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훈 칼럼] '역사와 양심의 법정에서는 무죄'라는 자기 최면(催眠)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 쿠바의 독재자 피델 카스트로의 말이다. 1953년 풀헨시오 바티스타 독재 정권을 전복(顚覆)하려 몬테카를로 병영을 습격했다 체포돼 15년 형을 선고받은 법정 최후 진술에서 그렇게 말했다. 이후 카스트로가 역사를 만듦으로서 그 말은 실현됐다. 그 역사란 폭력 혁명과 독재정권 수립이다. 그런 점에서 카스트로를 무죄로 만든 것은 역사가 아니라 카스트로 자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카스트로의 이 말은 비장미(悲壯美)가 넘친다. 지금 불의(不義)한 현실의 법정에서는 유죄이지만 정의가 살아 숨 쉴 훗날에는 반드시 무죄가 될 것이며 그날이 올 때까지 투쟁을 멈추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묻어 난다. 이렇게 '폼'이 나서인지 '현실의 법정'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국내 좌파들은 이 말을 다양하게 변형해 즐겨 차용한다. 전형적인 사례가 국무총리를 지낸 한명숙이다. 그는 2007년 불법 정치자금 9억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돼 2015년 대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의 확정 판결을 받고 만기 복역했다. 그는 대법원 판결 후 "역사와 양심의 법정에서는 나는 무죄"라고 했다. 당시 새정치연합 문재인 대표는 "한 총리가 역사와 양심의 법정에서 무죄임을 확신한다"며 이를 거들었다. 한명숙은 수감 직전에는 오른손에 성경, 왼손에 순결을 상징하는 백합을 들고 구치소 앞에 나타나 역시 "결백하다"고 했다. 2021년에도 자서전 '한명숙의 진실: 나는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다'에서 "난 결백하다. 그것은 진실이다.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다"고 했다. '희생자 코스프레' '자서전 감성팔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경남지사를 지낸 김경수가 대선 여론 조작 혐의로 2021년 대법원에서 징역 2년 확정 판결을 받았을 때도 같은 소리가 쏟아졌다. 그가 "법원을 통한 진실 찾기는 더 이상 진행할 방법이 없어졌다. 진실은 아무리 멀리 던져도 반드시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믿음을 끝까지 놓지 않겠다"며 대법원 판결을 비난했다. 이에 당시 친문 홍영표 의원은 "김경수 지사의 결백을 확신한다"며 "대법원이 눈감은 진실이 양심과 역사의 법정에서는 반드시 밝혀질 것"이라고 했다. 2010년 서울시교육감 선거 과정에서 자신이 속한 진보 진영 경쟁 후보에게 2억원을 건네 매수한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1년 형을 확정받고 10개월가량 복역한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도 한통속이다. 재판에서 "진실이 오해보다 강하고 선의가 범의(犯意)보다 강하다는 것이 드러나리라 확신한다"고 했다. 상대 후보에게 돈을 준 것이 '매수'가 아니라 '선의(善意)의 지원'이라는 것이다. 지난 9월 재출마를 선언하면서는 "대법원 판결이 다 옳은 건 아니다. 제 양심의 법정에서 당당하고 떳떳하다"고 했다. 이런 '역사와 양심의 법정' 타령은 억누를 수 없는 궁금증을 낳는다. 첫째 현실의 법정과 역사와 양심의 법정은 무엇이 다르고 그 차이는 무엇인가이다. 현실의 법정에서 유죄라도 양심과 역사의 법정에서는 무조건 무죄란 것인가? 둘째 정말로 결백하다면 언제 열릴지 기약(期約) 없는, 아니 열릴지조차 알 수 없는 '역사와 양심의 법정'을 무작정 기다릴 게 아니라 당장 재심을 청구해야 한다. 그게 해원(解冤)의 가장 빠른 길인데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 유예 2년을 선고받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양심의 법정 타령' 역사에 한 페이지를 기록했다. 그는 선고 직후 "현실의 법정은 아직 두 번 더 남아 있고 민심과 역사의 법정은 영원하다"고 했다. 2심과 대법원 상고심에서 1심 선고가 뒤집어지기 어려울 것이란 불안감이 읽힌다. 이 대표는 경기지사 때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돼 2심에서 당선무효형을 받았으나 대법원에서 기적처럼 무죄가 됐다. 'TV 토론에서 돌발적 질문에 대한 답변은 거짓으로만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권순일 당시 대법관의 희한한 논리 덕분이었다. 그 이면에는 김만배를 통한 '재판 거래' 의혹이 있다. '조희대 대법원'에서도 이런 거래가 가능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1심 선고가 2, 3심에서 뒤집어질 가능성도 낮을 것이다. 이 대표도 명색이 변호사 출신인 만큼 이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민심과 역사의 법정은 영원하다'는 말이 이런 깨달음의 표현이라면 기자의 상상일까.
2024-11-17 17:43:13
[정경훈 칼럼] ‘한국전쟁은 대리전’? 지적 게으름인가 오만인가
"그는 광범위한 주제에 관해 장황하게 이야기했다. 그 중 일부 주제에는 완벽하게 전문가적인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다른 주제에 대해서는 그가 우연히 들춰보게 된 책 몇 페이지에서 끌어낸 견해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럼에도 어느 경우에나 권위자의 풍모를 풍기기는 마찬가지였다"('지식인의 역할은 무엇인가', 토머스 소웰) 존 메이나드 케인스의 동료 경제학자로 케인스의 전기를 쓴 로이 해로드(Roy Harrod)의 케인스 평가이다. 케인스가 자기가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도 아는 척 '폼'을 잡았다는 것이다. 이는 지식인 일반에 해당하는 문제다. 제 분야에서 거둔 우수한 능력과 성과를 다른 분야에서도 통달한 듯 행동해도 되는 면허증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도 그 대열(隊列)에서 벗어나지 않아 보인다. 노벨문학상, 프랑크 콩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인 영국의 맨부커 상을 받은 다음 해인 2017년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미국이 전쟁을 얘기할 때 한국은 몸서리친다')을 보면 그렇다. 맨부커상을 받아 문학으로는 인정을 받았지만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무지하거나 유아(幼兒)적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한강은 '한국전쟁은 인접한 강대국들에 의한 대리전이었다고 했다. 과거 좌파들이 퍼뜨린 악성 선전의 반복이다. 이런 요설(妖說)은 소련 붕괴(崩壞)와 함께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소련 비밀 문서가 대거 공개되면서 한국전쟁은 '김일성이 스탈린을 설득해 일으킨 한반도 적화 남침 전쟁'으로 확정된 것이다. 이를 몰랐나? 그렇다면 절망적인 지적 게으름이요 무지다. 알고도 그랬다면, 사실(史實) 자체는 물론 그것을 밝혀낸 수많은 사람들의 지적 성과를 몽땅 부정하는, 더 질 나쁜 오만이다. 무엇보다 이는 김일성의 전쟁 책임을 희석(稀釋)시킨다는 점에서 도덕적 파탄이다. 기고문이 논란을 빚자 한강은 "한국전쟁의 성격에 대한 거시적, 복합적인 인식은 북한이라는 구체적 전쟁 발발자에 대한 지극히 상식적인 비판적 인식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를 궤변(詭辯)이다. '거시적이고 복합적인 인식'은 도대체 어떤 인식인가. 한국전쟁이 '대리전'이면서 '김일성의 남침 전쟁'이란 것인가? '구체적 전쟁 발발자에 대한 지극히 상식적인 비판적 인식'과 한국전쟁에 대한 모호한 인식이 어떤 점에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인가? 조지 오웰은 "명료한 언어의 대적(大敵)은 불신실(不信實)이다. 진짜 목적과 겉으로 내세우는 목적이 다를 경우 사람은 거의 본능적으로 긴 단어와 진부한 관용구에 의존하게 된다. 마치 오징어가 먹물을 뿜어내듯이"라고 했는데 딱 그 꼴이다. 평화 근본주의(根本主義)도 문제이긴 마찬가지다. 그는"우리는 평화가 아닌 다른 어떠한 방법에 의한 해결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이해한다. 도대체 승리라는 것은 공허한 구호일 뿐 아니라 애매하고 불가능한 것이다"라고 했다. 철부지 평화주의자들의 '전쟁이냐 평화냐'라는 허위적 구호(口號)의 재연이다. '전쟁이냐 평화냐?'라는 물음의 답은 당연히 평화다.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이미 갈파(喝破)한대로 평화를 얻는 방법은 간단하다. 항복이다. 항복의 대가로 얻은 평화가 과연 진정한 평화일까? 그렇다면 대한제국이 전쟁 없이 나라를 일본에 내준 것도 평화이다. 한강은 이 땅의 사람들이 이런 평화를 원한다고 생각하나? 기고문을 보면 그렇게 보이는데 "이긴 전쟁보다 더러운 평화가 낫다"는 제1야당 대표와 한 줌의 그 추종자 무리 말고는 그런 평화를 원하는 사람은 단언컨데 없을 것이다. 의문은 그치지 않는다. 승리라는 것이 과연 "공허한 구호이고 애매하고 불가능한 것"일까? 2차 대전 중 영국 총리 처칠의 트레이드 마크, 'victory'(승리)를 뜻하는 'V' 사인이 '공허한 구호'였고 '애매하고 불가능한 것'이었나? 공산권 붕괴를 일궈낸 레이건의 빛나는 승리도 그런 것이었나? 한강은 "한국은 몸서리 친다" 운운하면서 평화를 갈구했다. 그런데 지금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는 행위자가 누구인가? 남한인가? 미국인가? 북한 김정은인가? 그의 글은 미국을 지목하고 있는 듯 한데 노벨문학상이 여기에 정당성을 부여해줄까? 지금도 그 때와 같은 생각인지, 그의 작품에 그런 생각이 녹아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2024-10-20 17:57:25
