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현장에서 목소리가 큰 사람의 과실이 적다고 판단하던 때는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다. ▷목덜미 잡고 하차 ▷눈이 어디 있냐며 삿대질 ▷기세 확보의 마침점인 증인 수소문까지의 삼단계 전개가 공식이던 야생의 시절이다. '목격자를 찾습니다'라는 현수막이 주요 길목이나 교차로에 제법 걸렸다. 여성 운전자에게는 특히나 공포 그 자체였다. 그런 의미에서 영상기록장치, 블랙박스는 세탁기만큼이나 여권(女權) 신장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주장해 볼 만하다. 과학과 기술의 진보는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줄인다. 정치권에서도 과학과 기술을 동반한 민심 파악 방식이 있는데 바로 여론조사다. 여론조사가 없던 시절에는 선거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에 이런저런 이들이 '토박이 전문가'를 자처하며 돕겠다고 선거 캠프에 줄을 섰다. 그런 이들이 몰려 문전성시를 이루면 기세에서 앞섰다는 평가가 입소문을 타고 번지는 식이었다. 그러니 유권자의 의사를 수치화한 여론조사 추이는 유용했다. 전략 기획에 힘을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과학적 영역에 있는 듯한 여론조사지만 아전인수(我田引水)식 해석이 가능한 건 함정이다. 자체 여론조사 결과를 들고 청사진을 보여 주는 이가 나타나면 함정일 수 있다는 의심을 품어야 하건만 천군만마로 인식하는 게 출마자들의 심리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라는 말이 정설에 가까운 정치권에서 구체적인 도움을 제시하는 이라면 누구든 혈맹에 가까운 동지가 된다. 인사이트를 가진 책략가로 모시기까지 한다. 현인(賢人)이라면 그런 접근을 경계하겠지만 엎치락뒤치락하는 하루하루의 지지율을 보는 출마자의 감각은 마비되기 십상이다. 선거 전략과 전개를 일임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보름 동안 선거운동을 열심히 해서 당선에 가까워지는 게 아니란 말이냐"고 따져 묻는다면 그 말도 영 틀리지 않다. 드물 뿐이다. 박빙(薄氷)으로 당락이 결정되는 지역은 선거운동의 열성과 진심이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봐야 한다. 최근 치러진 22대 총선에서는 여론조사에서 줄곧 밀렸던 경기 화성을 지역구의 이준석 의원이 그랬다. 다만 도저하게 흐르는 민심의 흐름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기세는 거스르기 힘들다. 소속 정당의 무능과 실책이 거듭되면 제아무리 유능한 출마자라 해도 개인기로는 한계에 부딪힌다. 여론조사 업체를 두고 여러 정치인 및 출마자들과 교류해 온 것으로 알려진 명태균 씨 사태를 계기로 우리가 알아챈 게 있다. 여론조사를 도구로 출마자들에게 접근하는 건 흔하며 선거를 치르기까지 정치인들이 '선거판의 자칭 고수들'에게 쉽게 휘둘린다는 사실이다. 이들 앞에서 5선 의원인 김영선 씨도 핀잔을 들으며 주춤거렸다. 선거 공훈에 따른 논공행상(論功行賞)이 있을 거라 짐작할 수 있지만 그 수위가 '갑을관계'로 비칠 정도인 줄은 미처 몰랐다. 명태균 씨는 기자들의 질문을 받으며 "좋은 사람이 있으면 추천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반박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설득력 있게 통용되는 말도 아니다. 그런 식의 추천을 우리는 일반적인 공천(公薦) 시스템이라 여기질 않기 때문이다. 5선 의원도 그렇게 움츠러드는데 정치 초보들은 어떨까. 하늘이 점지한 누군가가 갑자기 나타나 출마자를 돕는 일은 없다. 선거판을 움직일 수 있다는 이들 상당수는 책략가가 아니기도 하고 반대급부를 반드시 요구한다. 여전히 후진적인 대한민국 정치의 단면이다.
2024-11-18 19:52:09
아날로그 수기(手記)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마법 같은 힘이 있다. 디지털 감성인 이모티콘과는 감정적 영역이 다르다. 간단한 메모에도 묻어나는 감성은 글씨체가 뿜어내는 '오라(aura)'로 부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진심을 담으려 할 때 손 편지는 최적의 효과를 뽐낸다. 문학 작품에서 작품성을 고양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육필 원고를 작품집에 싣기도 하는데 고유의 필체마저 작품의 일부로 녹이려는 목적이다. 30년 전쯤만 해도 대학가는 수기의 천국이었다. 한글 프로그램의 안착과 PC의 대중화가 있기까지 리포트 작성은 순전히 수기로 이뤄졌다. 더구나 캠퍼스의 절반은 플래카드와 대자보가 차지했다. 정치색이 진한 구호는 플래카드에 담고, 설파할 필요가 있는 주제는 대자보에 실었다. 플래카드 제작과 대자보 작성은 당시 학생회 선전부의 주된 임무였다. 특히 대자보에는 필적이 드러나기에 작성자를 추측할 수 있었다. 근래 들어 대자보의 역할을 이어받은 것이 익명을 보장한다는 앱이다. 이 역시나 작성자의 정체를 추정하는 그 나름의 방식이 있다고 한다. 재학생 여부를 가리는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던져 오답이 나오면 외부인으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경북대의 경우 "정보센터에서 어떤 수업을 들었냐"고 물었을 때 수업 이야기를 한다면 영락(零落)없이 외부인으로 판가름 난다. 정보센터의 별칭은 '밥센터'이기 때문이다. 영역 표시처럼 드러나는 선호 표현도 있다. 특유의 어투가 있듯 문투(文套)도 무시할 수 없다. '점점 줄어든다'는 표현으로 '숙지다'를 쓰는 이도 있지만 '사그라들다'를 쓰는 이도 있다. 결코 쓰지 않는 표현은 알리바이 기능도 한다. 조은희 의원이 (통화 여부와 별개로) 명태균 씨를 '영남 황태자'라 했다고 명 씨가 주장했는데 조 의원은 "그런 말은 제 용어가 아니다"고 반박했다. 국민의힘 당원게시판에 윤석열 대통령 부부를 비방하는 글이 수백 건 게시됐는데 한동훈 대표와 그의 부인, 장인, 장모, 모친 등 가족의 이름이 작성자로 드러나 소동이 일고 있다. 저열한 표현이 다수 포함됐는데 한 대표 가족이 자주 쓰는 용어인지는 불분명하다. 가능성이 낮다지만 명의 도용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난리 통에는 아날로그 수기의 진심이 그리워진다.
