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29> 1970년대 초 금호강 모래 채취
1972년 11월 늦가을 대구시 북구 팔달교 상류 금호강. 해가 짧아져 강물도 차가운데 물장화에 빵모자, 수건을 두른 마부들은 연신 물속으로 말고삐를 다잡았습니다. 강기슭 모래는 벌써부터 다 파먹고 동이 나 멀리 더 멀리 바퀴가 잠기도록 말을 몰았습니다. 모래를 퍼 나르는 말달구지는 어림잡아 10여 대. 한 바리 할 때마다 품값을 쳐주니 마부들의 등살에 조랑말은 숨 돌릴 새가 없습니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하천마다 지천으로 널려 아이들이 두꺼비집이나 짓던 모래가 때를 만났습니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이 무렵, 사리(沙利) 즉 모래와 자갈은 필수 건축재. 다리를 놓고 주택을 개량하고 공장을 짓는데 철근, 시멘트가 아무리 귀하다 해도 모래 없이 되는 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천마다 이렇게 모래를 긁느라 야단이었습니다. 그 중에도 모래 채취 최적지는 금호강. 비만 오면 헐벗은 산등에서 미끄러진 토사가 샛강을 타고 흘러들었습니다. 자호·고촌·신령천(영천), 청통·오목·남천(경산), 불로·동화·팔거천(대구)을 지나 이곳에서 수북이 백사장을 이뤘습니다. 영천에서부터 경산, 대구 팔달교에 이르는 구간은 실어내는 길도 좋아 그야말로 노다지였습니다. 약삭빠른 업자들은 앉은 자리에서 권리금까지 붙인 채취권을 되팔아 삽 한번 뜨지 않고 큰 돈을 만졌습니다. 바가지를 쓴 영세업자들은 본전을 찾겠다고 애꿎은 인부들의 노임을 후렸습니다. 얼마나 퍼냈는지 표도 잘 안나 허가량을 속이는 건 일도 아니었습니다. 퍼 담으면 모두 돈이어서 갈수기 땐 강바닥까지 트럭을 들이밀고 실어 날랐습니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1970년 7월 7일 준공) 공사가 한창이던 무렵엔 없어서 못팔았습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공사 시즌에는 '모래'가 아니라 '금싸라기'였습니다. 급기야 당국은 고속도로 공사장 2km 내에서는 고속도로 공사용 외엔 사리 채취를 못하게 했습니다. 그 후에도 사리 채취는 각급 도로 공사가 우선. 단 새마을 가꾸기, 교실 증축용 만큼은 예외였습니다. 새마을 운동에다 각종 공사로 사리 수요가 폭증한 1971년 2월, 경북 도내 대부분의 하천 바닥이 기준 이하로 낮아져 빨간불이 켜졌습니다. 일부 업자들은 홍수에 떠밀려 개인 소유 밭에 쌓인 자갈까지 쓸어갔습니다. 눈을 피해 밤중에 라이트를 끈 채 하천을 드나드는 일도 다반사. 금호대교, 무태 잠수교 주변에선 허가량 보다 무려 다섯 배나 더 파냈습니다. 이 때문에 홍수기엔 제방이 힘을 잃고 잠수교 다리는 맥 없이 주저앉았습니다. 군데 군데 웅덩이가 생겨 멱감던 아이들이 변을 당하는 일도 잦았습니다. 1972년 대구 8km 구간 금호강에 설치된 위험 표지판은 33개. 모래 채취로 웅덩이 위치가 수시로 바껴 이 마저도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1973년 9월부터는 금호강 팔달교 일대에서 칠곡 지천까지 모래 채취가 전면 금지됐습니다. 강바닥을 너무 긁어 팔달교 교각이 붕괴 위험에 처한 때문이었습니다. 모래 운송이 손쉬워 무태·조야·노곡·팔달교 언저리를 맴돌던 채취꾼들은 점점 더 아래로, 1981년 6월엔 달성군 다사면(읍) 금호강 끝단까지 밀려났습니다. 1980년 12월 영천댐 준공, 1981년 공산댐 완공…. 산림도 우거지고 모래길도 끊긴 지 오래. 금호강 백사장은 점점 자갈밭으로 변해갔습니다. 산업화가 한창이던 그 무렵, 논밭을 적셔주고 공업용수, 식수에다 모래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던 금호강. 금호강은 오늘의 대구를, 경북을 키워낸 어머니였습니다.
