이곳에서 오직 '방역'에만 몰두하며 젊은 날을 다 보냈다.
그러나 젊은 수의사 강 선생(연우진)을 만난 뒤 그의 일상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쓰러진 조각을 치료해주다 그의 정체를 알아챈 강 선생은 원칙대로라면 제거 대상이지만, 조각은 아내를 잃고 딸과 단둘이 살아가는 그를 도저히 죽일 수 없다.
급기야 누군가 강 선생을 죽여달라고 요청하고 조각이 이를 받아들이기를 망설이면서 투우와 회사의 표적이 된다.
투우는 제대로만 싸운다면 단번에 조각의 숨을 끊을 수 있음에도 마치 사냥 과정을 즐기는 포식자처럼 그를 괴롭힌다. 심리 게임으로 시작된 둘의 싸움은 후반부로 가면서 육탄전으로 번지고 마지막에는 칼과 총기까지 동원된 액션이 펼쳐진다.
신체적 악조건 속에서도 조각은 연륜을 바탕으로 고수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주변 사물을 잡히는 대로 집어 상대를 내려치고 눈 깜짝할 사이에 비녀로 급소를 노리기도 한다. 밧줄을 쥐고 건물을 가로지르며 총을 쏴 여러 명을 쓰러뜨리는 장면은 영화의 하이라이트다.
올해로 63세인 이혜영은 젊은 배우도 감당하기 힘들어 보이는 강도 높은 액션 장면을 실감 나게 표현했다. 스턴트맨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액션을 직접 소화했다. 구덩이에 파묻혀 벌레와 흙에 뒤덮이고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시멘트 바닥을 구르는 등 혼신을 다한 연기에 찬사가 절로 나온다.
혼자 늙어가는 여자의 고독과 강 선생을 향한 알쏭달쏭한 마음, 투우에 대한 연민 등 감정 표현 또한 훌륭하다. 2월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됐을 당시 트리시아 터틀 집행위원장은 그를 두고 "압도적인 연기에 놀라울 뿐"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다만 과감한 각색은 원작 팬들에게 아쉽게 느껴질 수 있다. 소설과는 달리 조각과 투우의 서사에 초점을 맞추는 바람에 조각 내면의 고민이 덜 부각되는 느낌이다. 투우가 조각에게 느끼는 복수심과 이로 인해 벌이는 일들도 쉽사리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30일 개봉. 122분. 15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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