2024-11-17 19:07:22
중세 영국과 프랑스 왕이 할 일 중 하나는 백성들의 손을 만져 주는 것이었다. 백성들은 왕의 손을 만지기만 해도 병이 낫거나 에너지를 얻는다고 여겼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는 왕이 연주창(連珠瘡) 환자들을 만지느라 바쁘다는 장면도 있는데 손만 얹어도 치료되는 능력은 왕권의 정통성(正統性)으로 간주됐다. 영국 국왕 찰스 2세는 25년 동안 9만2천 명, 연평균 3천700명에게 손을 얹었다고 한다. 지난 3일 스페인 국왕 펠리페 6세가 홍수 피해가 컸던 발렌시아주 파이포르타를 찾았다가 분노한 수재민들로부터 진흙 세례를 받았다. 수재민들은 "살인자들" "당장 꺼져라" 등 욕설도 내뱉었다. 그럼에도 국왕은 수재민들에게 손을 내밀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국왕이 현장을 방문하기 전 민심이 좋지 않다며 만류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국왕은 방문을 고집했다고 한다. 곤욕(困辱)이 주관적 감정이라면 고난(苦難)은 객관적 평가에 가깝다. 곤욕은 예상치 못해 멘탈이 무너져 내릴 수 있는 봉변(逢變)에서 오지만, 고난은 고초가 예상됨에도 스스로 들어가는 것이다. 곤욕의 뒤에는 수치심이 남지만 고난의 뒤에는 '까임 방지권'이 생긴다. 수세에 몰린 위정자 일부는 달걀 세례 등 가벼운 테러를 호기(好機)로 삼기도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국회 개원식·시정연설 불참 관련 입장을 밝히면서 "특검법과 동행명령권 남발은 국회에 오지 말라는 것"이라 했다. 또 "국회가 그 시간만큼이라도 예의를 지켜 주면 열 번이라도 가겠다"고 했다. 최고 권력자에 맞선 걸 기개(氣槪) 넘치는 무용담으로 전하는 운동권 투사(鬪士)식 저항으로 피켓 시위를 벌이던 야당이 "사과하고 가라"며 고함친 기억이 선명할 것이다. 돌을 맞더라도 가겠다던 대통령이 참기 힘든 곤욕이겠지만 견디는 모습을 고난으로 읽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20년 전쯤이다. 집중호우로 물에 잠긴 마을을 찾아갔던 모 구청 부단체장은 주민들 앞에서 죄송하다고 했다. 배수펌프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비가 온 탓이었지만 격분한 주민들은 그를 물속으로 떠밀었다. "주민 분노가 사그라질 때쯤 가지 그랬냐"고 하니 그는 이렇게 답했다. "물에 빠지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책임 있는 사람이 나서야 할 때가 있는데 그게 늦을수록 분노는 더 커진다."
2024-11-10 18:44:53
월드컵이 열리는 해마다 열리는 지방선거는 숙청(肅淸)의 시기다. 수장이 바뀌면 새로운 비전을 보이려는 의욕도 커지기 마련이다. 길게는 12년까지도 버티지만 짧게는 4년 만에 바뀌는 순장조(殉葬組)가 ▷캐치프레이즈 ▷마스코트 ▷축제다. 전임자 흔적 지우기를 '쇄신'으로 읽어 달라 한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다'는 상징적 표식이다. 새로이 시작되는 것들에는 설명에 많은 공이 든다. 주로 '엄근진(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한 품격)'의 풍모가 강한 탓이다. 시쳇말로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것인데 도슨트가 옆에서 설명해야 그나마 작품 의도를 알아들을 수 있는 추상화와 비슷하다. 난해함과 비공감 탓에 지속력이 약하다고 볼 수도 있다. 최근 들어 공직사회에 불고 있는 'B급 정서(情緖)' 축제는 엄근진과 거리가 멀다. 저비용 고효율의 B급 콘텐츠로 도전해 본 뒤 통할 것 같다는 판단이 들면 본격적으로 실행하는 것이다. 거액의 예산 편성 없이 파일럿 프로그램 격으로 시작한 축제가 대박을 터트리면 그만한 효자도 없다. 지난달 26~27일 김천에서 열린 '김밥 축제'는 '김밥 없는 김밥 축제'라는 빈축을 샀다. 축제 시작 3시간 만에 재료가 소진됐다. "김밥은 먹지도 못하고 편의점 컵라면만 먹었다"는 항의가 넘쳤다. 예상 방문객 수는 2만 명 정도였는데 10만 명이 몰린 탓이었다. 김밥을 축제 소재로 삼은 데는 프랜차이즈 음식점 '김밥천국'의 공로가 컸다. '김천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뭐냐'고 설문조사를 했더니 '김밥천국'이라는 답으로 수렴(收斂)됐다. '태평천하'를 '천하태평'이라 읽는 것처럼 음운 도치(倒置)로 합성어를 읽는 건 온전히 읽는 이의 몫이다. 뜨끈한 국물이 생각날 때 설문 조사를 했다면 김밥보다 국밥을 먼저 떠올린 이들도 적잖았을 터. 그랬다면 국밥을 소재로 삼았을 수도 있었을 테다. 혁신과 쇄신은 필요할 때 해야 공감을 얻는다. 혁신의 아이콘으로 기억되는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다 헤져 가는 장갑을 끼고 다닌 것으로 유명했다. 쓸 수 있는 물건마저 바꾸는 건 낭비로 봤다. '김밥 없는 김밥 축제'라는 비판도 있지만, 역발상의 힘이 컸다는 것도 분명했다. 가능성을 보인 축제다. 심기일전해 내년에도 만날 수 있길 바란다.
2024-11-03 19:52:03
1926년 10월 단성사에서 무성영화 '아리랑'이 상영됐을 때 1938년까지 흥행을 이어갈 거라 예상한 이는 드물었다. 작품성을 폄훼한 게 아니었다. 무성영화의 특성 탓이었다. 소리가 나오지도 않는 판에 연기파 배우들의 웬만한 표정 연기가 아니라면 관객의 주의를 시종일관 묶어두기 어려웠다. 난제를 해결한 건 변사(辯士)였다. 대본을 좇아 읽는 역할이 아니었다. 무성영화의 전능한 창조주나 마찬가지였다. 화면 상황을 적당히 그러나 자극적으로 설명할수록 유능했다. 관객의 귀에 착착 감기니 제작자의 의도와 무관한 일방적 언설도 가능했다. 떠도는 이야기를 정연(井然)하게 연결해 관객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해도 실제 있었던 일이라 믿기 마련이었다. 짐작하건대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드도 하루가 멀다하고 왕비를 죽였던 샤리아르 왕이 자신의 말을 믿고 있다는 걸, 자신이 죽지 않을 걸 몇 달 만에 알았을 것이다. 변사의 맛깔나는 해설은 추임새 정도에 머무르지 않았다. 변사가 마음먹은 대로 영화의 장르가 바뀔 수도 있었다. 배우의 대사를 관객이 직접 듣지 못해서였다.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리 좋더란 말이냐"라는 변사의 대사로 유명한 영화 '장한몽(長恨夢)'에 신태식이라는 가명으로 주인공 이수일 역을 맡았던 심훈(소설 '상록수'의 저자가 맞다)은 변사의 해설을 강하게 비판했는데 "배우의 이름을 얼토당토않게 부르는 것은 고사하고… (중략) 희생(犧牲)을 희성, 쇄도(殺到)를 살도로 읽는 따위는 너무나 상식을 지나는 일"이라 꼬집기도 했다. 일련의 비판들을 견디지 못하고 1930년대 후반부터 변사의 전성시대는 저물었다. 그 자리를 대신한 이들 중에 만담가가 있었다. 해방과 동시에 이들은 여론을 선도하는 기수(旗手)라 자처하며 지방 순회공연에 나서기도 했다. 1946년 1월 미 군정 정보처는 대구에서 열린 만담가 신불출의 공연을 "한국의 유명한 코미디언이며 만담가인 신불출은 대구 공보관에서 공연했으며 공연을 마치면서 해머와 낫이 그려진 적기를 휘날렸다. 그러면서 그는 공산주의자가 조선인이 염원하는 독립으로 이끌 것이라고 외쳤다"고 보고했다. 신불출은 일제강점기부터 풍자와 해학으로 인기를 얻은 바 있었다. 일제의 정책을 조롱하는 대담한 만담으로 유명했고 해방 후 좌익 계열인 조선영화동맹에 가입했다. 좌익 활동을 이어간 그는 같은 해 6월 김두한(김좌진 장군의 아들)의 총격을 받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1947년 월북(越北)했다. 1960년대 초 대본 검열 등 통제적인 북한의 문화정책을 비판한 뒤 숙청됐다. 변사와 만담가의 시대가 재현(再現)되는 듯하다. '명 박사'라는 이와 영부인의 과거 메신저 대화 내용이 정쟁 공세의 재료가 됐다. 실제로 보이는 대화 내용과 다른 해석이 나왔다. 영부인이 "철없이 떠드는 우리 오빠 용서해 주세요"라고 한 건 윤석열 대통령을 가리키는 것이라 했다. 남편을 당연히 '오빠'라고 부른다는 황당한 근거였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일부에서 통했다. 남편을 '아저씨'라 부른다는 영부인의 해명은 귓등으로 넘겼고 '명 박사'라는 이의 해명이 오락가락하자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유야무야 넘겼다. 한쪽의 주장이나 추정을 단단한 근거로 삼는 건 위험하다는 걸 분명 알 텐데 거듭 인용한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지만, 변사가 많으면 배가 우주로 갈 수도 있다. 또 그 배로 우주 개척 시대를 연다는 설명도 가능하다. 물론 말 같지도 않은 소리다.