2024-11-22 05:30:00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28> 1968년 동대구 개발 신호탄, 동대구역 건설
"현 역사(驛舍) 동대구로 이전" 1967년 11월 12일, 극비의 '대대구 건설' 청사진이 베일을 벗었습니다. 핵심은 1968년 말 준공 목표로, 화물역으로 건설중인 동대구역을 여객전용으로 바꾼다는 것. 이에 따라 1969년 새해부터는 동대구역에서 여객업무를 보고, 대구역은 화물만 취급하다 평리동에 화물 전용역 신설 후 아예 문을 닫기로 했습니다. '철도는 남북 분할, 신천은 동서 분할'. 여객용 동대구역 건설은 대구 시가를 동쪽으로 확장하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인구는 느는데 도심은 비좁아 중앙통(로)을 넓히려다 내린 결단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황무지나 다름없던 구릉지 신천·신암·효목동은 새로운 황금시대로, 개발에 포함된 수성·범어·만촌 들판마저 땅값이 들썩했습니다. 1년이 지난 1968년 12월 25일, 하늘에서 본 동대구역사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여객 업무를 볼 새해가 코앞인데 역사 본관은 아직도 골조 공사. 주택과 상업지구를 겸한다는 신천동은 허허벌판. 논밭 사이로 낸 도로는 먼지가 풀풀 날렸습니다. 1966년 7월 16일 동대구역 기공식을 하고도 기반 공사가 늦어져 지난 6월 25일에서야 역 본관을 착공했으니 연말 준공은 누가 봐도 역부족. 새해부터 이곳에서 기차타기는 다 틀렸습니다. 그해 12월 27일 밤, 철도청은 부랴부랴 동대구역장에게 '영업개시 보류'를 통보하고 대합실에 내건 열차 시간표도 뜯게 했습니다. 1층 만이라도 완공해 새해엔 틀림없이 업무를 보겠다던 약속은 결국 헛말이 됐습니다. 설상가상으로 29일엔 받침대가 틀어져 공사중인 본관 2층 옥상 슬라브가 무너지고, 강추위로 공사마저 중단돼 '동대구역 시무(始務)'는 해를 넘기고도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돌아간 건 다 돈 때문이었습니다. '대대구 건설'을 지원하겠다던 정부 공약은 번번이 예산에서 제외됐습니다. 1967년 상반기에 착수키로 한 동서관통로(현 달구벌대로), 1968년 말까지 계획한 제3공단 조성도 지지부진. 1968년 4월에 첫 삽을 뜨려 했던 신천 동부지구·신암지구 구획정리는 5개월이 지나도록 손도 못 댔습니다. 시장, 부시장, 국회의원들은 안달났습니다. 정치적 고향 대구를 음양으로 지원했던 박정희 대통령도 도리 없었습니다. 이유는 제2차(1967~1971)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3년 반 만에 끝내자는 통에 이쪽이 더 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할 일이 태산인데 돈줄이 막혀 신문 지상엔 '대대구 건설 휴지화'란 탄식이 쏟아졌습니다. 대구시는 시유지인 서문시장과 교동시장을 민간에 팔기로 했습니다. 서문시장은 1만2천1백55평 중 도로를 뺀 8천평(26,446㎡), 교동시장은 4백56평 가운데 3백평(992㎡). 이렇게 해서 마련한 55억원을 대대구 개발에 쓰기로 했습니다. 1969년 6월 9일, 우여곡절 끝에 동대구역이 준공돼 이날 오후 3시 역 광장에서 시무식이 열렸습니다. 구경 나온 시민들이 1만여 명. 넓은 광장이 명절처럼 붐볐습니다. 10일 0시 46분, 한밤 적막을 뚫고 동대구역에 첫 기적이 울렸습니다. 연한 마찰음을 내며 도착한 열차는 부산발 서울행 보통급행 '은하'호 였습니다. 〈strong〉( 매일신문 1966년 2월 18일~1969년 6월 11일 자)〈/strong〉 동대구엔 신도시, 서대구엔 제2공단(성서), 남대구엔 두류산 종합대공원, 북대구엔 제3공단…. 강계원 시장(1964.1~1966.5)이 설계하고 태종학 시장(1966.5~1969.10)이 불도저처럼 밀어붙였던 대대구 건설. 동서관통로 공사가 늦어지면서 제2공단 건설은 보류됐지만 동대구역은 청석받이 구릉지 신천 동부를 신시가로 탈바꿈 시킨 일등공신이었습니다.
