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수지의 조선후기 당쟁사] '이인좌의 난' 등장과 실패

반노론 연대 이인좌의 난-온건소론이 강경소론 진압 후 탕평(蕩平) 등장

소론 영수 이광좌. 조선 경종~영조 때의 문신, 소론의 영수 오성부원군 영의정 이항복의 현손이다. 글씨를 잘 썼고 서예와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또 자화상을 즐겨 그렸다고 한다. 나무위키 제공.
소론 영수 이광좌. 조선 경종~영조 때의 문신, 소론의 영수 오성부원군 영의정 이항복의 현손이다. 글씨를 잘 썼고 서예와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또 자화상을 즐겨 그렸다고 한다. 나무위키 제공.
좌의정 조태억. 노론 4대신이었던 조태채와 같은 집안이다. 이 초상화는 1711년 조선통신사 정사로서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일본에 다녀왔는데, 당시 그려진 그림이라고 한다. 나무위키 제공.
좌의정 조태억. 노론 4대신이었던 조태채와 같은 집안이다. 이 초상화는 1711년 조선통신사 정사로서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일본에 다녀왔는데, 당시 그려진 그림이라고 한다. 나무위키 제공.
이인좌의 난을 소재로 만든 영화
이인좌의 난을 소재로 만든 영화 '역모' 포스터.

◆연잉군의 게장과 생감 그리고 인삼차 – 경종의 급서(急逝)

'임인옥안'에 역모의 수괴로 등재된 영인군은 절체절명에 몰려있었지만, 최후의 승자는 연잉군이었다. 이것은 소론이 강경파와 온건파로 분열되어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경종은 소론 강경파인 김일경(金一鏡) 등과 손을 잡고 정국을 일단 반전시켰지만, 강경파가 다수파는 아니었다. 더구나 시간이 흐르면서 소론파의 핵심 재상(宰相)들이었던 소론 영의정 조태구(趙泰耉)와 소론 좌의정 최석항(崔錫恒)이 사망했다. 소론 강경파가 소수파였기 때문에 경종은 정권의 구성을 소론강온연합으로 구성했다. 그렇지만 강온연합을 조율하던 재상들이 사망했고, 경종은 잦은 잔병치레를 겪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경종 4년(1742) 8월 20일에 대비 인원왕후 김씨와 연잉군이 경종에게 한여름에 게장과 생감을 선물한다. 낮에 게장과 생감을 맛있게 먹은 경종은 그날 밤 부터 가슴과 배가 조이듯이 아파온다고 호소한다. 연잉군은 당시 어의 이공윤이 자신의 치료법과는 상극이라며 극구 반대한 인삼차를 경종에게 올렸다. 그 인삼차를 마지막으로 복통과 토사곽란, 설사를 반복하던 경종은 5일만인 경종 4년(1724) 8월 25일에 사망한다. 향년 37세, 재위 4년 만이었다.

영조가 즉위했다. 소론강경파들에 대한 도륙이 시작되었다. 김일경과 목호룡의 국문이 열렸다. 국문을 받던 김일경은 영조 앞에서 '저(矣身)'이라고 하지 않고 '나(吾)'라고 했다. 목호룡은 '어서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라고 했다. 두 사람은 영조를 권력에 눈이 어두워 탐욕스럽게 형을 살해하고 임금 자리를 노략질한 시정잡배처럼 대했다. 영조는 치욕감에 몸을 떨며 오열하며 울부짖었다. "저자들을 죽인다고 한들 내 마음이 얼마나 시원할 것이냐"