[정경훈 칼럼] ‘통일 말자’ 임종석, 자각인가 추종인가
20세기 전반기 유럽의 공산당은 소련 공산당의 지령을 충실히 수행하는 자율성 없는 말초(末梢) 조직이었다. 이런 소련의 '지도'(指導)를 담당하는 기구가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이다. 중앙집권적 관료 체계와 절대적 상명하복의 '철의 기율(紀律)'을 갖춘 볼셰비키의 복사판이었는데 1928년 제6차 대회에서 자본주의 체제가 '경제적 위기와 혁명적 격변'의 시기에 접어들었다는 정세 판단을 내렸다. 1929년 미국 주식시장 붕괴와 뒤이은 세계 대공황은 이런 판단에 확신을 부여했다. 이에 들떠 코민테른은 극좌(極左) 노선을 채택하고 각국 공산당에 비타협적 투쟁을 독려했다. 투쟁 대상에는 보수 진영은 물론 폭력혁명에서 온건한 합법 투쟁으로 방향을 바꾼 사회(민주)주의자도 빠지지 않았다. 코민테른은 이들을 '사회 파시스트'(social fascist)라고 비난하며 그들과 모든 관계를 단절하라고 각국 공산당에 지시했다. 당시 유럽 공산당 가운데 가장 전투적이었던 독일 공산당은 이를 충실히 이행, 독일 사회민주당(SPD)을 '서구의 하인'이라고 비난하고, 나치가 프로이센의 SPD 주(州)정부에 대한 불신임 국민투표를 발의하자 나치를 편들었다. 그러나 레닌이 '좌익 소아병(小兒病)'이라고 비판했던 이런 극좌 노선은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집권하고 공산당이 박살 나면서 치명적인 오류로 판명 났다. 이에 따라 코민테른은 1935년 제7차 대회에서 '반파시즘 통일전선'-파시즘 척결을 목표로 하는 모든 정치 세력과 연대(連帶)해 공산당의 혁명 역량을 보전하고 기회를 보아 연대 세력을 제거하고 공산당이 단독으로 권력을 잡는다-이란 수정 전술을 채택했다. 연대 대상에는 우파도 포함됐는데 이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대의'의 배신이었지만 서구 공산당은 이에 전적으로 호응(呼應)했다. '극좌 노선'에서 '우익 기회주의'로 급선회한 것이다. 히틀러에 의해 SPD가 와해되면서 가장 중요한 유럽 공산당이 된 프랑스 공산당은 이를 잘 보여 줬다.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피에르 라발의 보수 정부에 협조해 극렬히 반대했던 군 의무 복무기간 연장과 군 예산 증강을 지원했다. 이는 애국심의 발로가 아니었다. 스탈린은 불·독(佛·獨) 개전(開戰) 시 프랑스가 독일을 붙잡아 놓아 독일이 총부리를 소련으로 돌리는 것을 막으려는 계산에서 그런 지시를 했던 것이다. 프랑스 공산당은 철저히 소련의 이익에 봉사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임종석 씨가 딱 그 꼴이다. 그는 '9·19 공동선언' 6주년을 맞아 "통일을 하지 말자"고 했다.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를 대한민국 영토로 규정한 헌법 제3조도 "지우든지 개정하자"고 했으며, "통일 논의를 완전히 봉인하자"고도 했다. 임 씨는 민족해방(NL)계 운동권 출신으로 '자주적 평화통일'을 목표로 내건 전대협 3기 의장을 지냈으며, 1989년 임수경 씨 방북을 주도했다. 2019년 비서실장을 그만둔 뒤 "다시 통일운동에 매진하고 싶다"고 할 만큼 통일에 '집착'해왔다.(그 통일이 우리가 지향하는 '자유민주주의 통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통일을 말자'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변심'의 이유가 무엇인지-지령(指令)을 받았는지 자각(自覺)인지-모르겠으나 북한 김정은의 '통일 포기' 노선의 추종(追從)임은 분명하다. 김정은은 지난해 말부터 남북을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하고, 통일 관련 조직을 없앤 것은 물론 북한 국가의 '통일' 표현도 지웠다. 할아버지 김일성에 이어 아버지 김정일이 내걸었던 '적화 통일'이 점점 멀어지는 현실에 대응하려는 생존 전략이자 김일성·김정일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 입지를 굳히려는 방향 전환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었다. 그렇다면 임 씨의 통일 매진은 매진대로, 통일 포기는 포기대로 우리 민족 전체가 아닌 철저히 북한의 이익을 위한 추종인 셈이다. 남한 친북 단체들의 '통일 지우기' 뇌동(雷同)도 다를 바 없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인민의 뇌수(腦髓)'가 시키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괴뢰(傀儡)라는 평가가 과하지 않을 것이다. 임 씨를 '의장'으로 '결사 옹위'했던 전대협 사람들 중 '통일'을 버리지 않은 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임 씨의 '통일 포기'에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2024-09-22 17:40:09
[기고] 디지털(Digital) 시대, 우리는 무엇이 시급한가?
제4차 산업혁명은 상상력을 디지털(Digital)로 해결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산업이다. 전 세계인들은 디지털 문화에 앞장서려고 불꽃 튀는 경쟁을 하고 있다. 삼성이 2024 파리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임원 1만7천여 명에게 200만원 상당의 스마트폰을 선물한 것도 디지털 잔치라고 할 수 있다. 세계 10대 기업 대부분이 디지털 기업이다. 이 기업의 창업자 대부분은 20대에 창업했다. 자기만의 상상력(호기심)을 디지털로 해결하여 세계에 우뚝 선 기업이 된 것이다. 기업 순위 1위인 MS(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 빌 게이츠는 21세, 2위인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22세, 3위 앤비디아의 젠슨 황은 31세 등등. 이들은 평소 미래를 상상하고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청년 시절 정력을 다 쏟은 사람들이다. 우리 중·고생들의 교육은 어떤가? 3D프린터 등 단편적 디지털 교육이 전부이다. 우리 아들 딸들의 손재주는 세계 200여 개 국가 중 가장 뛰어난 수준이라고 인정받고 있다. 교실에서는 전자 칠판으로 수업한다. 필자는 교육 콘텐츠를 담은 USB를 전자 칠판에 세팅해서 교육한다. 전자 칠판마다 특성이 있어 처음 대하는 전자 칠판은 학생들에게 세팅해 달라고 요청하면 어느 학생이든지 전문가처럼 잘해 준다. 우리 자녀들의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다루는 솜씨는 놀랄 정도이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제4차 산업혁명이 무엇이냐'고 질문하면 대답을 못 한다. "반도체요"라고 대답하는 학생이 가끔 있다. 필자가 4차 산업혁명의 대표적인 상품이라고 할 수 있는 스마트폰은 애플의 CEO 스티브 잡스가 "전화기와 컴퓨터를 합쳐서 만든 것이다" "이렇게 커다란 전화기와 컴퓨터를 어떻게 사람의 한 손에 적합하도록 작게 만들까" "그것은 반도체 때문이다"라고 설명해 주고 "반도체는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이며 우리가 만들어 세계에 공급해 준다"고 하면 반도체에 대한 자부심과 궁금증이 용솟음치는 표정들이다. 스티브 잡스가 스마트폰을 만든 원동력은 상상력과 높은 사고력이다. 상상력을 혁신(Innovation)해서 가치를 창출해 낸 결과물이 스마트폰인 것이다. 기억의 반대는 무엇(?)이냐고 질문하면 우리는 대부분 '망각'이라고 대답한다. 우리 중·고생에게 미래를 생각하는 '상상'이라고 답변하는 교육을 해야 한다. 지금 중·고생의 미래는 오직 수능이다. 학부모도 마찬가지다. 학교에서 미래와 관련한 교육을 하면 학부모들은 내 아들은 수능이 중요한데 왜 "수능과 관련 없는 과목을 수업하느냐"라고 항의가 빗발친다고 한다. 수능이 중고생 교육의 중심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수능은 누군가 만들어 놓은 지식을 외워야 하는 '암기식 교육'이다. 과거 지식을 외우느라 밤을 새운다. 학생들이 미래를 생각하는 상상력을 키우지 못하도록 흙으로 덮어 꼭꼭 밟아 버리는 형국인 것이다. 중·고생 때부터 높은 상상력과 궁금증을 디지털로 혁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교육을 해야 한다. 2024 파리 올림픽에서 메달을 거머쥔 주인공은 대부분 20대 전후의 '삐약이'들이다. 20대가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수능이 되도록 우리 교육의 대변화가 시급하다. 앞으로 다가올 생명공학 산업혁명을 개척할 인재의 양성도 지금 우리 중고생의 교육에 달려 있다.