2024-10-28 21:11:24
해방 직후 미 전쟁성이 가장 시급하다고 판단한 첩보 우선순위 1급에는 일본의 밀정(密偵)으로 이용된 한국인 명단, 친일 부역자와 정치범에 관한 정보 등이 포함됐다. 밀정 명단은 미 국무성, 전략정보국 등 다섯 개 기관이 제각기 요구했다. 조선총독부, 각 지방 경찰국 등에서 자료 확보가 가능했겠지만 순조롭지 못했다.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은 게 훨씬 많았던 탓이었다. 6·25전쟁 당시 미군 방첩대가 특히 경계할 대상으로 지목했던 부류 중에는 '여성'이 있었다. 1951년 10월 방첩대 지구 야전 보고서에는 이런 첩보가 있다. "북한 정부가 500여 명의 젊은 여성 간첩 요원들을 남한에 파견할 계획이라고 한다. 선발된 모든 여성은 적어도 고졸 이상의 학력을 갖췄으며 각종 간첩 활동에 관한 석 달간의 훈련 코스를 거쳐야 한다. 이들은 통상 미군과의 교제를 활용하여 남한 당국의 수사를 피하려고 한다. 이 그룹의 상당수는 유엔군 댄스홀 등에 취업하고 있다." 아랍권의 CNN이라 불리는 알자지라 방송 소속 언론인 여섯 명이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소속 대원으로 확인됐다는 주장이 이스라엘군에서 나왔다. 확신의 근거는 하마스 대원 명단과 훈련 과정, 전화번호, 급여 등 정보가 포함된 문서였다. 아나스 자말 마무드 알샤리프 기자는 하마스에서 '팀 지휘관'을 맡고 있으며 200달러의 급여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고, 이스마일 파리드 무함마드 아부 오마르 기자는 '저격수'라 적혀 있다는 것이다. 최근 국가정보원 직원들에게 사찰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한국대학생진보연합과 촛불승리전환행동 회원 9명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손해배상청구액은 500만∼2천만원이라고 한다. 경찰도 국가정보원 직원들이 이들을 미행(尾行)해 촬영하며 동향을 파악한 게 사실이라고 확인했다. 미행당한 이들의 빠른 눈치도 대단하지만 미행을 들킨 직원들도 보통이 아니다. 미행이란 대상이 알아채지 못하게 하는 게 기본이다. 국가정보원 직원이 포털사이트에 조직적으로 댓글을 쓰는 것에 비해 미행이 직업적 본질에 가깝다지만 휴대전화 기록물까지 보여줘야 했다면 보통 문제는 아닌 듯하다. 가령 적대적 인물을 해외에서 미행하다 발각됐다면 어찌 됐겠나.
2024-10-27 22:47:44
몇 해 전 우리 문단의 거목이라 불리는 한 작가가 '등단 50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일본에 유학을 갔다 오면 무조건 다 친일파가 돼 버린다"는 말로 신문 문화면이 아닌 사회면에서 이슈가 됐던 적이 있다. 그날 기자간담회에서는 노벨문학상과 관련한 작심 발언도 있었는데 1968년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로비로 이뤄졌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노벨문학상을 '가장 정치적인 상'이라고 평가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노벨상을 탔을 때 일본이 엄청나게 으스댔는데, 뒤에 따라오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가와바타의 제자인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라는 군국주의 작가가 스웨덴에 가서 거대한 파티를 수차례나 했다고 한다. 대한민국은 그런 파티를 할 능력이 없다"고 덧붙였다. 일본이 노벨문학상 심사위원과 가까이하는 자리를 마련해 수상이 가능했다는 뉘앙스였다. 50년이 지나면 추천자를 공개하는 노벨위원회 홈페이지를 확인해 봤다. 1968년 당시 한림원은 '설국(雪國)' 등을 쓴 가와바타를 수상자로 선정한 이유로 "일본 정서의 진수를 위대한 감수성으로 섬세하게 표현한 것"을 꼽았다. 노벨위원회는 "후보자들이 옹호자들의 엄청난 집념에도 불구하고 상을 받지 못한 사례도 있다"고 했다. 1907년부터 사망하기 직전인 1923년까지 매년 후보에 올랐던 카탈루냐 작가 앙헬 기메라(발렌시아의 지하철 역명이 그의 이름에서 왔다)가 그랬다. 가와바타는 후보로 처음 지명되고 3년 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스웨덴 한림원 회원이자 작가인 하리 마르틴손(1974년 수상자)이 1965년 처음 추천했다. 1943년 영화 '엘비라 마디간'의 각본을 쓴 칼 라그나르 이에로브는 3명을 추천했는데 그중 하나가 가와바타였다. 1966~67년에는 하워드 히벳 하버드대 교수가, 1968년에는 한림원 회원이자 작가인 에이빈 욘손(1974년 수상자)이 추천하면서 결국 수상했다. 만일 올해 노벨문학상을 한강 작가가 아닌,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가 받았다면 어땠을까. 일본의 로비를 의심하는 주장들이 부유(浮遊)하지 않았을까. 의혹과 억측, 그리고 선동은 상대의 가치를 일시적으로 까내릴 수 있겠지만 그래서는 영원히 상대를 이길 수 없다. 정신 승리만 반복할 뿐이다.