◆반노론연대 이인좌의 난 - 형을 죽인 왕, 영조는 숙종의 아들인가

소론 온건파들은 떨고 있었고, 소론 강경파들은 모두 죽었다. 한양을 비롯해 전국에 괘서가 나붙기 시작한 것은 이즈음이었다. 괘서의 내용은 차마 영조에게 보고할 수 없고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패륜적인 내용이었다. 전해지는 괘서 자체의 내용은 없으나 당시 정치 정황상 영조가 형 경종을 살해후 정권을 찬탈했다는 내용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것이 영조 4년에 발생한 '이인좌의 난'의 정치적 명분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흉흉한 소문이 있었다. 형을 살해하고 왕좌를 찬탈한 영조가 과연 숙종의 아들일 것이냐 하는 문제였다. 이것은 영조의 친모(親母)이자 숙종의 후궁이었던 숙빈 최씨가 김춘택의 사인(私人)으로 있다가 계획적으로 궁에 투입된 사람이었다는 것과 관계가 있다. 즉, 숙빈 최씨가 김춘택의 여자가 아니었겠느냐는 의혹이었다.

이런 의혹 때문에 김춘택이 정권을 다시 노론으로 환국하는데에 공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론도 김춘택은 멀리했다. 영조는 친모(親母) 이야기 나오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영조가 친모의 추숭사업을 하는 것에 대해서도 신하들은 전혀 반대할 의사가 없고 적극 찬성함에도 불구하고 납작 업드려 그와 관계된 얘기들은 매우 조심스럽게 꺼내야 할 정도였다. 이것은 친모의 출신이 단지 천한 궁녀 출신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생모 얘기가 나올때마다 나타나는 영조의 히스테리컬한 반응은 궁녀 출신인데 왕의 승은을 받아 무려 빈(嬪)의 지위까지 오를때에는 그 뒤에 어떤 배후 세력들과 결탁하여 뒷거래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누구나 추측할 수 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었다.

형을 죽였을 것이라는 의혹에 덧붙여서 혹시 숙종의 아들이 아닐수도 있다는 의혹은 영조를 왕으로 만든 노론에게는 크게 나쁜 일이 아니었다. 흠결이 많은 사람이 '노론이 아니었다면 감히 왕이 될 수 있었겠나'라는 것이 노론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약점이 많은 왕은 노론이 좌지우지 하기 쉬웠다. 영조의 왕권에는 노론의 지분이 80% 이상이라고 노론은 생각했다.

영조는 그런 노론이 싫고 부담스러웠다. 집권하면서 노론에게 정권을 줬지만 영조는 그런 노론을 내보내고 소론 온건파에게 정권을 줬다. 영조 3년(1727) 7월에 영조는 노론 관료 140여 명을 일거에 축출하고 소론 영수 이광좌(李光佐)를 영의정으로, 조태억(趙泰億)을 좌의정으로 임명하면서 정권을 소론 온건파에게 내준다. 이것을 정미환국이라고 한다.

정미환국을 단행하고 6개월 후 일어난 것이 바로 '이인좌의 난'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인좌의 난'은 실패했는데, 이것은 영조가 단행한 정미환국 덕분이었다. 정미환국이'신의 한수'가 된 셈이었다. 즉, 소론은 강경파 온건파를 막론하고 영조가 즉위한 후로는 함께 단결하여 거사를 도모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영조가 소론 온건파를 등용하면서 소론의 강온연합이 깨져버렸던 것이다.

무신년에 일어났다고 해서 '무신난' 이라고도 하는 이인좌의 난은 전국적 규모의 조직으로 일어났다. 당시 도적떼라고 하는 녹림당도 참여하는 등 신분을 초월해 구성원들이 조직되었고, 귀양 등으로 목숨만은 건진 강경소론들과 남인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광범위한 전국적 반노론연대'였다.

이인좌는 세종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의 후손으로, 남인이었던 조부 이운징은 전라도 관찰사였는데 갑술환국때 축출되었다. 또 이인좌의 아내는 남인의 거두 윤휴의 손녀였다. 난을 일으킨 핵심인물들은 대부분 이런식의 환국으로 역모죄를 쓰고 몰락한 뒤로 복권되지 못한 남인과 소론 강경파 집안의 후손들이었다.