2024-08-26 14:50:44
[정경훈 칼럼] ‘친일 세력’이란 허깨비 보고 떼로 짖고 따라 짖는 군상들
'읍견군폐'(邑犬群吠·'동네 개가 떼로 짓는다'는 뜻). 중국 전국시대 초(楚)나라 시인·정치가 굴원(屈原)의 글에 나오는 표현으로, 소인배가 떼로 남을 비방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여기에는 '묻지마 따라하기'라는 의미도 있는데 후대 문인들이 즐겨 차용했다. "개 한 마리가 뭔가를 보고 짓자 백 마리 개가 그 소리만 듣고 짓는다. 한 사람이 거짓을 퍼뜨리면 온 사람이 진실이라고 퍼나른다."〈일견폐형(一犬吠形), 백견폐성(百犬吠聲), 일인전허(一人傳虛), 만인전실(萬人傳實)〉 후한(後漢)의 은둔 사상가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에 나오는 말이다. 동시대의 도학자들을 향해 "겉으로는 도를 말하나 속으로는 부귀를 바라며, 유학자의 고상한 옷을 걸쳤으나 행동은 개·돼지나 다를 바 없다"고 비난하고, 논어(論語)·맹자(孟子) 등의 유교 경전들도 진정한 도학이 아니라고 비판하다 탄핵돼 옥중에서 자진(自盡)한 명대(明代)의 반항적 사상가 이탁오(李卓吾)의 '수폐'(隨吠·따라 짖음) 비판은 더 가열(苛烈)차다. "나는 오십세 전에는 한 마리 개였다. 앞에 있는 개가 뭔 가를 보고 짖으면 따라 짖었다. 누가 그 까닭을 물으면 그저 벙어리처럼 실실 웃기만 했다"(是余五十以前眞一犬也, 因前犬吠形, 亦隨而吠之, 若問以吠聲之故, 正好啞然自笑也已) 이탁오의 저서 '속분서'(續焚書)의 한 대목으로, 젊은 시절 공자(孔子)와 맹자(孟子)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해 온 자신, 그리고 자신과 같은 무리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이런 사실을 소개하는 것은 광복 79주년을 맞아 좌파와 좌파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쪽으로 붙은 것 같은 군상(群像)들이 뱉어 내는 '친일파' '친일사관' 타령 때문이다. 이들은 신임 독립기념관장을 '뉴라이트 친일파'라고 딱지를 붙여 사퇴를 요구했고, 수용하지 않은 대통령을 일제(日帝)의 밀정(密偵)으로 비유하거나 더 직설적으로 "조선총독부 10대 총독" "왕초 밀정" "정신적 내선일체(內鮮一體) 매국정권"이라고 했다. 이런 친일 몰이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 때 정의기억연대 기부금 사용 내역이 불투명하다는 비판에 윤미향 당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친일 세력의 부당한 공격"이라고 했다. 그러자 이를 앵무새처럼 되뇌는 소리가 진동했다. "완전하게 친일 청산을 하지 못한 나라의 슬픈 자화상"(송영길), "청산되지 않은 친일 세력이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김두관), "친일·반인권·반평화 세력의 부당한 공세"(더불어민주당 의원과 21대 국회의원 당선인 15명) 등등. 그 단순 논리가 참으로 용감했다. 용감하면 무식하다고 했나? 친일파에 대한 정확한 개념 규정도 없이 '윤미향을 비판하면 친일 세력'이라니. 윤미향의 자기방어 논리도 기가 막혔지만 윤미향의 주장을 그대로 주워섬긴 군상들의 행태는 더 가관이었다. 떼로 짖고(群吠), 따라 짖는(隨吠) 개꼴 아닌가. 이들의 친일파 타령은 실체가 없다. 우리가 문화, 경제, 산업에서 일본을 앞서거나 대등한 위치에 올라선 지금 그 어디에 일제하의 '친일파' 같은 배역자가 있다는 말인가. 있다면 구체적으로 적시해 보라. 못 할 것이다.(그들은 이런 말하는 기자를 친일파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친일 몰이'는 허깨비에 홀린 몽유병(夢遊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 쓰임새는 '우리 편의 방어와 상대편에 대한 공격'이다. 문 정권 때 집단 발작처럼 좌파 진영을 휩쓴 '죽창가' '노노 재팬'은 이를 잘 보여줬다. 좌우 정권을 넘나들며 국회의원 네 번에 국정원장까지 지내며 '양지'만 좇아 왔고, 조부가 독립유공자라는 것 말고 내세울 게 뭐가 있느냐는 소리를 듣는 광복회장의 '친일사관' 타령도 영락없는 '수폐'(隨吠)이다. 그는 광복회가 자체 진행한 광복절 기념식에서 "망령처럼 되살아나는 친일사관을 뿌리 뽑아야 한다"고 했다. 친일파가 없는데 어떻게 친일사관이 되살아나나? 광복회장이 말한 '식민사관'은 '뉴라이트'의 식민지 근대화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난센스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일제하에서도 부분적인 근대화는 이뤄졌음을 인정할 뿐이지 일본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합법화하지 않는다. 이게 사실이 아니면 증거로 논박(論駁)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식민사관' 운운하는 것은 허깨비에 홀린 몽유병이기는 마찬가지다.
2024-08-18 19:19:31
[정경훈 칼럼] 좌파들의 애처로운 ‘박정희 지우기’ 선동
기자의 집에는 TV가 없다. 몇 년 전 이사하면서 없애 버렸다. '바보상자'라는 지론 때문이다. TV를 없애 '바보'가 되지 않았는지 자신할 수 없지만 불편한 게 하나 있다. 요즘 어떤 드라마나 영화가 인기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자는 드라나마 영화에 대한 정보는 신문 지면에서 얻는다. 7월 17일 자 조선일보 김윤덕 칼럼 〈경제개발 원조가 민주당? '삼식이 삼촌의 거짓말'〉도 그중 하나다. 지난달 19일 종영됐다는 송강호 주연의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삼식이 삼촌'을 비평(批評)한 칼럼인데 그중 한 대목을 옮겨 본다. "문제는 세끼 밥 먹게 해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박정희가 아니라 민주당이 설계한 것으로 묘사한다는 점이다. '산업단지를 세우고 서울과 부산, 서울과 인천을 잇는 고속도로를 만들어 중국 7억 인구에게 신발을 수출하면서 14억 켤레를 팔 수 있다'고 외치는 주인공이 민주당 정치인이다." '삼식이 삼촌'의 주장은 절대 빈곤 탈출 발판 마련의 공헌자가 박정희가 아니라 민주당 장면 정권이라는 것이다. 좌파들의 전형적 선동이다. 드라마까지 이런 선동을 퍼 나르는 현실이 참으로 경악스럽다. 그런 선동은 두 개의 주장으로 구성돼 있다. 첫째가 '박정희의 경제개발계획은 장면 정부가 만들어 놓은 것을 베낀 것이다'이다. 장면 정부가 경제개발계획을 만든 것은 맞다. 이승만 정부의 3개년 계획안을 참조해 1961년 5월 10일 마무리됐다는 경제개발5개년계획안(1961~1965)이다. 그러나 이 안은 인쇄 과정에서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면서 발표되지 못했다고 한다. 이 안이 박정희의 지침으로 성안(成案)돼 1962년 1월 경제기획원이 발표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골간(骨幹)이라는 게 박정희 폄훼론자들의 주장이다. 이 주장이 맞으려면 장면 정부안과 군부안을 비교 분석해야 한다. 그러나 운석장면기념사업회에 따르면 장면 정부 경제개발계획 원본(原本)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민주당 정권의 경제정책과 장면 5-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수립, 결론') 기자도 두 계획을 직접 비교 분석한 자료를 찾아봤는데 불민(不敏)하고 천학(淺學)한 때문인지 찾지 못했다. 기자가 찾은 자료는 신문 기사나 미국 국무부의 평가 자료 등 '2차 사료(史料)'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박정희가 장면을 베꼈다'고 단정하지는 않지만 그런 주장을 비중 있게 소개하거나 5·16 군부의 안이 장면 정부안과 동일하다고 기술한다. 2차 사료는 아무리 노력해도 무의식적 가공(加工)이나 배제(排除) 등 왜곡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가 장면을 베꼈다'는 주장은 신뢰하기 어렵다. 더구나 장면 정부의 계획을 검토했지만 참고할 내용이 없어 새 계획을 짰다는 군부 측의 주장도 있다. '박정희 지우기' 두 번째 논리는 '5·16 쿠데타가 없었다면 장면 정부가 경제개발을 했을 것이다'이다. 안타까운 것은 좌파가 아닌 온건한 '리버럴'도 이에 동조한다는 사실이다. "박정희의 역할이 너무 과장되어 있다. 현대사 연구자로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가 '박정희가 없었어도 경제성장이 성공적으로 되었을까'라는 질문이다.(중략) 만약 다른 사람이 정권을 잡았거나 민주당 정부가 계속되었다고 하더라도 한국의 경제개발계획의 내용은 군사 정부나 박정희 정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원형과 변용-한국 경제개발계획의 기원', 박태균) 이런 주장이 입증되려면 5·16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았거나 진압돼 장면 정부가 계속 집권하거나 다른 정권이 집권해야 한다. 그러나 역사는 불가역(不可逆)이다. '박정희가 아니라도 경제개발은 가능했다'는 소리는 관념의 유희(遊戱), 상상의 비약(飛躍), 무용(無用)한 '역사의 가정'이다. 무엇보다 이런 주장의 오류는 계획을 성공과 자동으로 연결한다는 것이다. 소가 웃을 일이다. 계획만 하면 성공한다면 경제개발에 실패한 나라는 없어야 한다. 그렇지 않음은 우리처럼 경제개발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한 중남미 국가들이 잘 보여 주고 있지 않나? 사회주의 천국을 계획한 소련의 붕괴는 또 어떤가?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은 갖고 있지, 처맞기 전까지는." 핵주먹 마이크 타이슨의 명언이다.