2024-11-08 05:30:00
(사)대구서부범죄피해자지원센터, 지역문화 탐방행사 가져
(사)대구서부범죄피해자지원센터는 지난 2일 심기봉 이사장을 비롯한 센터 임원, 대구지검 서부지청 서제원 피해자 전담 검사, 회원, 피해자 가족 등 89명이 참가한 가운데 경주, 울산 지역 문화유적을 둘러보는 제5회 누리보듬과 함께하는 지역문화탐방 행사를 가졌다. 대구서부범죄피해자지원센터는 2007년 법무부 승인 후 창설된 비영리 공익법인으로, 대구시 서구·달서구, 달성군 및 경북 성주·고령 내 범죄 피해자와 가족들의 피해 회복을 위한 다양한 봉사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24-11-06 18:14:18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27> 1963년 군인에서 대통령으로 고향 찾은 박정희
1963년 10월 18일, 대구관광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은 박정희 대통령 당선자는 곧장 구미로 향했습니다. 15일 실시된 제5대 대선에서 개표 초반부터 여지없이 밀리다 16일 새벽이 돼서야 경상·전라·제주에서 나온 몰표로 막판 뒤집기. 15만6천26표 차, 기적같이 윤보선 후보를 누른 벅찬 가슴으로 맨 먼저 고향으로 달렸습니다. 오전 10시 20분, 세단 승용차로 도착한 고향 상모리엔 벌써부터 말끔히 차려 입은 100여 동민이 마을 어귀까지 마중을 나왔습니다. "평안하셨습니까?" "아주머니 안녕하셨어요?" 박 대통령은 이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청해 안부를 묻고는 뒷산 선영(先塋)으로 향했습니다. 상모리 생가에서 선영까지는 1.5km. 비탈길을 구두에 넥타이 차림 그대로 올랐습니다. 양장을 곱게 입은 육영수 여사도 코고무신으로 뒤를 따랐습니다. 논두렁엔 알이 꽉 찬 벼이삭, 산자락엔 흐드러진 들국화. 선거전이 워낙 치열해 이 가을에 이렇게 금의환향(錦衣還鄕)하리라곤 꿈에도 몰랐습니다. 선영은 좌판도 비석도 없이 초라한 그대로. 제물은 통닭 한 마리에 밤, 대추, 탁주가 전부. 박 대통령은 무릎 꿇어 술 한 잔으로 당선을 고했습니다. 다소곳이 지켜보던 육 여사도 며느리에서 이젠 국모(國母)로 큰절을 올렸습니다. 성묘를 마친 박 대통령 내외는 뒤돌아 고향 산천을 한참 내려다 봤습니다.〈strong〉(매일신문 1963년 10월 18, 19일 자)〈/strong〉 헐벗은 민둥산, 그 자락으로 구불구불한 논두렁. 옹기종기 앉은 마을은 전봇대도 없는 온통 초가집. 문명이라곤 희미하게 들판을 가로지른 한 줄 경부선 철길 뿐. 1963년 이곳은 여전히 가난한 농촌이었습니다. 저 들판에 가뭄이, 아니면 홍수로 탁류가 무시로 들이쳐 보릿고개를 넘고 또 넘던 유년의 고향, 딱 그대로였습니다. 돌아보면 참 격랑의 세월. 이곳에서 대구사범학교로, 문경에서 교편도 잠시. 만주국 군관학교에서부터 줄곧 군인의 길을 걷다가 무능한 정치, 부패를 보다 못해 민생고를 내손으로 해결하겠다며 유서까지 써 놓고 '군사혁명' 이름으로 정치판에 뛰어든 군정(軍政) 2년 3개월. 이제 떳떳하게 대통령에 올라보니 눈앞엔 모든 게 산더미. 성묫길 내내 사진 속 그의 얼굴엔 말이 없었습니다. 