2024-10-20 19:26:06
미쉐린가이드에 실리거나 넷플릭스 시리즈 '흑백요리사'에 비견되긴 어렵겠지만 맵싸한 닭개장을 팔던 대구의 한 식당에는 암묵(暗默)적 규칙이 있었다. 손님은 업주가 정해 주는 자리에 앉아야 했다. 2명이 가면 생면부지의 다른 2명과 함께 4인석에 앉아야 했다. 닭개장 국물이 혀에 녹아드는 쾌감을 떠올리면 감내(堪耐)할 만한 규칙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 가면 됐다.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특이한 영업 방식은 손님들의 입길에 오래 오르내렸다. '대전의 명물'로 불리는 빵 가게 성심당이 주인장 마음대로 정해 놓은 규칙에는 '예비맘 할인'이라는 게 있다. 임신부에게 5% 가격 할인과 줄을 서지 않고 입장할 수 있는 혜택 등을 주는 것이다. 오랜 시간 서 있는 게 힘겨운 임신부에 대한 배려이자 공동체 의식이 녹아든 방침으로 풀이된다. 영향력 있는 기업이나 유명인이 사회적 책임을 공유하는 '선한 영향력'으로 권장할 만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난데없이 역차별 논란이 일었다. 기혼 여성에게만 혜택을 주는 게 부당하다는 논리였다. 상대적 약자인 미혼·비혼 여성은 혜택에서 제외됐다는 것이다. "임신부가 벼슬이냐"는 둥, "환자, 어린이, 노인, 장애인에게도 혜택을 주라"는 둥 날이 선 표현들에 불쾌감부터 커진 건 인지상정이다. 제 발로 빵을 사 먹으러 갔다면 그곳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 규칙 준수는커녕 불만 사항으로 점 찍어 불매(不買) 운운하는 막말도 보였다. '프로불편러(Pro+不便+er)'가 따로 없다. 임신부 배려에 불편감을 호소한 이들이라면 어린이·노인·장애인의 입장을 고려했을지도, 진심인지도 의심스럽다. '철딱서니 없는 투정'을 '각박해진 인심'이라 싸잡아 비판하기에 면구스러울 정도다. 올해 우리나라의 합계출산율은 0.7명이 안 될 것으로 관측된다. 여유 부릴 수준이 아니다. 수정란 착상을 인지하면 곧장 임신 2개월이니 성심당이 베푼 특혜도 길어야 7~8개월이다. 이걸 강퍅(剛愎)하게 구는 건 인성 문제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다양성이라는 미명(美名)하에 주의·주장으로 포장된 이기심으로 선악 구분을 시도한다. 임신부 특혜가 불공평하다는 '아무말대잔치'는 강짜를 부리는 걸로 비칠 뿐이다. '예비맘 할인'이 싫으면 성심당을 가지 않으면 된다.
2024-10-14 05:00:00
17, 18세기 유럽 귀족 스포츠 중에 '여우 던지기(Fox tossing)'라는 게 있었다. 말을 타고 스틱으로 공을 쳐 골을 넣는 '폴로(Polo)'처럼 현대까지 이어지진 못했다.(폴로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까지 정식 종목이었다) 여우의 몸통을 손으로 말아 쥐고 멀리 던지는 건 아니었다. 일정 공간에 기다란 천을 깔고 양 끝에 선수들이 서면 여우를 자유롭게 풀어 둔다. 여우가 천 위를 지날 때 양쪽에서 천을 강하게 당기면 여우가 튕겨 올라가는데 높이 올라갈수록 승리에 가까웠다. 승리의 함성이 커질수록 여우의 통성(痛聲)은 커졌다. 낙하 장치는 따로 없었다. 여우의 죽음이 전제였다. 동물보호단체가 봤다면 경(更)을 칠 일이다. 스포츠에 기록의 속성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여우 던지기'의 퇴출은 자연스럽다. 기록이 없다는 건 분석이 불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분석에 일가견(一家見)이 있는 나라가 일본이다. '현미경 야구'라는 훈장 같은 별칭의 일본 프로야구는 매년 자국 출신들이 미국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만큼 높은 수준을 인정받았다. 축구도 그에 못지않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1위로 16강에 진출했던 일본은 2050년 월드컵 개최와 우승을 야심 찬 목표로 내놨다. 2050년까지 ▷선수 커리어 정비 계획 ▷선수·지도자 육성 계획 ▷전술 확립 계획 ▷J리그 클럽 강화 계획 등이 들어 있다. 이른바 'Japan's way' 프로젝트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대한축구협회의 감독 선임 과정이 정부 감사 중간 결과에서 일부 드러났다. 감독 선임 권한은 없지만 권력의 정점에 있는 이가 최종 면접을 맡았다고 한다. 위르겐 클린스만이 감독으로 선임됐을 때 어색한 절차를 축구 팬들은 직감했던 터였다. 선수로 성공했던 이들이 감독으로도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을 사람들이 대한축구협회에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전지적 임명 시점'이라면 모든 것이 쉽게 설명된다. 반대 의견이 나오기 어려웠으리라 짐작된다. 미리 토론하고, 판을 다 정리한 뒤 마지막 단계로 합의 의사를 표현하는 일본의 네마와시(根回し) 문화와도 다르다. 더구나 선임 과정과 관련한 기록이 없다는 건 기본이 안 됐다는 증거다. 구린내가 풍긴다.