2024-07-21 17:47:22
[정경훈 칼럼] 법의 탈을 쓴 무법적 폭거 ‘이재명 방탄법’
유권자 1인 1표제 보통 선거를 기반으로 한 의회 체제하에서도 독재는 가능하다. 그것은 외양은 의회 민주주의이지만 실상은 '합법적 독재'다. 이는 기존 법률을 개폐하거나 새로운 법률을 만드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는 국민의 대표들의 표결이라는 절차를 거치기 때문에 '합법적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법의 지배'(Rule of law)의 허울을 쓴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법이 지배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 전형적인 사례가 헝가리 최장수 총리인 빅토르 오르반이다. 그는 2010년 총선에서 자신이 이끄는 피데스당이 52.7% 득표로 전체 의석의 3분의 2를 차지하자 장기 집권을 위한 법률 '정비'에 착수했다. 그 첫 수순은 사법부 장악이었다. 헌법을 수정해 헌법재판소 판사를 11명에서 15명으로 늘리고 늘어난 4자리를 자신의 측근들로 채웠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법률을 바꿔 대법원장 자격 조건으로 '헝가리 내 사법부 경력 5년 이상'을 신설했다. 이는 독자적 행보로 눈엣가시였던 안드라스 바카 대법원장을 축출하기 위한 공작이었다. 바카는 유럽 인권재판소에서 17년간 근무한 권위 있는 판사였지만 헝가리 내 판사 경력은 5년이 안 됐던 것이다. 오르반의 의도대로 바카는 물러나야 했다. 이어 오르반은 판사 정년을 70세에서 62세로 낮추고 62세 이상 판사는 즉각 물러나도록 법을 바꿨다. 이에 따라 모두 274명의 판사가 물러났다. 이 법은 나중에 유럽연합의 압박으로 폐기됐지만 물러난 판사는 복직하지 못했다.('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렛) 그 자리를 어떤 판사가 메웠을지는 짐작이 간다. '이재명의 더불어민주당'의 행태도 이에 못지않다. 오르반의 권력 강화를 위한 피데스당의 도구가 법이었듯이 7개 사건 11개 혐의로 4개의 재판을 동시에 받고 있는 이재명 대표의 사법적 방어를 위한 민주당의 도구도 법이다. 수사 검사를 무고죄로 처벌한다는 법, '특정인'을 '표적 수사'하지 말라는 법, 쌍방울 대북 송금 사건을 수사한 검사를 수사한다는 특검법, 수사와 판결에서 법을 왜곡한 판검사를 고발 처벌한다는 법 등이 그런 것들이다. 이들 법률 조문에 '이재명'이라는 글자는 어디에도 없지만 '이재명 방탄법'임은 누가 봐도 안다. 이재명 1인을 위한 법이다 보니 코미디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도 버젓이 법이란 이름을 가진다. '표적 수사 금지법'이 그런 예다. 이는 수사의 본질에 대한 의도적 외면이다. 수사는 본질적으로 '특정인(들)'에 대한 '표적 수사'다. ('표적 수사'라는 표현이 거부감이 있다면 '집중 수사') 범죄가 의심되는 인물을 특정해 첩보와 정보를 수집·검증해 사실이거나 그럴 가능성이 확실한 것으로 판단되면 혐의로 전환하는 것이 수사다. 특정하지 않으면 수사 자체가 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을 수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표적 수사 금지법'은 이재명과 그 공범이라는 '특정인'을 수사하지 말라는 소리다. 이런 법들은 '무엇이 법인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법철학은 법률의 속성으로 두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일반성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예외 없이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사회적 행동 규칙이 법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추상성이다. 모든 사람들의 특수한 이해관계에서 중립적이어야 하는, 바꿔 말하면 (특정인이나 특정 집단을 위한) 목적이나 동기를 내포하지 않은, 탈목적적인 사회적 행동 규칙이 법이라는 것이다. 민주당의 '이재명 방탄법'은 이들 원칙을 모두 배척한다. 범죄 혐의자에 대한 수사와 재판의 방해라는 목적과 동기(추상성의 파괴), 이를 통해 모든 범죄 혐의자에게 적용돼야 하는 사법적 판단에서 이재명을 제외(일반성의 파괴)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재명 방탄법'은 법이라고 할 수 없다. 국회가 만든다고 무조건 법이 될 수 없다. 1974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자유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저서 '자유의 헌법'(1960)에서 이를 예리하게 갈파(喝破)했다. "입법부가 정한 법이면 무엇이든, 이런 법 아래에서 정부가 내리는 명령은 무엇이든, 이를 법이라 부르는 것, 이런 것만큼 웃기는 코미디는 없다. 이는 무법적으로 공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하이에크, 자유의 길', 민경국) 민주당은 듣고 있나?
2024-06-23 17:56:25
[정경훈 칼럼] ‘총선 민심’이라는 의회 독재 가짜 면허증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서문의 첫 문장이다. 이를 22대 총선 이후 한국 정치 상황에 대입하면 이렇게 패러디할 수 있겠다. '하나의 유령이 여의도 하늘을 배회하고 있다. 총선 민심이라는 유령이'. 더불어민주당 등 범야권은 총선 압승의 여세를 몰아 윤석열 대통령과 여당을 압박하는 자신들의 언행의 정당성을 '총선 민심'에서 끌어낸다. 국회 상임위원장 독식도, 해병대 채 상병 특검·김건희 특검 추진도, 양곡법 개정안·민주유공자법 국회 통과도 '총선 민심의 명령'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여당이 이를 거부하면 '국민과 역사에 대한 거역'이라고 거품을 문다. 이런 정신 구조에서는 현대 민주주의의 대원칙인 '삼권분립'은 개나 물어갈 말라비틀어진 뼈다귀에 지나지 않는다. 윤 대통령이 채 상병 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하자 "위헌적"이며 "탄핵 사유가 될 수 있다"고 한 것은 단적인 예다. 대통령 거부권(법률안 재의 요구권)은 헌법(제53조 2항)에 규정된 대통령의 권한이다. 이게 어떻게 '위헌적'인지 모르겠다. 대통령 거부권은 1987년 개헌 때 '대통령 국회 해산권'의 삭제에 따른 행정부의 입법부 견제 기능 약화를 보완하는 최소한의 장치다. 이마저 없으면 현행 헌법하에서는 대통령과 행정부는 입법부, 구체적으로는 다수당의 집행부에 지나지 않는다. 야당이 추구하는 것은 이런 입법부 시녀로서의 행정부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의회 독재'이다. 그런데 이는 '상식'과 배치된다. '국민'의 대표가 모인 의회가 어떻게 독재를 할 수 있다는 것인가? 당연한 것 같지만 근거 없는 맹신일 뿐이다. 21대 국회에서 민주당이 보여준 입법 폭주는 이를 잘 입증한다. 22대 총선에서도 175석을 얻었으니 다음 국회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의회 독재'는 '국민 다수의 집단지성(集團知性·collective intelligence)은 정의롭다'는 독단의 소산이다. 이는 참으로 위험하다. '정의로워서 다수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 다수가 결정했기 때문에 정의롭다'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알렉시스 토크빌이 대의제 민주주의에 잠복해 있다고 경고한 '다수의 폭정'(tyranny of the majority)이 바로 이것이다. 이런 논리 구조에서는 다수의 결정은 그 어떤 것도 정의롭고 무오류(無誤謬)이다. 민주당의 '총선 민심' 타령이 바로 이런 것이다. 이런 생각의 연원은 자유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에 따르면 프랑스 계몽주의이다. 계몽주의자들의 초미의 관심은 국가 권력의 제한이 아니라 '권력이 누구에게서 나오느냐'였다. 그들은 한 사람의 왕이나 소수의 귀족에게 집중된 정치권력을 국민의 집합적 의지로 대체하면 인간의 '자유'는 자동적으로 확보되며, 국민의 집합적 의지는 의회의 다수의 의지를 통해 수렴된다고 봤다. 그 논리적 귀결은 무제한적 의회 권력이다. 국가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고 의회는 국민의 의지를 대표하는 곳이니 의회의 권력을 제한할 필요도 없고 제한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민주주의하에서는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정치권력에서 자유로운 사법부 독립이라는 당위도 실상은 허구이다. 법관은 원칙적으로 독립적이다. 그러나 그들의 판결은 의회가 제정하고 의회가 필요한 경우 언제든 변경할 수 있는 법을 기초로 이뤄진다. 물론 위헌 심판 같은 무분별한 입법에 대한 견제 장치가 있긴 하다. 하지만 헌법도 의회 다수에 의해 바뀔 수 있다. 그만큼 현대 민주주의에서 의회 권력은 막강하다. 문재인 정권 이후 지금까지 한국 국회는 이를 잘 보여준다. 그 권력의 원천은 '국민의 뜻'이다. 그런데 그 국민의 뜻은 어떻게 확인하나? 말도 안 되는 법을 밀어붙이고 거부권을 행사한 대통령을 탄핵하라는 것이 총선 승리에 내포된 민심의 명령이라면 똑같은 논리로 그런 법에 대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역시 대선 승리에 내포된 민심의 명령이다. 어느 민심이 정확한 민심일까? 개개인의 국민은 있어도 100% 지지를 받지 않은 다음에야 전체로서의 국민과 국민의 뜻은 없거나 최소한 확인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민주당의 '총선 민심'은 왜곡 과장이다. 정치적 목적을 위한 추상적인 가공물이자 의회 독재 합리화를 위한 가짜 면허증이다. '국민의 뜻'을 참칭하지 말라는 것이다.