두 달 뒤인 12월 17일, 대통령 취임식으로 제3공화국이 시작됐습니다. 이날은 한국 정치사에 큰 전환점이었습니다. 4·19혁명으로 들어선 제2공화국의 의원내각제는 5·16 군사 쿠데타로 11개월 만에 종지부. 헌법을 바꿔 권력은 의회에서 다시 행정부로, 그것도 이승만의 자유당 시절보다 더 힘이 센 강력한 대통령 시대를 예고했습니다. 박 대통령의 당면 과제는 재건을 넘어 조국 근대화. 가는 곳 마다 큼직하게 쓴 '증산·수출·건설'이 눈앞을 따라다녔습니다. 증산은 경지정리·다단계 개간으로, 수출은 구로(서울)·사상(부산)·제3공단(대구) 조성으로, 건설에는 무엇보다 철강이 필수라며 포항 모래벌에 제철소를 꿈꾼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가난을 벗어보자는 주름진 농민들, 동생 학비를 벌겠다며 공장을 돌리던 여공(女工)들, 가족들이 눈에 밟혀 밤낮을 모르던 산업 일꾼들…. 박 대통령 뒤에는 이렇게 야무진 원군이 있었습니다. 묵묵히 구슬을 꿰, 기어이 헐벗은 강산을 옥토로 바꾸었던 3천만 국민이 있었습니다. 모두 우리의 아버지·어머니, 형님·누이들이었습니다.
2024-10-25 05:30:00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26> 1967년, 1970년 두 번 열린 포항종합제철 기공식
1967년 10월 3일 오후 2시 경북 영일군 대송면 동촌동(현 포항시 남구). 푸른 파도 철썩이는 바닷가에서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오늘은 벼르고 벼르던 영포지구종합제철공업단지 기공식 날. 두루마기 촌로, 양복을 빼입은 신사, 교복 차림의 학생, 까까머리 꼬마까지 줄 잡아 10만 인파.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 모였습니다. 포항 거리마다 청사초롱, 만국기가 나부끼고 새벽부터 100여 대의 버스·승합택시·트럭이 지방민들을 실어 날랐습니다. 트럭 짐칸도 못 얻어 탄 주민들은 먼지가 풀풀 나는 비포장길을 하염없이 걸으면서도 "선거 때 찍은 내 한 표는 되찾았다"며 저마다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철강공업이 없는 산업발전은 '제발로 서지 못하는 문어'. 각고의 노력으로 1966년 12월 6일 미국 피츠버그에서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이 발족되고, 우여곡절 끝에 이들이 빌려주기로 한 외자 1억불과 내자 151억8천100만원으로 건설하게 된 연간 60만톤의 철강 생산기지. 당초 기공식은 1일로 예정됐으나 국군의 날과 겹쳐 개천절 공휴일인 이날로 택해 더 많은 인파가 몰렸습니다. 해병대 주악으로 시작된 식은 건설부의 사업 설명, 내빈들의 일장연설, 여고생들의 전진의 노래에 이어 기공을 알리는 발파음에 오색 풍선이 창공을 수놓으며 끝이 났습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40분 남짓. '동양 최대 공장 건설'이란 소문에 잔뜩 기대하고 왔건만 여흥을 풀 행사도 없이 싱겁게 끝났습니다. 우천으로 연기된 국군의 날 행사가 이날 열린 바람에 박정희 대통령 얼굴은 구경도 못했습니다. 