역적으로 귀양간 뒤에 복권이 되지 못한 집안의 후손들은 과거에 출사할 자격이 없었다. 양반 집안의 후손이지만 과거를 볼 수 없다는 것은 , 조선의 양반에게는 사실상 살아야 할 의미가 없는 것과 같았다. 이런 양반의 후손들이 전국적으로 있었고, 그들이 전국 조직을 만든 것이다. 각 지역의 총책들이 있었는데, 경기도는 이인좌, 정세윤 등, 호남은 박필현, 박필몽, 심유현, 부안 총책은 부안 갑부 김수종, 영남은 이인좌의 동생 이응좌와 정희량 등이었다.

실질적인 군사를 동원하기 위해 부안 갑부 김수종은 변산도적들을 포섭했다. 그리고 박필현이 군사를 섭외한 측은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녹림당이었다. 호남과 영남의 도적 수 천명이 합류하는 것으로 조직되었다.

영조 4년(1728) 3월 15일 이들은 청주성에 무혈 입성했다. 청주성에 살고 있던 소론 강경파 와 남인들이 스스로 가담해서 문을 열어줬기 때문이다. 청주성에 진입하고 경종의 빈소를 만들고 곡을 했다. 그리고 정통성을 제대로 갖춘 임금으로 인조의 장자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坦)을 추대했다. 반군들의 전략은 외기내응(外起內應), 즉, 지방에서 먼저 군사를 일으켜 올라가면 서울에서 호응하여 만난다는 전략이었다. 이를 위해 지방에서 서울로 진격하는 동안 서울 가까운 곳에서 서울로 진입할 정규군의 호응이 필요했다. 이에 현직 평안병사(平安兵使) 이사성(李思晟)이 가담했다.

◆소론 온건파 진압군 - 소론의 난은 소론이 진압하라

청주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영조와 조정은 경악했다. 즉시 도성을 방어할 계획을 세우고 병조판서 오명항(吳命恒)을 최고사령관으로 삼고 조현명(趙顯命), 박문수(朴文秀)등으로 토벌군 지휘관을 구성했다. 이들은 모두 소론이었다. 소론의 난은 소론이 진압해야 한다는 것이 영조의 생각이었다.

토벌군과 봉기군은 안성에서 맞붙었다. 안성에서 토벌군은 봉기군들을 대파했다. 토벌군은 봉기군을 진압하는데에 비장의 무기인 신기전을 사용하기도 했다. 안성 봉기군이 대파되고, 이응좌와 정희량이 이끄는 경상도 봉기군도 진압되었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봉기군이 함께 실패했는데, 이것은 가담을 약속했던 현직 전라도관찰사 정사효가 막판에 배신했기 때문이었다.

전국이 진압당한 봉기군들의 피로 뒤덮혔다. 전국 각처에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냇물로 흘러들어가 핏물로 흘렀다. 시체 썩는 냄새는 1년이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진압한 이후 영조 4년 4월 14일 영조는 역적 10인 '이인좌·이응보·박필현·이사성·정희량·박필몽·남태정·민관효·이유익·심유현'을 10괴(怪)라고 지정하여 공표했다. 이들은 모두 죽었다. 전투 중에 죽거나 생포된 뒤에 처형되었다.

무신란을 진압한 이후 영조는 국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방책으로 '탕평'을 기획했다. '탕평'의 원칙은 두 가지, 양치양해(兩治兩解)와 쌍거호대(雙擧互對)였다. 양치양해란 처벌을 한다면 양쪽 모두 똑같이 한다는 것이고, 쌍거호대란 양쪽을 모두 등용한다는 인사정책이다.

집권 초에 무신란을 겪은 영조는 소론강경파를 진압한 소론온건파와 노론을 함께 공평하게 등용하여 왕권에 복종하는 새로운 정파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소론온건파는 강경파를 제물로 바치고 정권안으로 들어갔다. 영조의 '탕평'은 이렇게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가운데에서 탄생했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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