2024-10-06 18:44:36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을 해방시킨 노비안검법과 인재 등용을 위한 과거제 도입 등 파격적인 제도 시행으로 역사 교과서에 개혁 군주로 이름을 올린 고려 4대 임금 광종에게는 '그저 빛'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시쳇말로 초반 끗발이 셌다. 그의 재위 27년 동안 개혁적인 측면이 두드러진 것은 초기 10년 동안의 기록이다. 잇단 개혁적 시도는 호족의 기세를 누르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그러나 과유불급(過猶不及)이었다. 왕권 강화를 빌미로 간신들의 참소(譖訴)가 범람했고 억울한 누명도 함께 늘었다. 거짓을 가려야 하니 정적(政敵)보다 먼저 고변(告變)하는 게 상책이었다. 의혹만으로 사람을 잡는 게 고변이었다. 죄가 없는 게 밝혀져도 겨우 목숨만 부지할 정도로 고문당한 탓에 오래 살기 어려웠다. 고려 개국 40년이 채 되지 않은 때였음에도 살아남은 개국공신은 40명 남짓에 불과했다고 한다. 악의적으로 상대를 밟아 뭉개는 변란을 보며 자란 광종의 아들 경종은 전무후무한 윤허를 내린다. 사적 복수를 허용한 '복수법(復讐法)'이다. 광종 집권기 난무한 참소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이들이 복수할 수 있도록 하자는 내용이었다. 무력이 정의 실현의 척도가 되는 약육강식의 지옥문을 국가가 연 셈이었다. 악용하는 사례가 나오지 않는 게 이상했다. 정적 제거에 국법이 긴요하게 쓰였다. 재상(宰相)이던 왕선(王詵)이 왕명(王命)이라며 경종의 삼촌이자 태조의 아들인 천안부원군을 죽이고서야 살육의 광풍이 멎을 수 있었다. 엄연히 법치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21세기 대한민국 정치권도 물리력만 동원하지 않았을 뿐 고려의 복수법 못잖은 보복이 일상이다. 대북 문제 등 국가 안보와 관련된 것이라면 여야를 막론하고 합력하는 분위기가 깨진 지 오래다. 대적관(對敵觀)부터 판이하다. 근래 들어 의견 일치를 본 것은 체육계를 성토한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현안 질의 정도가 유일했다. 합의라는 맹약(盟約)을 깨고도 당당히 대항하는 데 무람없다. 지난달 27일 있은 여당 추천 국가인권위원 선출안 부결 등 일련의 과정이 그랬다. 여야 추천 위원 모두를 통과시키기로 해 놓고 야당은 여당 추천 위원 선출안을 부결시켰다. '사기꾼'이라는 구호가 터졌고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냐"며 격분한 건 수순이었다. 오히려 야당은 "국민의 뒤통수를 때린 사람이 누구냐"며 맞섰다. 그리고 30분쯤 뒤 대통령 재의요구권으로 재표결한 방송 4법, 노란봉투법, 전 국민 25만원 지원법이 부결되자 야당은 항의 집회를 열었다. 무조건적 반대와 다툼이 습관적이다. 공고한 자신들만의 영역 바깥의 의견은 배척 대상이다. 지지 세력의 반응이 뜨거울수록 정치 혐오감도 강해지지만, '토착 왜구 섬멸' 따위의 헛웃음 나는 구호와 깊은 혐오의 표식들이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부유한다. 무고를 엄히 다스리는 형법이 있음에도 국회는 면책특권을 등에 업고 가짜 뉴스 양산의 전진기지가 된다. 음모론이라는 도파민 샤워를 마친 가짜 뉴스는 확증편향의 고속도로를 타고 급속도로 퍼진다. 이래서 될 일이 아니다. 키가 높이 자라는 일부 수종에서는 수관기피(樹冠忌避) 현상을 볼 수 있다. 지도의 경계처럼 금이 가 있는 모습이 거리두기를 하고 있는 듯해 코로나 시국에 인용되기도 했다. 공존을 위한 배려라는 추측이 유력한 설이다. 그래야만 나무의 밑동까지 햇볕이 닿을 수 있다는 것이다.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이면 공멸한다는 걸 식물들도 알고 있다.
2024-09-30 21:53:57
19세기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닭 여인'으로 유명했던 낸시 루스(Nancy Ruce)는 닭에 진심이었다. 반려닭 '에이다 퀴티(Ada Queetie)' '뷰티 린나(Beauty Linna)' 등을 키우며 헌시(獻詩)도 썼다. 1858~1859년 닭들이 죽자 비석을 세울 정도였다. 아이비리그 브라운대 도서관에 작품 일부가 있다고 한다. 반려닭과 찍은 사진과 시집을 판매용으로 내놓기도 했다. 현재도 플라스틱 닭 인형으로 둘러싸인 그의 묘지는 지역 관광 명소라고 한다. 지도자의 반려동물 사랑은 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일본 에도막부의 도쿠가와 츠나요시(徳川綱吉)는 개와 고양이를 묶지 않아도 된다는 것으로 모자라 살생을 금하는 '생류연민령(生類憐憫令)'을 1687년 반포했다. 죽은 개를 장례 치르는 것도 법제화했으니 '이누쇼군(犬將軍)'이라는 별칭이 적확(的確)했다. 미국 백악관에는 특이한 동물을 반려동물로 둔 이들이 있었다. 제30대 대통령 캘빈 쿨리지는 '레베카'라는 이름의 라쿤과 함께했다. 1926년 추수감사절 저녁 식사에 초대해 달라던 지지자가 대통령 가족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쿨리지는 정치적 입지나 결단보다 동물과 관련한 또 하나의 용어인 '쿨리지 효과'로도 이름을 알렸다. 뒤를 이은 허버트 후버 대통령도 '빌리 포섬'이라는 야생주머니쥐를 반려동물로 뒀다. 최근 들어 국내에서 라쿤, 미어캣 등 해외에서 온 야생동물들이 유기(遺棄)된 채 발견된다고 한다. 지난해 말 동물원이 아닌 시설에서 야생동물 전시를 금지하는, 소위 '라쿤카페 금지법'이 시행된 뒤 나타난 부작용으로 풀이된다. 때를 같이해 지난주 '애완동물 보유세 도입 검토'라는 설익은 뉴스가 등장하면서 논쟁의 중심에 섰다. 정부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음에도 찬성 의견이 비등(沸騰)했던 배경에는 반려동물을 키우다 중도 포기하는 이들이 적잖은 탓도 컸다. 양육에 소홀한 부모에게 세금 부담을 늘리자는 논의가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아동의 심리적 불안과 사회적 불안은 비례하기 마련이다. 응당한 본능에 가까워 보이는 양육이 세금을 강제한다고 안착될지 불투명하다. 무책임하게 파양(罷養)하거나, 낳기만 하고 뒤를 감당하지 않으려는 부모도 있는 게 현실이다.
2024-09-29 19:04:57
▶김성완 씨 24일 별세. 태균(연합뉴스 증권부 차장)·태헌(라이나생명보험 인사부 이사) 씨 부친상, 박희영(삼성전자 S.LSI사업부 수석)·김예지(SC제일은행 브랜치채널전략부 팀장) 씨 시부상. 빈소=대구 계산성당. 발인=26일(목) 오전 8시. 장지=경산 가톨릭공원 묘지. 053)254-2300.
2024-09-24 18:58:00
"안녕하세요. 적군 여러분, 별일 없나요? 라디오 도쿄의 '앤'이에요. 이제부터 제로 아우어(Zero hour) 정규 프로그램을 시작할 거예요. 호주와 남태평양에 있는 우리 친구들을 위한, 그러니까 제 말은 우리의 적을 위한 음악, 뉴스 방송 말이에요. 모두 준비되셨나요? 좋아요. 이제 여러분들 사기를 떨어뜨릴 우리의 첫 번째 펀치를 날려 드리죠.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가 연주합니다. 'Strike up the Band' 띄워 드릴게요."(1944년 2월 22일 방송) 태평양전쟁 당시 NHK '라디오 도쿄'에서 방송한 진행자의 멘트다. 대미 심리전 방송이었다. 미국식 영어 발음이 유창한 여성들이 돌아가며 진행했다. '도쿄 로즈'라고 불렸던 이들의 미션은 미군의 사기 저하였다. 방송을 들은 미군들이 본토인 집에 가고 싶도록 만들어야 했다. 6·25전쟁에서도 심리전은 중요했다. 칠곡 전쟁기념관에서 인민군에 뿌려진 전단들을 볼 수 있는데 '재미있는 가정생활을 못 하는 것도 김일성 때문이다'라는 전단에는 퇴근한 가장을 맞는 아내의 모습이 커다란 삽화로 자리 잡고 있다. 목소리나 그림은 심경의 변화에 불을 지필 수 있었다. 상상(想像)이 동기 부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최근 북한의 심리전 전략이 크게 바뀐 듯하다. 이념적 우월성을 자랑하던 대남 방송이 아니다. 사이렌, 북·장구 소리 등 소음을 확성기로 내보낸다. 군인들도 고생이지만 강화도 등 서해 지역 주민들이 고충을 겪는다고 한다. 대북 심리전 방송으로 K-팝을 틀었다면 북한의 대중가요인 '휘파람'(이것도 1990년대 노래다) 같은 노래들을 틀어 주길 바란 건 욕심이다. 대북 확성기 방송의 동태복수(同態復讐)로 보이는데 확성기 이용만 동류항으로 엮을 수 있을 뿐이다. 너희들이 쓰레기를 보냈으니 우리도 쓰레기를 보낸다며 인분을 넣어 보낸 것도 괴상망측했다. 문화적 풍모나 생물학적 본능에 끌려 제 발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설 수 없다. 빈약한 대응에 결핍이 전해진다. 전쟁터에서 기사도(騎士道) 같은 공정한 싸움 규칙을 기대하는 건 낭만에 가깝고,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해 이기는 게 전쟁의 속성이라지만 우리의 문화적 역량이 압도적 비대칭 전력으로 자리 잡았음을 북한군이 잘 알려 준다.
