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晉州)는 예로부터 멋과 풍류의 고장이었다. 남강(南江)이 빚어낸 천혜의 풍광으로 시인묵객(詩人墨客)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근현대의 진주는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가요인 '강남달'을 낳은 산실이자, 숱한 문화예술인들을 배출한 예향(藝鄕)이다. '강남달'을 발표한 김서정, 불후의 명곡들을 남긴 작곡가 손목인과 이재호, 가요황제 남인수 등을 길러낸 곳이다.
진주성 촉석루는 진주의 상징이며 최고의 명승지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과 공방전을 벌인 격전의 현장으로 7만 민관군의 넋이 어린 호국의 성지이기도 하다. '촉석루중삼장사기실비'(矗石樓中三壯士記實碑)가 당시의 비감과 충절을 웅변한다. '촉석루중삼장사(矗石樓中三壯士) 일배소지장강수(一杯笑指長江水) 장강지수유도도(長江之水流滔滔) 파불갈혜혼불사(波不渴兮魂不死)'
'촉석루에 마주앉은 세 장사, 한 잔 술로 웃으며 강물을 가리키네, 긴 강물은 쉼없이 흘러가니, 물결이 마르지 않는 한 넋도 죽지 않으리'. 여기사 삼장사(三壯士)는 학봉 김성일과 대소헌 조종도, 송암 이로를 말한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에서는 왜군과 두 차례의 대전투가 벌어지며 승패가 엇갈렸다. 의로운 여인 논개(論介)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것도 이때의 일이다.
'..., 흐르는 강(江)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발표한 수주 변영로의 시 '논개'는 1950년대 교과서에 게재되면서 국민 애송시가 되었다. 논개의 비장한 죽음을 근대적 감성으로 길어올린 우리 시문학사에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강남달이 밝아서 임이 놀던 곳, 구름 속에 그의 얼굴 가리워졌네, 물망초 핀 언덕에 외로이 서서, 물에 뜬 이 한밤을 홀로 새울까'. 남강의 달밤을 읊은 노래 '강남달'을 지은 김서정은 진주 기생의 아들이었다. '강남달'이 삽입곡으로 들어간 영화 '낙화유수'의 시나리오도 그의 작품이었다. 내용 또한 기생과 화가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그린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진주라 천리길을 내 어이 왔던고, 촉석루에 달빛만 나무기둥을 얼싸안고, 아~ 타향살이 심사를 위로할 줄 모르누나' '진주라 천리길을 내 어이 왔던고, 남강 가에 외로이 피리 소리를 들을 적에, 아~ 모래알을 만지며 옛 노래를 불러 본다'. 암울하던 1940년대에 나온 이 노래의 제목은 '진주라 천리길'이다. 임진왜란의 비감이 어린 진주 촉석루를 찾은 식민지 나그네의 심사가 어떠했을까.
시대의 아픔을 절절하게 대변한 이 노래는 망국민의 가슴을 바닷물처럼 저며들며 진주의 대명사가 되었다. 천리길이 무색하도록 요원의 불길처럼 한 시대를 풍미하던 노래는 그러나 광복 후 금지곡이 되는 곡절을 겪었다. 작사가 조명암과 작곡가 이면상 그리고 가수 이규남이 모두 월북을 한 결과였다. 그렇게 노래방에서도 찾을 수 없는 곡으로 반세기의 세월을 묶여 있었던 것이다.
'진주라 천리길'은 1,2절 노랫말 행간의 대사도 유명했다. 무성영화 시대 변사(辯士)조의 넋두리가 실향과 유랑의 심사를 자극하며 겨레의 심금을 울렸다. '진주라 천리길을 어이 왔던고, 연자방아 돌고 돌아 세월은 흘러가고, 인생은 오락가락 청춘도 늙었더라. 늙어가는 이 청춘에 절망하는 옛 추억, 아~ 손을 잡고 헤어지던 그 사람, 그 사람은 간 곳이 없구나'.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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