대신 참석한 장기영 부총리는 전날 내각개편으로 경질돼 하필 이날이 퇴진하는 날. 장 부총리마저 밋밋하게 치사를 끝내고는 식 도중 총총걸음으로 퇴장하자 그만 잔치판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볼 것도, 먹을 것도 없어 김빠진 기공식. 우르르 돌아가는 길만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기공식은 그렇다 쳐도 문제는 그 다음. 이듬해 4월 1일, (주)포항종합제철이 창립되고 제철소의 꿈을 한창 키워갈 무렵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쳤습니다. "한국의 60만톤 제철소는 경제적 타당성이 없다…." 1969년 4월, KISA는 IBRD(국제부흥개발은행)의 이 같은 전망 보고서를 내밀며 끝내 차관 제공을 거부했습니다. 4년간 공들인 KISA를 통한 제철소 건설은 한 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졌습니다. 돈줄이 막혔으니 공사는 제자리 걸음.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새 돌파구가 절실했습니다. 이 무렵 한창 논의 중이던 대일청구권 자금은 한줄기 빛. 정부 당국자들에게 그것은 마치 제철소를 위해 준비된 구원투수 같았습니다. 일본 철강업계, 경제계, 정계 인사들을 찾아 집요한 설득 끝에 마침내 새 길을 찾았습니다. 제3차 한일각료회담 이틀째인 1969년 8월 27일, 정부는 일본측으로부터 포항종합제철 건설 지원을 이끌어냈습니다. 대일청구권 자금 중 농림수산 분야 자금을 제철소 건설에 전용할 수 있게 하고, 부족분은 일본수출입은행 차관으로, 공장도 60만톤에서 103만2천톤 규모로 키워 신일본제철 기술로 짓기로 했습니다.〈strong〉(매일신문 1967년 9월 26일~ 1970년 4월 3일 자)〈/strong〉 1970년 4월 1일, 3년 전 첫삽을 뜬 그 자리에서 다시 기공식이 열렸습니다. 백사장과 개펄, 무논, 솔밭을 쓸어 모은 공장 부지는 350만평(약 1천157만㎡). 이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공업국가 건설에 철강은 가장 근간" 이라며 "철강공업을 빨리 육성해 기계·조선·자동차·건설·군수산업 등을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박태준 포항종합제철 사장은 "대일청구권 자금은 선조들의 피의 대가"라며 "공사 기일을 맞추지 못하면 우리는 전원 저 오른쪽 영일만에 들어가 빠져 죽는다"며 각오를 다졌습니다. 1973년 6월 9일 오전 7시 30분, 마침내 제1고로에서 첫 쇳물이 쏟아지고 7월 3일 종합제철 1기 설비가 준공됐습니다. 준공 후 반세기가 흐른 지금 철강 생산(3천844만톤) 세계 7위(2023년 기준), 월드 스틸 다이내믹스(WSD) 선정 철강사 경쟁력 14년째 세계 1위. 오늘의 포스코는 그때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2024-10-11 05:30:00
경상북도 행정동우회(회장 김영재)는 지난 4일 동우회원 120명이 참여한 가운데 봉화군 내성천을 찾아 생활 쓰레기를 수거하며 자연정화활동을 가졌다.