2024-05-26 19:13:12
[정경훈 칼럼] 우리의 장미꽃은 다시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나
나치 독일 항복 후 승전국 미국의 최우선 과제는 '탈나치화'였다. 그러자면 나치에 동조한 모든 독일인들을 공적 생활에서 추방해야 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미국을 당황케 했다. 그 실상을 미 군정청장 루시어스 클레이는 이렇게 전한다. "우리 행정의 주된 난제는 상당히 유능한 독일인 중 어떤 식으로든 나치 정권에 참여하지 않았거나 연루되지 않은 자를 찾는 일이었다.… 자격을 갖춘 사람들은… 공직자인 경우가 많았는데…그중 상당수는 나치당 활동에서 단순 가담자 수준을 뛰어넘었다."('포스트 워 1945~2005' 제1권, 토니 주트) 나치 가담과 동조는 범독일적 현상이었던 것이다. 그 원인을 기술하려면 책 몇 권으로도 모자라겠지만 그중 하나를 꼽자면 '도덕적 자폭'이다. 히틀러는 집권 전부터 "유대인은 병균, 제거해야 할 존재"라고 했다. 집권 후 유대인을 어떻게 '처리'할지 예고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독일 국민은 히틀러에게 권력을 안겼다. 그리고 히틀러는 예고대로, 유대인 '훈증(燻蒸) 살균'을 실천에 옮겼지만 독일인들은 모른 체했다. "수백만 명의 독일인들은 유대인에게 뭔가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수많은 독일인들이 밤마다 덜컹거리며 지나가는 열차나 화차를 보고 들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았다. 어떤 사람들은 '저 빌어먹을 유대놈들은 밤잠마저 설치게 한다'고 투덜댔다."('모던 타임스Ⅱ', 폴 존슨) 사설이 길었다. 이런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지난 총선에서 드러난 우리 사회의 도덕적 무정부 상태의 징후 때문이다. 조국혁신당의 약진은 이를 압축해 보여 준다. 조국혁신당은 24.25%의 득표율로 12명의 비례대표 당선자를 냈다. 이 중 5명이 전과자 또는 피의자·피고인이다. 한 여론조사는 이들이 배지를 달 수 있게 된 이유를 보여 준다. 조국혁신당을 찍었다는 이들의 80.2%가 '조국 대표의 윤리의식이 약하다는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윤리의식의 마비 말고는 달리 해석할 도리가 없다. 더불어민주당의 압승도 마찬가지다. 아니 윤리의식 마비가 광범위해 보인다는 점에서 더 심각하다. 당 대표는 정치범도 양심범도 아니다. 민간사업자에게 천문학적 이익을 안긴 대장동·백현동 비리 의혹을 포함해 7개 사건, 10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잡범이다. 국민은 그의 '사당'(私黨)에 압도적 다수 의석을 안겼다. 이를 두고 민주당은 '국민의 위대한 승리'라고 규정했다. 과연 그럴까? 중우(衆愚)의 어리석은 선택은 아닐까? 이런 '승리'로 대표의 어떤 재판도 1심 선고가 다음 대선 전에는 나오기 어려울 가능성은 더 커졌다는 관측이 나온다. 잡범이 2번이나 대통령을 넘보는 도덕적 아노미가 '뉴노멀'이 된다는 얘기다. 그런 아노미는 이미 그 흉한 몰골을 드러냈다. 김활란 이화여대 초대 총장이 이대생을 미군 장교에게 성 상납시켰다는 김준혁 당선인의 주장을 '사실'로 만들려고 자신의 이모를 매춘부로 몬 것이 그렇다. 이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는 이모도 매춘부로 만드는 패륜이 그쪽의 도덕임을 현시(顯示)한다. 야당의 압승 제1 원인으로 좌파 언론부터 여당과 보수 언론까지 윤석열 대통령의 '불통'과 '독선'을 꼽는다.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보기 나름이다. 덴마크 심리학자 에드가 루빈이 고안한 '루빈의 꽃병'이란 그림이 있다. 보기에 따라 꽃병일 수도, 마주 보는 두 사람의 옆얼굴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불통'은 '신념', '독선'은 '의지'일 수도 있다. 설사 그런 관점 이동을 인정할 수 없다 해도 '불통'과 '독선'이 야권 인사들의 도덕적 파탄에 눈을 질끈 감고 표를 몰아줄 만큼 더 큰 잘못인지는 의문이다. 1951년 영국 더 타임스는 한국의 혼란한 정치 상황을 전하며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고 비꼬았다. 그런 모욕을 딛고 우리는 장미꽃을 피워 냈고 그렇게 자부해 왔다. 그러나 박근혜 탄핵, 실정(失政)과 비정(秕政)으로 점철됐던 문재인 정권 5년, 그럼에도 민주당의 21대 총선 압승, 대통령 거부권으로 간신히 버텨왔던 윤석열 정권 2년, 민주당이 압승하고 조국혁신당이 약진한 22대 총선은 이런 물음을 던진다. '우리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을 피워낸 게 맞나? 장미를 쓰레기통으로 다시 던져 버린 게 아닐까?'
2024-04-28 17:24:21
대구 달성군행정동우회,비슬산 참꽃문화제맞이 자연정화활동
대구 달성군행정동우회(회장 임충규)에서는 지난 3일 오전 비슬산에서 회원6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쓰레기 수거 등 비슬산 참꽃문화제맞이 자연정화활동을 개최했다.
2024-04-04 13:51:49
[정경훈 칼럼] 종북 세력 합법적 기생 공간으로 전락할 22대 국회
동서 냉전기 서독 정치는 동독의 손에 놀아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72년 4월 27일 사회민주당 소속 빌리 브란트 총리에 대한 불신임 투표 부결이다. 당시 야당인 기독교민주당 총재 라이너 바르첼은 브란트 총리의 대(對)공산권 유화정책인 '동방정책'이 좀 더 좋은 조건으로 추진돼야 한다며 불신임 동의안을 냈다. 여야 모두 통과를 예상했다. 브란트의 사민/자민당 연합은 자민당 일부 의원의 이탈로 원내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가결 선인 249표에서 2표가 모자란 부결이었다. 놀랍게도 바르첼의 기민/기독교사회당 연합에서 반란표가 나온 것이다. 서독 검찰의 수사 결과 기민당의 율리우스 스타이너 의원이 동독 정보기관 슈타지(Stasi·국가보안부)로부터 5만마르크를 받고 반대표를 던진 것으로 드러났다. 또 다른 이는 오랫동안 기민/기사 연합 원내대표로 있었던 기사당의 레오 바그너로, 역시 슈타지로부터 5만마르크를 받았다. 바그너는 부인했지만 거짓말이었다. 슈타지의 해외 공작 책임자였던 마르쿠스 볼프는 독일 통일 후 기민당 의원들에게 1표당 5만마르크를 줬다고 확인해 줬다. 통일 후 공개된 '로젠홀츠'(장미 나무)라는 슈타지 문서에 따르면 바그너는 '뢰베'라는 가명으로 활동한 '비공식 협조자', 즉 '간첩'이었다. 이뿐만 아니다. 소련은 1970년대 중반 서유럽을 겨냥해 신형 중거리 핵미사일 SS-20(소련 명칭은 RSD-10)을 동독과 체코슬로바키아 등에 배치했다. 이에 대응해 사민당 소속 헬무트 슈미트 당시 서독 총리는 발사 7분 만에 모스크바에 떨어지는 미제(美製) 퍼싱Ⅱ 핵미사일의 서독 배치를 결정했다. 이것 말고는 서독 안보를 지킬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재래식 전력에서 NATO(28개 사단, 탱크 6천500대)는 바르사뱌조약군(58개 사단, 탱크 1만9천 대)에 상대가 안 됐다. 그러나 서독에서는 SS-20 배치에는 눈감은 채 미제 미사일 배치는 안 된다는 거센 반대 시위가 일었고 서독 의원들은 이에 뇌동(雷同)했다. 그리고 슈미트 총리는 자당(自黨) 좌파 의원의 미제 미사일 배치 반대표에 밀려 사퇴해야 했다. 이런 '안보 자해'의 비밀은 통일 후 드러났다. 이 시기 서독 하원의원 중 최소 25명 이상이 동독의 돈을 받은 간첩이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브란트 불신임 투표 부결을 노리고 서독 의원들을 매수하려 했던 사민당 원내총무 칼 비난트도 있다. 그가 '슈트라이트'라는 가명으로 간첩 활동을 하며 동독에서 받은 돈은 100만마르크에 달한다. 대한민국의 22대 국회도 이 꼴이 될 것이라는 우려를 떨칠 수 없다. 더불어민주당이 주도하는 비례 정당 더불어민주연합의 비례 의원 공천에서 종북·반미 세력이 당선 안정권에 배치됐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의 위헌 정당 판결로 해산된 통합진보당 후신인 진보당 몫의 정혜경·전종덕·손솔 등이 각각 5, 11, 15번을 받았다. 이들은 모두 경기동부연합이 주축이 된 민주노동당, 통진당, 민중당 등에서 활동했다. 또 반미(反美) 친북(親北) 성향 인사가 참여한 '연합정치시민사회'에서 추천한 '국민 후보'로,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을 한 이주희 변호사도 당선 가능권인 17번을 받았다. 이들이 국회에서 어떻게 행동할까? 내란 선동·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이석기 전 통진당 의원이 이들에게 오버랩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들이 외교통일위, 정보위, 국방위 등에 배치될 경우 문제는 특히 심각해진다. 우리 안보와 직결된 국가 기밀의 지속적·심층적 누설 가능성이 활짝 열리는 것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의원 1인당 9명인 보좌진도 종북주의자로 채워질 수 있다. 이석기 사건을 수사한 전 국정원 수사관에 따르면 이석기 보좌진은 모두 통진당 내 RO(지하혁명조직)의 핵심 간부들이자 대부분 국보법 위반자들이었다. 비례 당선 안정권 4명만 기준으로 해도 36명의 종북주의자가 추가로 국회에 진입하는 것이다. 이를 저지하려면 유권자가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종북·반국가 세력의 국회 진입을 모두 막을 수는 없지만 최소화할 수는 있다. 그런 점에서 4·10 총선은 우리가 현민(賢民)인지 우중(愚衆)인지를 자문케 하는 실존적 물음이다.
