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서명수] 군자의 복수, 지연된 정의

서명수 객원논설위원(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서명수 객원논설위원(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君子報仇 十年不晩'(군자보구 십년불만).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범저채택열전'(范雎蔡澤列傳)에 나오는 고사다. 춘추전국시대 진(秦)나라 재상이 된 범저(范雎)가 자신을 모함했던 위(魏)나라를 쳐서 원수를 갚았다는 데서 비롯됐다.

중국 역사의 또 다른 복수의 화신은 '오자서'(伍子胥)다. 부친과 형을 죽인 초평왕(楚平王)의 무덤을 파헤쳐서 삼백 대의 채찍질(掘墓鞭屍·굴묘편시)을 했다. 이처럼 당장은 아니더라도 반드시 복수한다는 것이 중국인의 정서다. 덩샤오핑(鄧小平) 시대의 대외정책인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기른다'는 '도광양회'(韜光養晦)의 사적 버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 무협의 기본 베이스는 '복수와 정의'다. 복수를 위해 무림(武林)의 고수가 되기까지 절치부심하는 과정이 무협 소설과 영화의 처음이자 끝이다. 진용(金庸)의 '사조영웅전'이나 '천룡팔부'는 강호의 도리를 지키는 것이 복수라는 기본 서사를 충실하게 따른다. 가족의 원한 따위는 잊어버리고 '화해와 용서'의 손을 내밀면서 복수는 꿈도 꾸지 않고 원수도 사랑하는 우리의 정서와 판이하게 다르다.

조희대 대법원이 공직선거법 제270조의 재판 '강행규정'(1심 6개월, 2·3심 각 3개월)을 지키라며 법원에 권고문을 보낸 것이 2024년 9월 30일이었다. 하지만 어길 경우 처벌 규정이 없어 사문화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조 대법원장의 조치는 만시지탄의 조치였다.

허위사실공표 혐의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기소된 것이 2022년 9월 8일이었다. 재판 기한이 제대로 지켜졌다면 1심은 2023년 3월, 2심을 거쳐 3심까지 2023년 9월, 늦어도 그해 연말에는 판결이 내려졌어야 했다. 그러나 1심은 6개월이 아니라 20개월이 더 지난 2024년 11월 끝났고, 2심도 한 달여 더 늦어진 3월 26일에야 선고가 났다. 이 후보의 공직선거법 상고심은 오늘 당장 선고하더라도 선고 기한이 19개월이나 지난 재판이다.

만일 상고심에서 100만원 이상의 벌금형이 확정된다면 이 후보는 대선 출마 자격을 상실하고 민주당은 선거보전금 434억원을 반환해야 한다. 이런 중차대한 정치적 운명이 걸린 상고심에 온 국민이 촉각을 곤두세우게 된 1차적 책임은 사법부에 있다. 지난 대선 때의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한 재판이 다음 대선이 치러질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은 사법 정의가 사라진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였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무림에선 복수에 시효가 없다지만 선거사범에 대한 재판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민주주의와 법치가 정치인들에 의해 조롱·무시당하고 형해화(形骸化)된다. 그것이 지금 이 나라의 현실이다. 사법 정의의 실현은 사적 복수도, 군자의 복수도 아니다.

무엇보다 선거 과정의 허위사실공표 혐의에 대한 판례를 지금 시점에 명확히 하지 않을 경우, 불과 보름여 앞으로 다가온 대선에서 허위사실공표를 통한 국민 기만 행위가 재연돼도 처벌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법치(法治)는 사소한 규정을 제대로 지키는 데서부터 확립된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는 격언을 다시 기억하자. 대법원이 29일 이 후보의 선거법 상고심 선고 일정을 5월 1일로 확정했다. 대법원의 신속한 선고는 헌법 제84조 논란 등 대선 후 더 큰 정치적 혼란을 방지하고 법의 존엄과 법치주의를 확립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만시지탄이지만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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