2024-10-07 14:10:00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25> 1957년 문경 시멘트공장 준공식
1957년 9월 26일 경북 문경군 점촌읍(현 문경시) 신기동. 난생 처음 보는 우람한 건물이 가을 하늘로 우뚝 섰습니다. 마침내 다가온 문경 시멘트 공장 준공식. "공장이 근대식으로 준공됨에, 앞으로 시멘트를 많이 만들어서 전란을 입은 우리나라를 하루 속히 재건해야…." 이승만 대통령의 치사에 준공식장은 내빈과 2천여 학생, 주민들의 만세 함성으로 달아올랐습니다. 6·25 동란으로 폐허가 된 국토 재건은 지상 과제. 유엔(UN)에서 운크라(UNKRA·유엔한국재건단)가 창설돼 1953년부터 본격 원조가 시작됐습니다. 재건에 필요한 3대 기간 산업은 비료(식량 증산), 유리와 시멘트(건설). 비료 공장은 충주에, 판유리 공장은 인천에, 시멘트 공장은 원석(석회석)이 풍부하고 연료 수송이 쉬운 문경이 적지로 낙점됐습니다. 이렇게 문경 시멘트 공장은 '국토 재건'이란 역사적 사명으로 태어났습니다. 890만 달러 원조로 덴마크 최신 기술로 세운, 운크라 최대 사업이었습니다. 석회석을 1천500도 이상 고온으로 굽는 소성로(킬른) 2기에 생산량은 연간 20만톤. 국내 시멘트 수요의 3분지1을 감당하고 3년 뒤엔 2기를 더 지어 동양 최대인 연간 40만톤, 필요량의 70%까지 책임지기로 했습니다. 시운전 끝에 그해 11월 21일 첫 완제품 1만2천 포대(560톤)가 출하됐습니다. 판매가는 대당 1천400환. 시중가(2천300환) 보다 대폭 싸게 각지로 공급됐습니다. 이 무렵 벌인 월포·구룡포·감포·양포 방파제 공사, 안계 위양교·포항 오천 세계교·영양 대천 잠수교·현풍 차천 잠수교·안동 길안 잠수교 공사에도 야무진 시멘트가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이제 비만 오면 폭삭 주저 앉던 나무다리 걱정은 덜게 됐습니다. 공장은 당초 계획대로 민간에 불하돼 12월부터는 대한양회가 인수, 운영했습니다. 인수금은 60억환. 덴마크로부터 4개월 간의 기술 강습으로 운영 기술도 온전히 넘겨 받아 종업원 334명 모두 한국인으로 공장을 돌리게 됐습니다. 〈strong〉(매일신문 1957년 9월 26일~1958년 6월 14일 자)〈/strong〉 새마을사업이 한창이던 1970년대, 시멘트는 '건설의 감초'. 도로, 주택, 공장 등 건설 현장마다 시멘트가 부족해 물건을 받으려는 화물차들이 줄지어 며칠씩 기다려야 했습니다. 공장 옆엔 전용 비행장에 농구장, 축구장, 기생집도 생겨났습니다. 한창일 땐 종업원이 500여 명, 인근 협력 업체까지 더하면 1천여 명에 달해 무명의 한촌(寒村)이던 신기 들판은 근대화를 이끄는 공업지대로 탈바꿈했습니다. 공장은 다시 1975년 쌍용양회에 인수돼 역사적 사명을 감당해 오다 지난 2018년, 마지막 심장을 멈췄습니다. 태어난 지 61년 만입니다. 공장은 멈췄지만 근대화의 상징, 산업유산으로 또 다른 부름을 받았습니다. 지금 이곳엔 뉴딜사업이 한창입니다. 운크라 원조시설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한 곳. 전후 재건,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 그 역경과 도전의 세월을 시멘트 생산으로 함께 해온 이곳이 '대한민국 시멘트 역사의 성지'로 다시 태어나길 소망합니다.