2024-03-31 18:57:23
국민의힘이 대구 중남구에 전략공천한 김기웅 후보는 노무현 정부 통일부 평화체제팀장이던 2007년 국정 브리핑 기고문에서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우리 측이 일방적으로 설정"이라며 "애초부터 남북 간에 큰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과 배치된다. NLL은 마크 클라크 UN군 사령관, 북한 김일성, 중공 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가 서명한 6·25 정전협정문에 근거한 해상(海上) 휴전선이다. 우리 측이 일방적으로 설정한 게 아니다. 김명섭 연세대 교수가 정전협정문 등 여러 기록물을 분석해 내린 결론이다. 김 교수에 따르면 NLL은 정전협정문에 들어 있는 지도에 표시되지는 않았지만, 확정 후 UN군 사령부가 공산 측에 정식 통보했고 공산 측은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전쟁 전인 1950년 6월 24일 남한 통제하에 있었으나 정전협정 당시 북한이 차지하고 있었던 옹진반도 인근의 기린도, 선위도 등 38도선 이남의 도서(島嶼)들이 북한에 양도되는 등 NLL이 북한에 유리하게 설정됐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것은 UN군과 북한·중국이 군사분계선을 그으면서 육상에서는 '소유한 대로 소유한다'는 원칙을 적용하고 해상에서는 일부 지역은 '소유한 대로 소유', 다른 지역은 '전쟁 전 상태로 복귀'라는 북한 주장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에 북한은 고마워했다고 한다. 이후 북한은 1973년 10월부터 두 달간 NLL을 40여 회 이상 침범한 '서해 사태' 때까지 NLL에 시비를 걸지 않았다. 그리고 '별도의 합의가 없는 한 남북의 경계선과 구역은 정전협정에 규정된 군사분계선과 구역으로 한다'고 제11조에 명시한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에도 서명했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NLL 무력화를 기도했다. 1973년 12월 군사정전위원회에서 연해(沿海)의 권리를 주장하며 처음 NLL에 문제를 제기했고 이어 1977년 7월 '200해리 경제수역', 8월 '해상군사경계선', 1999년에는 새로 설정한 '서해해상군사분계선'을 잇따라 발표했다. 이런 무력화 기도에 진보 좌파는 맞장구를 쳐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NLL을 '괴물'이라고 했다. 김 후보의 발언도 마찬가지다. 김 후보가 호국·보수의 심장 대구의 '국민의 대표'로 어울리는지 의문이다.
2024-03-21 18:19:31
1939년 8월 23일 독소불가침조약 체결 후 스탈린의 대(對)파시즘 정책은 180도 바뀌었다. 나치는 박멸의 대상에서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 이를 나치에게 보증하기 위해 나치를 피해 소련으로 망명한 독일 공산주의자들을 나치로 넘겼다. 그 수는 무려 800명에 이른다. 그리고 프라우다를 비롯한 선전 기관의 기사나 성명에서 파시즘에 대한 공격은 물론 파시즘이란 표현 자체가 사라졌다. 이어 세계 각국 공산당에 독소불가침조약은 평화를 위한 결단이라고 선전하고, 파시즘 공격을 중단하고 나치 독일에 맞서고 있는 영국과 프랑스를 '전쟁 도발자'로 비난하라고 지시했다. 소련 밖의 공산주의자들은 처음에는 당혹해했지만 곧바로 소련의 새로운 노선을 충실히 따랐다. 세계 공산당의 국제적 조직체인 코민테른은 독소불가침조약이 "히틀러에 대한 서방의 유화책 앞에서 소련에 열린 유일한 길"이라고 했다. 프랑스 공산당 지도자 모리스 토레즈는 나치가 프랑스를 침공하자 모스크바 방송을 통해 프랑스군에 나치에 저항하지 말라고 호소했다. 소련에 망명한 독일 공산당의 아부는 더 낯 뜨거웠다. 독소불가침조약은 '국제적 긴장 완화에 기여하는 소련의 평화 행위가 거둔 결실'이라고 치켜세웠다. 그 중심 인물로 훗날 동독의 최고 권력자가 되는 발터 울브리히트는 특히 더했다. "소비에트연방과 독일의 조약은 독일 파시즘을 소비에트연방의 발아래 두는 것으로, 세계 노동계급을 지지하는 것이며 소비에트연방을 둘러싼 거짓말과 모순된다." 국내 종북 단체 수장 역할을 해온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 본부의 행태가 딱 그 꼴이다. 북한 김정은이 지난해 "북남 관계는 동족 관계가 아닌 적대적 두 국가 관계"라며 통일 추진 기구를 모두 해산하라는 방침을 내리자 자진 해산하고 '한국자주화운동연합'(가칭)을 건설하겠다고 했다. 운동 방향을 '통일'에서 '한미동맹 해체' '주한미군 철수' 등 '반제자주'(反帝自主)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대의에 대한 배신이었던 독소불가침조약을 찬양한 서구 공산주의자들의 스탈린 맹종(盲從)을 빼다 박았다. 가히 김정은에 조종당하는 로봇이다. 좌파는 이런 자들이다.
2024-03-06 20:00:06
[정경훈 칼럼] 좌파가 이승만에게 씌운 누명, ‘분단의 원흉’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관객이 2일 107만명에 이르렀다. 이런 상업적 성공은 '진실 투쟁'이 아니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진실 투쟁'을 통해 좌파가 이승만에게 씌운 누명들을 벗겨낸 것이다. 그런 누명들 모두가 비열하지만 '분단의 원흉'이란 누명은 특히 비열하고 악의적이다. 그게 거짓임은 북한 정권의 수립 과정을 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북한 정권의 산파는 소련이다. 일본의 항복 후 북한에 군을 진주시킬 때부터 소련은 미국처럼 한반도에 '우호적인 정권'을 수립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스탈린이 1945년 9월 20일 극동전선군 총사령관 A. M. 바실레프스키와 연해주 군관구 군사회의에 내린 '북한에 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 및 조직의 광범위한 블록을 기초로 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라'는 지령이다.('세번의 혁명과 이승만', 오정환) 공산주의자들의 전형적인 통일전선전술이다. 이런 구상하에 소련은 1945년 10월 28일 "북한을 별도의 국가로 만들려는 첫걸음"('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로버트 스칼라피노·이정식)으로 평가되는 '오도행정국'(五道行政局)이란 중앙행정기관을 창설한다. 이를 시작으로 북한 단독 정권 수립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돼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설립됐다. 위원장은 김일성, 부위원장은 '연안파'인 김두봉, 서기장은 김일성의 외가 쪽 할아버지뻘 되는 강양욱이 됐고 각료에 해당하는 국장급 14명 중 상업국장과 보건국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공산주의자였다.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정부가 수립된 것은 1948년 9월 9일이지만 이미 이때 실질적인 정부가 들어선 것이다. 이를 압축해 보여주는 것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성립 경축 대회' 사진(1948. 2. 8)으로, 윗부분이 찍히지 않은 현수막이 걸려 있는데 찍힌 부분의 문구는 "~회(會)는 우리에 정부(政府)이다"이다.([북한] 8·15해방 1주년 기념 중앙준비위원회, '8·15해방 1주년 기념 북조선민주주의 건설 사진첩').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우리의 정부이다'라는 것으로, 정부가 수립됐음을 공표한 것이다. 일본의 저명한 북한 연구자 와다 하루키(和田春樹)가 이때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정권이 탄생했다"고 한 이유다. '임시'라는 말을 붙인 것은 북한 단독 정권 수립을 감추려는 위장술이었던 것이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명실상부한 정부 조직을 갖추고 정부 기능을 수행했다. 2월 9일 국가 건설의 기본 방향을 담은 11개조 당면 과업을 발표했고, 3월 5일 지주를 민간인에서 정부로 바꾸는 '토지개혁에 관한 법령', 같은 달 23일 국가 건설 정책을 구체화한 '20개 정강(政綱)'을 공표했다. 이 모든 것이 좌파가 이승만이 '분단의 원흉'인 증거로 드는 1946년 6월 3일 이른바 '정읍발언'보다 수개월 전에 일어난 일이다. 당시 남한은 어떤 유형의 정치적 제도도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런 가운데 한반도에 통일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소련이 "통일 임시정부는 모스크바 삼상(三相)회의 한반도 신탁통치 결정을 지지하는 정당과 사회단체를 망라한 대중단체의 토대 위에서 수립돼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반탁(反託)인 우익을 빼고 찬탁(贊託)인 좌익 세력만으로 임시정부를 구성하겠다는 것으로, 북한에 구축된 김일성의 '민주기지'를 발판으로 남북한을 아우르는 '붉은 임시정부'를 세우겠다는 속셈이었다. 이에 미국이 반대하면서 1차 미소 공위는 1946년 5월 6일 무기 휴회에 들어갔다. 한반도 분단이 고착된 것은 사실상 이때로 정읍 발언보다 한 달이 앞선다. 북한에는 이미 정부가 들어섰고 통일 정부 수립이 불가능해진 이런 상황에 맞서 남한만이라도 임시 정부를 수립하고 세계 여론에 호소해 북한에서 소련을 몰아내자는 것이 정읍 발언이다. 1947년 5월에 열린 2차 공위에서도 소련은 기존 입장을 고수해 결국 결렬됐다. 정읍 발언은 이런 시대적 배경을 놓치면 좌파의 주장대로 '남한 단정론(單政論)'이다. 그러면 좌파는 그 시대적 배경을 몰랐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분단의 원흉'은 악랄한 허위 선전이다. 진짜 분단의 원흉은 소련과 김일성이다.