2024-09-23 05:00:00
3일 개관한 대구 간송미술관의 전시 유물 중에 단원 김홍도의 '마상청앵(馬上聽鶯)'이 있다. '말 위에서 꾀꼬리 소리를 듣다'는 제목처럼 말과 꾀꼬리가 그림에 들어가 있다. 다만 말의 존재감은 크지 않다. 특유의 근육이 돋보이기는커녕 평안한 풍경을 채우는 조연에 그친다. 17세기 바로크 시대 유럽 귀족 일부는 애완견을 초상화에 함께 남겼다.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니 애민 정신은 말할 것도 없다는 표시로 풀이한다. 말을 대동한 이들도 있다. 자크 루이 다비드 작 '알프스를 넘는 보나파르트'의 나폴레옹이다. 심한 포샵이 지적되지만 여기서 말은 엄연한 '신스틸러'다. 주인의 강인한 풍모 연출에 일조한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말 사랑도 대단하다. 2022년 공개된 속칭 '승마 질주 영상'에서 그가 탄 백마는 백두혈통의 상징이라고 한다. 오죽하면 대형 홍수로 인민들이 고초를 겪던 지난달 25일 러시아에서 오를로프 트로터 품종 말 24마리를 받았을까. 자력 수해 복구를 고집하며 국제사회 지원을 극구 거절했지만 백마는 포기하지 않았다. 조너선 스위프트의 1753년 작 '걸리버 여행기'에서 마지막으로 소개된 나라는 '후이늠의 나라'다. 완전한 창조물인 후이늠은 말의 형상을 한 지배층이다. 이들의 언어에는 거짓말이나 허위(虛僞)라는 표현이 없다. 악한 것에 대한 관념이나 생각이 없다. 누가 선(善)인지 악다구니 쓰며 다투는 일도 자연히 없다. 이들이 운송 수단으로 활용하며 부리는 동물 중에 '야후(Yahoo)'라는 존재가 있다. 꼬리가 없고, 엉덩이 등을 제외하면 털로 수북한데 영락없는 인간의 몰골이다. 떼로 몰려와 걸리버를 공격할 때는 배설물을 뿜어 악취를 풍긴다. 3년 정도 후이늠의 나라에 머물며 그들의 이성과 겸손에 반한 걸리버는 고향으로 돌아가길 꺼린다. 야후 같은 우매(愚昧)한 무리들이 이끄는 정치가 떠오른 탓이다. 반복해서 황당한 주장을 내뱉는 일군의 무리들이 겹친다. 6·25전쟁 때 우리 군이 38선을 넘은 날이 기원인 '국군의 날'을 임시공휴일로 정한 게 조선총독부를 기리는 친일 행각이라는 허무맹랑한 주장에 기함(氣陷)한다. 숭일(崇日) 낙인을 찍으며 막말을 배설하는 이도 한둘이 아니다. 최신판 '걸리버 여행기'에는 한국식 민주주의가 등장할 것만 같다.
2024-09-08 19:18:54
프랑스 철학자 미셸푸코는 저서 '광기의 역사'에서 "고전주의 시대에는 영국인들의 우울증을 해양성 기후의 영향"이라 설명했다. 추위, 높은 습도, 불안정한 날씨 등이 섬나라 사람들의 상태와 관련 있다는 것이다. 음습(陰濕)한 여러 요인들이 인체의 관(管)과 힘줄에 배어들어 유약하게 만든다는 주장이다. 동양에서는 물을 긍정적으로 풀이한다. 주역에서 물은 재물 운, 출세 운을 뜻한다고 한다. 사주에 물의 기운이 적거나 약한 이들은 물이 많은 곳이나 잘 보이는 곳에 사는 게 좋다고 한다. 아예 이름을 지을 때 삼수 변(⺡)이 붙은 한자를 넣어 균형을 맞춘다고도 한다. 기(氣)를 중요시하는 한의사 중 일부는 물 마시는 방식도 허투루 쓰지 않는다. 온수를 먼저 붓고 냉수를 나중에 부어 대류(對流) 현상을 몸의 순환을 돕는 데 쓴다는 주장이다. 한의학은 중세 일본에 영향을 미쳤다. 일본은 특히 1613년 발간된 '동의보감'에 관심이 컸다.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는 인삼을 직접 일본에서 재배하는 꿈을 꿨다고 한다. 동의보감을 평생 곁에 두고 살았을 만큼이었는데 일본에서는 인삼이 죽어 가는 사람도 살릴 수 있다는 명약으로 알려진 탓이었다. 조선의 의술이 일본에 무시당하는 때는 18세기 중반부터다. 1763년 11차 조선통신사의 일원이던 침의(鍼醫) 남두민이 일본 의사 기타야마 쇼와 만나 필담(筆談)할 때였다. 쇼가 1759년 나온 해부학 서적 '장지(藏志)'에 대해 설명하자 남두민은 "갈라서 아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하는 짓이고, 가르지 않고도 아는 것은 성인만이 할 수 있으니 미혹되지 말라"고 꾸짖었다. 통신사로 함께 갔던 김인겸은 정반대로 일본을 봤다. 그는 '일동장유가'에 "북경의 번영도 오사카에는 진다. 짐승과 같은 인간들이 2천 년 동안 이렇게 평화롭게 번영하고 있었다니 원망스럽다"고 남겼다. 지역 대학을 선별해 정부가 5년 동안 1천억원을 지원하는 '글로컬대학 30'에 대구한의대가 뽑혔다. 'K-메디(MEDI) 실크로드 개척'이라는 비전을 내세웠다. '한의학의 세계화'를 승부수로 던진 것인데 한의예과가 있는 대학들 중에서도 독특한 콘셉트다. 한의학 융성(隆盛)의 기운을 한껏 담아 야심 찬 포부를 실현하길 기대한다.
