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정 기자 choiguswjd@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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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말&] 그동안 우리는 말로만 ‘역지사지’를 외쳤구나

    [주말&] 그동안 우리는 말로만 ‘역지사지’를 외쳤구나

    "요즘 거리는 휠체어 다니기 잘 돼 있지 않나?" "사무직 임산부는 앉아서 일하니까 괜찮을 것 같은데." "어르신들도 키오스크나 온라인 예약 같은 것 좀 배우시면 되잖아." 역지사지(易地思之). 새해 회의에서 나온 주제다. 갈등과 반목으로 얼룩진 시대, 우리는 작년 한 해 얼마나 남을 이해했는가. 그리고 올 한 해는 어떻게 더불어 살 것인가. 〈strong〉남이 직접 돼 보니 알겠더라. 우리는 여태껏 말로만 역지사지를 외쳤다고.〈/strong〉 ◆휠체어 타고 출근, 몇 번이나 고꾸라질 뻔! 모두가 바삐 움직이는 출근길. 기자도 평소처럼 지하철 1호선을 타러 간다. 하지만 지하로 내려가는 것부터 난관이다. 에스컬레이터가 유난히 높아 보이고 출구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엘리베이터는 도대체 어디 있는 건가. 막막함에 등에서는 식은땀이 흐른다. 이날 기자는 휠체어를 타고 하루를 시작했다. 휠체어에 앉으니 눈높이가 낮아진다. 아이와 같은 높이의 시선이 되니 막연한 두려움이 밀려온다. 손은 어찌나 아픈지. 휠체어 바퀴를 계속해서 굴리다 보니 추위와 악력에 손은 시뻘게졌다. 어찌어찌 엘리베이터를 찾았지만 가는 길이 문제다. 작은 턱 하나도 넘기 힘들어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이날 기온은 5도. 용을 쓰느라 출발한 지 5분 만에 몸은 후끈 달아올랐다. 지하철이 들어온다는 안내 방송이 나오자 심장이 쿵쾅댄다. 스크린도어가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 틈으로 휠체어를 들이밀어 본다. 지하철과 승강장의 작은 틈 때문인지 휠체어가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스크린도어가 닫힙니다." 재촉하는 듯한 안내방송에 마음이 급해졌다. 몇 번을 덜컹대다 시민의 도움으로 겨우 지하철에 올랐다. 지하철에 타고나서도 흘깃대는 시선을 피할 길이 없다. 문화생활은 편히 할 수 있는걸까. 영화관으로 곧장 향했다. 하지만 지하철에 내려 영화관까지 가는 길이 꽤 멀게 느껴진다. 인도에도 곳곳이 장애물 투성이다. 인도를 반 이상 가로막고 주차한 트럭과 가로수 턱 때문에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거기다가 방향 전환도 쉽지 않아 경사진 길에서 자꾸 한쪽 방향으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음료수를 사먹고 싶어도 편의점 입구에 있는 턱 때문에 용기를 내기 쉽지 않다. 영화관까지 도착했지만 이제는 티켓 발권이 문제. 키오스크가 등장한 이후 여러 문화 시설에는 직원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휠체어를 끌고 키오스크 앞으로 가본다. 영화 시간과 제목까지는 수월하게 선택했지만 뒤로 가기를 누르려니 팔이 안 닫는다. 엉덩이를 들어 올리려다 중심을 잘 못 잡아 휠체어가 기우뚱댔다. ◆디지털 소외 노인 "포기하는 게 일상" 기자가 키오스크 높이와 씨름하고 있는 사이, 옆에는 터치와 사투를 벌이는 어르신이 있다. 임정규(64·대구 남구) 씨는 디지털 시스템에 대한 소외감을 토로했다. "젊은이들은 금방 금방 한다지만 나이 든 사람들은 모든 게 다 어렵죠. 