2024-09-27 05:30:00
통일을 실천하는 사람들 대구본부, '탈북1호' 안찬일 박사 초청 토크 콘서트 개최
통일을 실천하는 사람들 대구본부 (상임대표 오장홍 )는 24일 우정구 전 대경언론인회 회장을 비롯한 시민단체 대표, 통일 관련 지도자 등 2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구 중구 매일빌딩에서 2024 코리안드림 통일공감 토크 콘서트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탈북1호 박사인 안찬일 세계 북한연구센터 소장은 "북한 김정은 체제의 4대 세습 움직임과 최근 불거진 두 개 국가론, 통일반대 주장이 남북 청소년에게 통일에 대한 관심을 촉진시키고 있다" 고 분석하고 "이런 결과가 통일을 앞당길 수 있다" 며 대비를 촉구했다.오장홍 대표는 한반도 평화통일이야말로 갈등과 대립의 역사를 청산하는 길" 이라 말하고 "오는 28일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에서 가질 코리안 드림 천만 시민캠페인의 하나인 통일실천 대행진에 지역민들이 많이 참석해 줄 것을 호소했다.
2024-09-25 16:11:36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24> 1959년 추석날, 아! 사라호
1959년 9월 17일 추석날. 새벽 바람이 수상쩍더니 차례상을 후려치는 비바람이 몰아쳤습니다. 이날 새벽, 제주를 휩쓸고 통영에 상륙한 제14호 태풍 '사라'. 오후 들어선 경북을 표적 삼아 무섭게 내달렸습니다. 대구·청도·경산, 영천·경주·포항, 안동·청송·영덕을 지나 울진까지 초토화. 도처가 눈 뜨고 볼 수 없는 '물지옥'이었습니다. 이날 오후 8시,대구 동촌 아양교는 이미 위험 수위. 날이 밝자 유원지 점포와 가옥 50여 동이 몽땅 떠내려갔습니다. 신천 상류 파동, 검단·서변·불로동 제방은 간데 없고, 신암·산격·북비산 저지대는 물바다로, 달서천이 역류한 원대동 일대 논밭은 황톳빛으로 잠겼습니다. 영천에선 17일 오후 2시쯤 금호강 물이 영천교 남쪽 제방을 타고 넘었습니다. 놀란 주민들이 우르르 영천역까지 도망 왔지만 강물도 뒤쫓아 들이쳤습니다. "이거 큰일이다." 영천역 조역(助役) 임경현 씨는 기관차에 화물 열차 20량을 달아 주민들을 실어 날랐습니다. 왕복 세 번으로 2천400명이나 구했습니다. 18일 영천 금호면(읍)에선 익사자가 13명. 이날 정오 현재까지도 물에 잠긴 진량·안심 일대에선 경찰 보트가 고립자를 구하느라 이리저리 바쁘고, 하늘에선 헬리콥터가 뿌린 구호식량, 건빵 봉지가 쏟아졌습니다. 경산 고산(현 시지) 저지대도 침수돼 고산지서 이종능 경사는 나룻배 하나로 주민을 76명이나 살렸습니다. 월성(경주)에선 외동 입실천, 천북 신당천, 안강 칠평천 등 물길이 죄다 터져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큰물, 형산강이 범람한 강동면 일대는 3천여 가옥이 물밑으로. 강둑 옆 낙산리(현 오금1리)는 마을이 통째(가옥 57호 유실) 잠겼습니다. 태풍과 해일이 쌍으로 덮친 포항 해도동 일대에서도 침수 가옥이 6천여 호에 달했습니다. 안동 용상동 주민들은 추석날 오후 5시쯤 반변천 물이 선어정 산등을 넘는 걸 똑똑히 보고는 하얗게 질렸습니다. 용상동 일대는 순식간에 쑥대밭, 산 너머 와룡국교도 휩쓸려 한동안 안동에선 '용자 든 이름은 짓지 말라'는 말까지 돌았습니다. 영양의 곡창지대 영양면(읍) 현1,2동 들판도 자갈밭으로, 청송은 외지로 가는 도로가 싹 끊어지고 석유·양초까지 동나 고립무원. 