2024-09-01 22:06:30
17세에 불과한, 선조의 서손(庶孫)이자 인조의 동생인, 능창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가 있다는 의심이 인 건 1615년(광해군 7년)이었다. 역모 혐의의 증거는 점(占)이었다. "윤길이 명운(命運)을 잘 점치는데 일찍이 능창군의 녹명(祿命)은 40년간 치평(治平)의 군주가 될 명운이라고 하였다. (중략) 왕은 평소 능창군의 모습이 범상치 않다는 말을 들어온 데다 능창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사저에 왕기(王氣)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으로 항상 의심해 왔다."(광해군일기) 고변은 여러 죽음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생때같은 아들이 죽자 정원군도 몇 년 뒤 마흔도 안 돼 죽는다. 동생이 역모로, 아버지가 충격으로 죽자 능양군(인조)이 움직인 건 인지상정. 팩트가 부족한 '킹리적 갓심'과 같은 점괘를 근거로 한 의심과 질시는 반정으로 귀결됐다. 1980년대는 반미 구호가 넘쳐 났다. 분단도 미국에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승만이 남한 단독정부를 세워 분단을 고착화했다는 것인데 스탈린의 비밀 지령문이 나오면서 헛소리가 됐다.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1993년 2월 '스탈린이 1945년 9월 20일 소련이 점령한 북한 지역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할 것을 지령했다'라는 지령문을 번역해 보도했다. 맥아더가 미국 중심 반공 질서 구축을 목적으로 이승만을 앞세웠다는 주장도 비슷하다. 86세대의 '이념 교재'로 불린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에 실린 내용이다. 그러나 미국 국무부 실력자이자 GRU(소련군 정찰총국) 스파이였던 엘저 히스의 공작(工作)이 1995년 7월 미국 정부가 공개한 베노나(Venona) 문서에서 드러나며 전환점을 맞는다. 국가안보국(NSA)이 1942~1946년 소련의 전문(電文)을 감청, 해독(解讀)한 것들이다. 그럼에도 히스는 '매카시즘의 희생자' '냉전시대의 희생양'이라고 반박했다. 소련 간첩이었다가 전향해 히스가 스파이였음을 폭로한 휘태커 체임버스는 "그야말로 공산주의자들이 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죽는 순간까지도 공산주의자임을 부정해 세상을 속이는 게 상투적인 수법이라는 것이다. 2022년 이른바 '청담동 술자리 의혹'의 발단이 된 첼리스트가 "의혹 자체가 허구"라고 법정에서 증언했다. 친민주당 계열 유튜버가 의혹을 보도하고, 김의겸 당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정감사에서 언급한 사건이다. 황당한 것은 관심법(觀心法)도 쓴다는 점이다. "태어나서 한 번도 그분들(윤석열, 한동훈)을 직접 본 적이 없다"고 하니 '외압이나 협박을 받아 첼리스트가 말을 바꾼 것'이라 맞섰다. 과학적 증거도 가볍게 무시한다. 후쿠시마 오염수에서 방사능이 검출되지 않았다는 결과에 "1년밖에 안 됐기 때문"이라고 반박한다. 4~5년은 있어야 알 수 있다고 한다. 2016년 사드 미사일 배치로 성주에서 생산되는 참외가 전자파 범벅이 될 것이라던 의혹은 10년쯤 되니 잠잠하다. 현역 국회의원이 근래에 내놓는 '계엄령 선포설'도 기가 막힌다. 군과 경찰 등 공권력 실세를 충암고 출신으로 채워 계엄령 선포를 용이하게 만들었다고 꿰맞춘다. 이태원 참사에도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을 결코 바꾸지 않은 이유라고 한다. 여인형 방첩사령관도 충암고 출신임을 덧붙인다. 헌법에 정해진 계엄령 요건이 있는데 이래도 되는 건지 의아하다. 지속적으로 의혹을 제기하며 사는 게 '깨어 있는 시민(깨시민)'의 덕목이라면 '의심병 환자'급은 돼야 할 판이다.
2024-08-26 20:14:34
"자 지금부터 받아쓰기 시간이에요/ 선생님의 말씀에 내 가슴은 콩닥콩닥 뛴다/ 1번 밥을 짓다/ 2번 개가 짖다/ 3번 안개가 짙다/ 아이고 선생님요 뭐가 다 짓니껴… 한 글자로 다 같이 쓰면 안되니껴." 안동 마리스타학교 권남조 학생이 '짓다 짖다 짙다'라는 시화로 전국 성인문해교육 시화전에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상을 받았다. 대통령상이 없으니 1등 상(賞)이다. 전국에서 1만8천937명이 참여했다. 백분위로 환산하자면 상위 0.005%다. 학교 다닐 때도 받아 보지 못한, 아니 학교를 다니지 못해 받을 수 없었던 상이다. 40대 딸의 손을 잡고 2022년 한글을 배우겠다며 처음 마리스타학교에 온 그는 올해 예순아홉이다. 성인문해교육 시화전에 참여한 이들이 내놓은 시화는 수기(手記) 그대로다. 글자체를 정제해 출간하는 시집과 다르다. 삐뚤빼뚤하다. 진정성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살아온 세월이 손에서 펜으로 전해져 시화에 남는다. 서러웠던 지난 시간이 보는 이의 눈에 울컥 들어온다. 쉬운 시어임에도 단박에 안다. 눈물이 맺히나 싶더니 뚝 떨어지고 이내 엉엉 운다. '자동 눈물 버튼'이다. 기자의 사심(私心)으로는 매일신문이 매년 7월 여는 시니어문학상에 시화전 부문도 포함하자고 우기고 싶다. 예술 작품을 보고 들으며 공감한다는 건 그 감정을 알 만큼 살았다는 뜻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작품을 더 잘 감상할 수 있는 능력치가 내게 생긴 게 아니다. 잘 표현하는 재주가 그들에게 있는 걸 이제야 안다. 노인을 살아 있는 도서관이라지 않는가. 세네갈에서는 노인의 죽음을 예의 바르게 표현할 때 "그 사람의 도서관이 불탔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비문해(非文解) 성인 비율은 4% 정도라고 한다. 특히 70대의 7명 중 1명이 이에 해당된다. 말로만 자신의 생각과 심정을 표현하던 이들이 70년 만에 글로 표현한 느낌이 어땠을지 상상한다. 분명 새로운 세상이 열렸으리라. 늦깎이의 그림, 음악 도전도 이와 같을 것이다. 욕심을 더 내면 만학도(晩學徒) 전형으로 대학도 갈 수 있는 시대다. 살아온 날이 남은 날보다 많다는 그들이지만 팔팔한 88학번보다, 산소 같은 02학번보다 더 젊어진 그들을 본다. 저물어 가는 생(生)을 정리하는 때가 아니다. 생의 목표가 하나씩 더 생기는 때다.