영화야 직원 기다려서 표 끊으면 되지만, 콘서트를 보러 가고 싶어도 휴대폰 예약을 해야 돼요. 얼마 전에는 밥 먹으러 갔다가 기다리는 것도 예약한 사람을 먼저 들여보내주더라고요." 밥 한번 먹으려 해도 예약하고 웨이팅을 걸어야 하는 시대가 왔다. 디지털 예약시스템은 시간 활용을 최적화하는 데 도움을 줘 콘서트, 영화관, 놀이공원 등 여가 문화 전반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하지만 편리함이 가중될수록 그늘도 짙어진다. "매번 자식들이 도와줄 수도 없지 않습니까. 좀 배우고 싶어도, 자꾸 새로운 뭔가가 생겨납니다. 하지만 그걸 하나하나 가르쳐 주는 곳은 없죠." 미숙한 디지털기기 적응 능력은 서비스 혜택에도 차이를 낳는다. 앱에서 쿠폰을 능숙하게 다운 받아 결제하는 젊은 층과 달리, 노년층은 앱에 접속하는 것 만으로 진땀이 난다. 놀이공원, 야구장, 콘서트 등 여가생활이 죄다 디지털 예약제에 기반하다 보니 중·장년층 사이에선 "그저 포기하는 게 일상"이라는 자조마저 나온다. ◆만삭 임산부 "누워도 편치 않아" 같은 시각. 사무실에서는 10kg 무게와 사투가 벌어졌다. 결혼을 꿈꾸는 20대 남성 기자와 신혼의 단꿈에 빠진 30대 여성 기자가 각각 임산부 체험 장비를 입어봤다. 이들의 입에서는 '아이고' 곡소리가 절로 나온다. 남성 기자는 엄마가 생각났고, 여성 기자는 미래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표정이 굳어졌다. 의자에 앉아 있기도 쉽지 않다. 10kg가 육박하는 무게에 짓눌려 다리가 저려온다. 여기에 어깨 결림은 덤이다. 장비를 차고 있는 내내 배 앞으로 무게가 쏠리다 보니, 이를 지탱하는 어깨가 부담을 받았던 것.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여자 휴게실로 도망쳤다. 휴게실에 마련된 소파에 눕기라도 해야 몸이 풀릴 듯한 기분 때문이다. 하지만 이게 웬걸. 누우니 더 힘들다. 똑바로 누웠더니 10kg의 무게가 배를 누른다. 눌린 배의 장기가 호소하는 고통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임산부들이 옆으로 누워 잠을 자는구나 싶었다. 집으로 이동해 지내보기로 하는데, 가는 길이 지옥이다. 몸이 무겁다 보니 장시간 걷기가 너무 힘들다. 집에 도착하니 밀린 집안일이 쌓여있다. 우선 설거지를 해보는데. 한 손으로 배를 잡고 한 손으로 식기를 헹구려니 팔이 저려온다. 서있는 것은 더 고역이다. 다이어터 시절 모래주머니를 차고 운동장을 뛰었던 기억이 날 정도다. 극기훈련이 정말 따로 없다. 대충 설거지를 마무리하고 기자의 최애 청소도구 '돌돌이'를 집어 든다. 가벼운 청소쯤은 어렵지 않겠지. 하지만 앉아서 해도 불편하고 쪼그려서 해도 불편하다. 그러다 기우뚱. 몸이 넘어갈 뻔 했다! 체험을 끝내고 휠체어와 임산부복을 반납하던 날. 몸은 홀가분해 졌는데 마음은 왠지 무거워진다. 물론 사회적 약자로 대표되는 몇 명만 돼 봤을 뿐. 모두를 역지사지 했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고작 하루 체험으로 이들을 대변한다 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기자들이 체험을 해본 이유는 단 하나다. 올해는 역지사지의 마음이 확대되길 바라는 마음. 서로를 헐뜯고 비난하기 보다는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는 한 해가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 이 마음이 부디 전해졌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2024-01-12 06: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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