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란 파커 감독의 '미시시피 버닝'(1988)은 1964년 미시시피 주에서 흑인에게 자행된 폭력을 그린 영화이다. FBI와 해군의 수색 결과 다수의 시신이 농장과 늪지대에서 발견되었는데, 흑인청년의 장례식에서 목사는 말한다. "그들(백인)은 희생자 중에 백인 2명도 있음을 기억해달라고 말합니다."
한나 아렌트는 전후 독일인의 명제인 "우리 모두가 유죄다"라는 말의 속성을 비판한다. 아렌트에 따르면 "모두가 죄인인 곳에서 실제로 유죄인 사람은 없다." 즉 우리 모두가 유죄다, 라고 할 때마다 모든 실제의 죄를 묻어버리는 결과를 낳고, 심판대에 세우지 못한 실제 가해자와의 '연대 선언'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백인이 유죄를 고백하는 장면에서도 유사한 은폐를 보았기에 "실제로 죄가 있거나 책임이 있는 사람이 발견되는 것을 막기 위해 집단적으로 죄를 인정하는 것보다 더 나은 보호책은 없다."고 했다.
마리 루이제 크노트의 비범한 에세이 '뉴욕 거리의 한나 아렌트와 랠프 엘리슨'은 1965년 7월 29일, 한나 아렌트가 작가 랠프 월도 엘리슨에게 보낸 20줄의 짧은 편지 한통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아칸소 주 학교의 흑인 차별로 야기된 리틀록 사건에 대해 저술한 1959년의 아렌트와, 선거권법 제정 직전 랠프 앨리슨에게 편지를 쓴 아렌트 사이에 어떤 차이 혹은 변화가 있는지를 살핀다. 아렌트가 이전까지 고수하던 입장을 수정하게 된 영감과 배경이 궁금했던 것. 겉으로는 환대이론을 펼치면서도 무상한 용서를 경계·외면함으로써 지나친 유대민족주의로 흐른 타자의 철학자 레비나스에게 가해진 호된 비판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책에서 한나 아렌트는 냉정한 평가 대상이 된다.
당시 한나 아렌트는 리버사이드 드라이브 370번지에, 랠프 엘리슨은 730번지에 살았다. 아렌트의 거처는 어퍼 웨스트사이드의 유대인 이민자 지역이었고, 엘리슨은 슈거힐 근처였다. 그러니까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세상(물리적 거리와 다른 정치사회적 거리)이 놓였는지를 이야기하는 동시에 나치로부터 탈출한 아렌트가 흑인문제에 보인 태도를 탐색하는 것, 이 책의 시작이면서 전부이다.
책은 "예전에 이 대양을 건너서 흑인과 유대인 두 민족이 이 땅에 입성했다. 일부는 사슬을 찼고, 다른 일부는 도망자로 들어왔다."(20쪽)고 적고 있지만 그렇다고 아렌트를 옹호하는 건 아니다. 흑인 운동가들의 구체적인 행동과 달리 사회시스템 변화에 목소리를 낸 아렌트였다. 즉 학교 입학 같은 당면 과제보다 결혼금지법 폐지 등 상위법의 개선을 언급했는데, 작가는 아렌트의 법 해석을 "차별을 어떻게 철폐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차별이 정당화된 사회적 영역에서 차별을 어떻게 제한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였다."고 규정한다.

그럼에도 주목할 것은 작가가 엘리슨의 '보이지 않는 남자'와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을 내세워 두 사람 모두 같은 이상을 추구한 인물로 상정했다는 점이다. 이 같은 배경에 대해 "행위하지 않음으로써 위험에서 벗어난다면, 행위하지 않는 것도 행위의 순간임을 알고 있었다. (중략) 행위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행위이다."(50쪽) "두 사람은 모두 순응의 위험이나 유혹에 대해 경고했다."고 첨언한다.
편지 한통에서 단초를 얻어 두 사람의 사상을 살피고 당대 사회를 조망하면서 방대한 지적 쾌감을 안겨주는 '뉴욕 거리의 한나 아렌트와 랠프 앨리슨'. 읽기를 참 잘했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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