2024-08-25 18:26:04
1980년대까지 시골 구석구석을 돌던 서커스단은 만병통치약을 팔러 다니는 약장수였다. 다짜고짜 약을 팔려 들면 사람들이 모이질 않으니 무료 서커스 정도는 보여 줘야 했다. 텔레비전 보급률도 낮아 무료(無聊)했던 시골에서 서커스는 진귀한 볼거리였다. 서커스단에는 왜소증 환자가 끼어 있곤 했다. 일반인과 다름없이 다니는 것도 신기한데 묘기까지 펼치니 절로 박수를 끌어내는 건 당연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에는 왜소증이 있는 광대를 '요술을 부리는 난쟁이'라며 '주유(侏儒)'라 칭했다고 한다. 조선의 폭군 연산군도 연회 때마다 주유를 불러 재롱을 떨게 했다고 한다. 서양에서도 비슷했는데 왜소증 환자를 '인간 장난감'처럼 취급했다. 스페인 궁정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작품 속 그들은 왕족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그림의 배경이나 도구처럼 인식된다. 인간을 도구로 인식하기 시작하면 구분을 두게 된다. 1903년 오사카에서 열린 내국권업박람회(内國勸業博覽會)에 아이누인, 류큐인, 대만인 등 인종 표본을 전시했는데 여기에 조선인도 포함돼 있었다. 이 와중에 중국은 대만 현지인과 같이 전시되는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며 항의했다고 한다. 1907년 도쿄에서 열린 내국권업박람회에서도 인종 전시는 이어졌다. '학술인류관'에 상투 튼 남성과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성이 있었다. 조선을 바라본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의 눈도 다르지 않았다. 그의 풍속 사진 엽서는 인종적 차이를 확인하려는 목적이 확연했다. 여러 인물을 세워 두고 옆모습, 뒷모습 등을 다각적으로 찍었다. 말이 '조선 풍속 탐구'였지 인류학적 기록에 가까웠다. 일제가 조선인과 중국인을 자신들과 같은 인류로 인식한 지점은 '생체실험'이었다. 장기를 제거하거나 동물의 내장과 교체하는 실험도 마다치 않았다. 이를 자행했던 731부대 소년병 출신 시미즈 히데오(93) 씨가 79년 만에 중국 하얼빈 만행 현장을 찾아 참회했다고 한다. "수년 동안 손주를 볼 때마다 영유아 표본이 떠올랐고 고통과 죄책감을 느꼈다"고 했다. 일본 정부 차원의 인정과 인류애적 반성은 아직 없다. 원자폭탄 피해일인 8월 6일과 9일에만 '보편적 인류애' 절감 스위치가 작동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2024-08-18 19:17:55
프랑스는 파리 올림픽을 의미 있게 보여 주고 싶었을 것이다. 100년 만에 다시 치르는 올림픽이었으니 말이다. 이들이 선택한 구호는 '친환경 올림픽'이었다. 그런데 '약간' 문제가 생겼다. 친환경 올림픽의 대의를 위해 '약간'의 불편은 선수들이 감내해야 하는 걸로 강요됐다는 점이다. 체감온도 38℃의 날씨에도 창문을 열면 자연풍으로 버틸 만한, 벌레가 '약간' 들어오지만 친환경적이니 용인할 만한, 숙소 여건과 식성에 따라 '약간' 불만족스럽더라도 육류를 줄여 탄소 배출 감소에 기여하니 바람직한 선수촌 음식 메뉴 같은 것들 말이다. 센강(Seine江)에서 벌이는 여러 퍼포먼스도 '친환경 올림픽'이라는 구호를 충실히 이행한다는 대외적 홍보 효과를 위해 포기하기 어려운 상징물이었던 듯하다. 이전 올림픽과 다른 개회식 진행으로 문화적 우월성을 뽐낼 수 있고, 독자적 차별성을 은근히 드러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 말이다. 스타디움을 벗어난 개회식 퍼레이드가, 그것도 강 위에서 열린 건 사상 최초였다. 뭔가 기발한 아이디어에 강박감을 갖게 되면 무리수를 두게 된다. 트라이애슬론과 마라톤수영 등의 종목을 센강에서 소화할 수 있으리라는 상상을 현실로 구현한 게 그랬다. 100년 만에 시도된 센강 수영은 파리 올림픽의 여러 티 중 하나로 기억될 듯하다. 트라이애슬론 선수들이 받아들여야 할 숙명(宿命) 중 하나가 수질 평가단 역할이라지만( 1.5㎞ 수영에서, 영법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정량의 물을 마실 수밖에 없어 물맛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소량의 물을 맛보는 선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탈이 나 경기를 포기하고 싶을 만큼이었다. 센강은 플라스틱 병에 든 와인을 플라스틱 잔에 따라 마시며 노을을 보면서 '물멍(물을 보며 멍하게 있는 것)'하기 좋은 명소로 두면 좋았을 것을 무슨 자신감으로 이렇게까지 했는지 해량(海諒)하기가 어렵다. '이러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낭만적 상상은 재앙이 될 수 있다. 수영하는 데 무리 없는 강이라는 이미지까지 착근되길 바랐다면 몇 번의 퍼포먼스로는 부족하다. '친환경 올림픽'을 주입하려 했던 노고(勞苦)가 경기 직후 구토부터 하는 선수들과 이를 지켜본 세계인들에게 인정받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2024-08-11 17:58:59
조해진 작가의 소설 '로기완을 만났다'의 주인공 로기완은 탈북민이다. 어머니와 함께 중국으로 탈출했다 사고로 어머니를 잃고 혈혈단신 벨기에로 향해 살아남으려 애쓴다. 송환은 어머니의 죽음을 헛되이 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영국에 정착하며 해피엔딩을 맞지만 대한민국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알려 주지 않는다. 그 답을 우리 국회가 잘 알려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불어민주당 최민희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장이 지난달 29일 국민의힘 박충권 의원에게 "전체주의 국가에서 생활하다 보니 민주주의적 원칙이 안 보이냐"는 극언(極言)을 했다.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나온 말이었다. 최 위원장은 이 후보자에게 "뇌 구조에 문제가 있다"고 무안을 주는 등 잦은 막말로 지탄(指彈)받던 터였다. 박 의원이 "한 인간에 대한 심각한 인신공격, 명예훼손, 집단 공격 인민재판이 아닌가"라고 하자 반발하며 뱉은 말이었다. 박 의원은 2009년 탈북해 현대제철 책임연구원으로 일하다 국민의힘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됐다. 논란이 커지자 최 위원장은 사과하며 속기록에서 발언을 지워 달라 요청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3만 명이 넘는 '로기완들'은 치욕적인 공포감을 느껴야 했다. 탈북민을 대하는 민주당 의원들의 차별과 무시는 적개심(敵愾心)에 가깝다. 1989년 전대협 대표로 평양에 갔던 임수경 씨는 2012년 민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된 뒤 탈북 대학생에게 '변절자'라 했다. 탈북 외교관 출신 태영호 의원에게 '쓰레기' '부역자', 심지어 '빨갱이'라 외친 것도 민주당 의원들이었다. 북한 인권 실태를 조사하고 인도적 지원 등에 대해 연구하고 정책을 개발하자는 북한인권재단 출범도 8년 가까이 표류 중이다. 12명의 재단 이사 중 10명을 여야가 5명씩 추천하도록 했지만 민주당은 추천을 미뤄 왔다. 근거법인 북한인권법이 2016년 3월 통과된 직후 치러진 총선부터 국회 원내 1당을 거머쥔 민주당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국회의장이 민주당에 이사 추천을 촉구해 절차를 조속히 완료하도록 해야 한다"는 권고안을 의결한 게 지난해 9월이었다. 민주당은 꿈쩍도 않는다. 북한 지도부와 환담하며 한민족이라 목청을 높이다 북한 주민 인권 이야기에는 입을 꾹 다문다. 괴상(怪常)하다.
2024-08-05 00: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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