2024-03-03 16:04:51
6·25전쟁에 개입한 중공은 1954년 4월 미국이 1952년 1월 말부터 비밀리에 세균전을 펴 왔다고 주장했다. 감염된 파리, 모기, 거미, 개미, 빈데, 이, 벼룩, 잠자리, 지네 등을 살포해 온갖 전염병을 퍼뜨렸다는 것이다. 만주가 주 표적이었지만 남쪽의 산둥(山東)성 칭다오(靑島)가 표적이 된 적도 있었다고 했다. 1952년 2월 처음 나온 이런 주장은 생포된 미군 조종사가 중공 주장대로 자백하고 영국의 유명한 생화학자인 조지프 니덤이 현지 조사 후 펴낸 '한국과 중국에서의 세균전에 관한 국제과학위원회의 사실 조사 보고서'(일병 '니덤 보고서')에서 중공의 주장에 손을 들어 주면서 사실인 것처럼 굳어졌다. 하지만 니덤이 증거라고 수집한 것은 병에 걸린 들쥐 한 마리가 고작이었다. 무엇보다 혹한에는 감염된 벌레를 살포해도 바로 얼어 죽어 질병이 퍼질 수가 없다는 점에서 중공의 주장은 난센스였다. 6·25전쟁 후 중국에서 나온 증언도 중공의 주장을 부인한다. 6·25전쟁에 참여한 중공군 의무 책임자였던 우즈리(吳之里)는 2013년에 공개된 회고록에서 미국이 세균전을 벌였다는 주장은 '가짜 정보'였다고 고백했다. 또 6·25전쟁 때 중국 인민해방군 부총참모장이었던 황커청(黃克誠)도 1986년 사망 전 우즈리와 대화에서 "미 제국주의자들은 조선에서 세균전을 벌이지 않았다. 이제 양국(미·중) 관계가 나쁘지 않으니 그 문제에 관해 계속 얘기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했다. 소련은 이미 이를 알고 있었다. 정보기관의 보고를 바탕으로 소련 공산당 중앙위는 1953년 5월 2일 비밀 결의서를 채택해 마오쩌둥(毛澤東)에게 보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소련 정부와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잘못 알았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세균전 무기를 사용했다는 보도는 명백히 잘못된 정보에 근거한 것이다." 중국 방첩기관인 국가안전부가 '가짜 정보'를 다시 우려먹고 있다. 21일 중국 모바일 메신저 위챗(微信) 공식 계정에서 "1951년 적은 조선의 전쟁터와 중국 동북 지역에서 세균전을 진행했다"며 중국 공산당의 지하조직인 '은폐 전선'이 "적의 세균전 실시 음모를 제때 파악해 신화통신을 통해 알려지게 했고, 국제사회에 적의 잔혹한 행위를 폭로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말 그대로 새빨간 거짓말이다.
2024-02-22 19:02:37
"남북 분단 조장. 국민 모두가 38선은 임시 조처이고 곧 통일한다고 믿었는데 이승만은 일찌감치 1946년 6월 '정읍 발언'으로 남북 분단을 기정사실화하고 결국 반쪽 정권을 장악했다. 미국조차도 생각하지 않던 남한 단정으로 몰고 감으로써 6·25전쟁과 남북 분단, 대립을 가져오는 단초를 제공했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 고위직을 지낸 원로 경제학자가 지난해 11월 한 일간 신문에 기고한 칼럼의 일부다. '이승만=남북 분단의 원흉'이라는 좌파의 프레임을 답습하고 있다. 남북 분단의 원인에 대한 무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정읍 발언'을 쉽게 풀어쓰면 이렇다. '한반도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가 양측의 대립으로 무기 휴회(休會)돼 통일 정부라는 우리의 염원 실현이 멀어지고 있어 남한에 임시정부를 세워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은 뒤 북한에서 소련이 물러나도록 해야 한다.' 좌파들은 이를 '남한 단정론(單政論)'으로 몬다. 이승만이 북한보다 먼저 단독정부 수립을 획책했다는 것이다. 비열한 거짓말이다. 스탈린은 1945년 9월 20일 소련 극동전선군 총사령관 바실레프스키와 연해주 군관구에 북한에 단독정권을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10월 8일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 연합회의'가 열려 '북조선 중앙은행 설립'을 결정했고 28일에는 중앙행정기관인 '북조선 5도 행정국'이 만들어졌다. 이런 북한 단독정부 수립 작업은 1946년 2월 8일 김일성을 위원장, 김두봉을 부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수립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그때가 정읍 발언 4개월 전이었다. 북한이 먼저 단독정부를 세웠던 것이다. '인민위원회' 앞에 '임시'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분단 책임을 가리려는 속임수였다. 대한민국 건국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한 역할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이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개봉 첫 주말 관객 3만5천 명을 돌파해 박스오피스 4위에 올랐다고 한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관객 후기가 "교과 과정에서 접할 수 없었던 내용을 볼 수 있어 좋았다" "공과가 있는데 과 때문에 공까지 부정당하는 것은 안타깝다" 등 호평이 압도적이라는 사실이다. 이승만이 자유 대한민국 건국 영웅으로 속히 복권(復權)되기를 기대한다.
2024-02-06 18:55:14
[정경훈 칼럼] 민심은 ‘천심’(天心)? 천심다워야 천심이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다'는 자유 민주주의의 대원칙이다. 권력의 원천은 국민이라는 것이다. 히틀러는 이를 적극 지지했다. 1930년 9월 독일 총선에서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이 사회민주당에 이어 원내 제2당이 됐을 때 당시 하인리히 브뤼닝 총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국민에게서 모든 권력이 나온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바이마르 민주주의'가 만개한 당시 독일의 현실에서 이 원칙을 따르지 않고서는 권력을 잡을 다른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이런 원칙에 기대 행동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민주주의를 파괴해 버렸다. 히틀러는 물리력으로 정권을 잡지 않았다. 정권 장악 과정에서 폭력이나 강압으로 국민을 위협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합법적인 선거로 정권을 잡았다. 권력의 원천인 국민이 그를 권좌에 올린 것이다. 일단 정권을 장악하자 히틀러는 독일 민주주의를 압살해 버렸다. 히틀러가 1933년 1월 30일 권좌에 오른 후 3월 23일 입법권과 헌법 수정 권한을 의회에서 정부로 이양하는 '민족과 국가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법', 일명 '수권법'(授權法)이 우파와 중도파의 찬성에 힘입어 의회를 통과하고 6월에는 나치당이 유일한 합법 정당이 됐다. 히틀러가 독일 민주주의를 완전히 박살내는 데 5개월도 걸리지 않은 것이다. 그 원동력은 독일 국민들의 침묵이었다. 이를 두고 나치를 피해 스위스로 망명한 오스트리아 출신 소설가 로베르트 무질은 이렇게 기록했다. "그 모든 것에 반대한다는 인상을 준 이들은 하녀들뿐이었다. 물론 입 밖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이런 사실은 "모든 국민은 그들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는 경구(警句)의 섬뜩한 진실을 다시 일깨운다. 이 말은 프랑스 정치철학자 알렉시스 토크빌이 한 말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18세기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 접경에 있던 사보이아 공국의 외교관 조제프 드 메스트르의 것이다. 메스트르는 프랑스혁명에 반대하고 절대왕정을 지지한 반동주의자였다. 그래서 이 말은 민주주의에 대한 조롱으로 여겨진다. 그렇다 해도 이 말이 폐기 처분돼야 할 이유는 없다. 정부의 수준은 국민 수준이 결정한다는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국민 94.5%가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10명 중 8명이 못 먹어 체중이 감소하는 '비자발적 다이어트'를 강요당한 베네수엘라의 비극은 좋은 예다. 그 비극은 구제 불능의 포퓰리스트 차베스와 마두로를 선택한 국민의 '수준'이 초래한 것이다. 우리도 우리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바로 소주성, 탈원전, 반기업·친노조, 울산시장 선거 공작, 정부 범죄 검찰 수사팀 학살, 폭등한 집값이 폭등하지 않은 것으로, 악화된 분배를 개선된 것으로 분식(粉飾)한 통계조작 등 실정(失政)과 비정(秕政)으로 점철됐던 문재인 정부다. 그렇게 뜨거운 맛을 봤으면 정신 차릴 법도 한데 그렇지 못했다. 심판해야 할 이유가 차고 넘침에도 국민은 21대 총선에서 당시 여당에 개헌 말고 못 할 것이 없는 180석을 몰아줬다.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나? 절대다수 의석을 망나니 칼 삼아 '의회 독재'로 폭주하지 않았나? 정권이 바뀐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은 의회 독재에 맞서 법률안 거부권을 4차례나 행사해야 했다. 그럼에도 패륜적 언행으로 인성(人性)을 의심받고, 7개 사건 10개 혐의로 재판과 수사를 받고 있는 사람의 사당(私黨)이란 소리를 듣는 정당은 그 나름 견고한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는 일하는 척하고 그들은 임금을 주는 척한다'는 구소련 농담이 있다. 위선이 판을 치는 '사회주의 천국'의 실상을 비꼰 것이다. 지금의 현실을 이에 빗대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다.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인 척하고 그들은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척한다.' 이런 착각과 위선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그 기회가 4월 총선이다. 윤석열 정부의 지지도가 만족 못 할 수준에서 횡보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기대만큼 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된 데는 야당의 발목 잡기도 한몫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야당의 '정권 심판론'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우리는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민심은 천심(天心)이라고 한다. 그러나 '천심'다워야 '천심'이다. 국민의 어떤 선택이든 무조건 천심일 수는 없다.
2024-01-28 16:14:38
1953년 사망한 스탈린의 시신은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레닌 묘에 레닌 시신과 합장됐으나 1961년 제22차 소련 공산당 대회 후 레닌 곁에서 사라졌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한다. 당시는 스탈린 격하 운동을 벌였던 흐루쇼프가 권력을 잡고 있을 때인데 당 대회가 끝날 무렵 1903년 볼셰비키에 가담했던 나이 든 여성이 연단에 올라 전날 밤 꿈 얘기를 했다. 레닌이 현몽(現夢)해 "나는 스탈린 곁에 누워 있는 것이 싫다. 스탈린은 너무나 많은 불행을 우리 당에 가져다주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각본에 따른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렇게 해서 스탈린 시신을 레닌 묘에서 들어내는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공산주의의 철학적 기반인 유물론(唯物論)을 웃음거리로 만든 결정이었다. 그날 밤 스탈린 시신은 크렘린 뒤 구덩이에 던져졌고, 시신 위에 콘크리트를 부은 뒤 화강암 판으로 덮었다고 한다. 레닌처럼 시신이 영구 보존되기를 원한 스탈린의 소원은 이렇게 날아갔다. 레닌의 바람은 스탈린과 달랐다. 죽기 전 자신의 시신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어머니 묘 옆에 묻어 달라고 했다. 하지만 소련 공산당 지도부는 1924년 이를 무시하고 방부 처리해 영구 보존키로 결정했다. 영국의 정치철학자 존 그레이에 따르면 이런 결정에는 레닌이 비유적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 현세(現世)에서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었다. 레닌의 장례위원회 명칭부터 '불멸화위원회'였다. 레닌의 묘가 정육면체 구조물이 된 것도 같은 이유다. 레닌 묘를 설계한 A. V. 슈셰프는 불멸화위원회 회의에서 "건축에서 정육면체는 영원을 의미한다. 레닌을 기념할 묘를 정육면체에서 끌어오자"고 제안했고 불멸화위원회는 이를 채택했다. 소련 공산당은 1973년 당 문서를 갱신하면서 레닌의 당원증부터 재발급했는데 이 역시 '레닌 불멸'이라는 기괴한 공산주의 주술(呪術)의 발로다. 레닌 사망 100주기를 맞아 러시아에서 그의 시신을 매장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이런 제안은 1991년 소련 붕괴 후 여러 차례 나왔고 찬성 의견도 높았으나, 레닌 시신은 여전히 붉은 광장의 묘에 '전시'돼 있다. '불멸'을 강요당하고 있다고 할까. 이번에는 어머니 곁에 묻히고 싶다는 레닌의 바람이 이뤄질지 관심이다.
2024-01-24 20:11:04
1917년 사회주의 혁명으로 볼셰비키는 권력을 잡았지만 레닌은 고민이 많았다. 적백(赤白) 내전을 거치며 산업은 황폐화됐고, 이를 회복하지 못하면 볼셰비키 권력의 정당성은 의심받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도시와 농촌의 단절도 큰 골칫거리였다. 혁명이 시골 지역으로 침투하지 못해 반(反)혁명의 기반으로 이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레닌이 들고나온 것이 '전(全) 러시아의 전기화(電氣化)'이다. 전국을 전기로 연결시켜 현대적 산업 기반을 조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농촌에 만연한 무지, 침체, 가난을 몰아내 혁명을 완성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1921년 12월 출범한 것이 '고엘로'(GOELRO·러시아전기화위원회)이다. 여기서 마련한 전기화 사업 계획은 소련 경제 발전을 위한 첫 5개년 계획으로, 이후 소련의 경제 계획 당국인 고스플란(Gosplan·국가계획위원회)의 5개년 계획의 원형이 됐다. 그 목표는 러시아 전역을 8개 지역으로 나눠 10개의 대형 수력발전소와 전기로 가동되는 대규모 공장을 포함한 30개의 지역 발전소 네트워크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소련은 1931년에 계획이 달성됐다고 발표했으나 실제 성과는 당초 계획에 크게 못 미쳤다. 목표로 정한 10개 수력발전소 중 1930년까지 건설된 것은 3개에 그쳤다. 이 계획으로 소련 발전량이 크게 늘긴 했지만 '전 러시아 전기화'는 실현되지 못했다는 게 냉정한 평가다. 지난해 말 평양을 출발해 함경남도 금골로 향하던 열차가 급경사를 넘던 중 기관차 견인기 전압 부족으로 뒤로 밀리다 전복돼 수백 명이 사망했다고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AF)이 북한 소식통을 인용해 16일 보도했다. 국정원은 이를 확인도 부인도 않지만 복수의 대북 소식통은 그런 사고가 일어났다고 전한다. 북한의 전력난은 심각하다. 북한 지역은 평양 주변을 제외한 모든 지역이 암흑이고, 남한 지역은 밝은 불빛으로 가득 찬 한반도 야경 위성 사진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레닌은 고엘로 승인 1년 전 "공산주의는 소비에트 권력 더하기 전국의 전기화이다"('우리의 국내외 지위와 당의 임무')라며 사회주의 완성의 2대 요건의 하나로 '전기화'를 꼽았다. 레닌의 기준으로도 북한 사회주의는 실패한 것이다.
2024-01-22 05:00:00
1941년 독일의 소련 기습을 가리키는 정보는 넘쳐났다. 독일 정부 내에서 암약하던 '붉은 오케스트라'라는 반(反)나치 그룹이 그런 정보를 보냈고, 증조부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친구로, 독일 신문의 일본 특파원으로 위장한 소련 간첩이었던 리하르트 조르게가 도쿄 주재 독일 대사관에서 정보를 빼내 침공 날짜를 실제 침공 날짜(6월 22일)와 이틀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6월 20일로 찍어줬음에도 스탈린은 믿지 않았다. 독일과의 상호 불가침조약을 철석같이 믿은 데다 독일이 이를 파기하더라도 영국을 패퇴시키기 전까지는 소련을 침공하지 않을 것이란 망상(妄想)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련 침공은 히틀러의 일관된 계획이었다. 히틀러는 소련을 독일인의 '레벤스라움'(Lebensraum, 생활공간) 즉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1927년 '나의 투쟁'에서 밝힌 이후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다. 유대교의 속죄일(욤키푸르)에 발발했다고 해서 욤키푸르 전쟁이라고 불리는 제4차 중동전(1973년 10월 6~25일) 초반에 이스라엘군이 엄청난 손실을 입은 것도 안이한 정보 판단 때문이었다. 당시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은 1971년부터 전쟁을 공언(公言)했고, 실제로 1971년부터 이집트는 전략 요충지로 병력을 지속적으로 집결시켰다. 이집트의 기습을 경고하는 정보 보고가 줄을 이었으나 이스라엘 정보기관은 믿지 않았다. 기습 당일인 10월 6일에도 그랬다. 새벽 4시에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정보원이 이날 일몰 무렵 이집트와 시리아가 양면에서 공격할 것이라고 보고했으나 이스라엘 정부는 무시했다. 미국 미들베리국제연구소의 북한 문제 전문가 두 사람이 북한 김정은의 잦은 '전쟁' 언급이 허세가 아닐 수 있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한국과 미국은 김정은이 한미동맹의 강력한 억지력 때문에 소규모 도발은 할 수 있으나 현 상태를 유지할 것이란 생각을 고수하고 있지만 그런 믿음에 집착하는 것은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과거 여러 전쟁에서 적의 의도를 오판해 재앙을 초래한 사례가 숱한 만큼 경계를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경계에는 많은 인적·시간적·물적 비용이 들어가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2024-01-14 18:5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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