진보로 통하는 길을 뚫는다고 이유백 파천면장부터 어린아이까지 지게로 꼬박 나흘간 돌을 날랐습니다. 영덕 강구항은 말 그대로 물지옥이었습니다. 청송·영일(포항)·영덕에서 50개의 내가 모여든 오십천 강물이 해일과 부닥치며 수위를 8m나 올려 강구 시가를 삼키고 20t급 발동선 6척을 10m 절벽 위 국도로 내동댕이쳤습니다. 순식간에 거지꼴로 오들오들 떨며 차가운 밤 바다를 서성이는 5천여 강구 이재민들…. 상인 신동휴 씨가 추석 대목을 본 400만환이 든 궤짝, 1억5만환이 든 동해수산(대표 김원규) 금고도 못 건지고 다 떠내려 갔습니다.〈strong〉 (매일신문 1959년 9월 19일~9월 27일 자)〈/strong〉 태풍이 빠져나간 길목, 울진에서는 초가지붕이 물에 둥둥. 근남·기성·온정·평해까지 다 쓸고 갔습니다. 오갈 데 없는 66세대 300여 주민들은 이듬해 4월, 정부 주선으로 휴전선 아래 불모지, 철원으로 눈물을 훔치며 집단 이주했습니다. 사망·실종 280명(전국 849명), 부상 1천277명(전국 2천533명), 이재민 40만8천83명, 구호대상자 19만9천201명(1959년 9월 28일 집계 경북 인명 피해). 평균 초속 45m(최대 초속 85m), 한나절만에 150mm가 넘게 내린 폭우에 재산 피해는 말도 못해 복구에는 처음으로 군 병력이 동원됐습니다. 해방 후 이보다 더 무서운 태풍은 없었습니다. 1959년 그날, 고향 진주에서 명절 휴가 중이던 신정식 상등 해병은 교통 두절에도 가야 한다며 포항까지 500리길을 4일 동안 걸어서 기어이 제시간에 귀대했습니다. 물지옥 속에서도 살아야 한다고 악착 같이 헤쳐 나온 형님·누이, 아버지·어머니들…. 모두가 '상등 해병'이었습니다.
2024-09-13 05:30:00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23> 1958년 대구 신천 푸른다리
1958년 여름날 대구 신천 경부선 철도교(푸른다리). 기적소리 요란한 기관차가 지나간 다리 위에 다시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이 일대 다리라곤 멀리 신천교(현 칠성교)와 수성교 뿐이어서 위험해도 신천을 건너기엔 기차가 드문 철길이 지름길. 물동이를 인 아낙네, 중절모 신사, 시장 가는 엄마도 양산 그늘에 아기를 등에 업고 하늘 높은 철길을 꼬물꼬물 걷습니다. 푸른다리 일대는 피란민이 모여 살다 눌러 앉은 곳. 다리 아래는 갈 곳 없는 고아, 넝마주이 부랑아들이 우글대는 우범지대. 서울로 진출한 거지왕 김춘삼도 이곳 출신이었습니다. 다리 위 철길에선 인명사고가 잇따라 '희망의 다리'로 바꿔보자고 파란색을 칠해 '푸른다리'로 불렸지만 현실은 '절망의 다리'였습니다. 부랑아들은 휴지나 고물을 주워 팔아 끼니를 해결했습니다. 1961년 4월 무렵엔 푸른다리파 일명 '해파리' 일당이 부쩍 행패를 부렸습니다. 교동 강산면옥 앞 구두닦이 소년까지 건드리고 돈을 뺏었습니다. 그해 3~4월 두 달 동안 경찰에 걸린 것 만 10여 건. 경찰이 뜨면 그때뿐, 푸른다리는 늘 이들의 아지트였습니다. 푸른다리는 '마의 철교'로 소문났습니다. 1959년 정월 대보름날 다리를 건너다 술과 달에 취해 실족사 한 직공(職工). 1961년 6월 20일 승강구에서 졸다 열차가 급정거 하는 바람에 추락사 한 승객. 1963년 8월 28일 동생을 업고 건너다 눈앞에 들이닥친 열차에 동생을 다리 밑으로 던지고 자신은 무참히 깔린 청각장애 언니…. 인명사고가 끊이질 않았지만 그럼에도 철길로 걷는 데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신천1·2구(1·2동)에는 70자(21m)를 파도 물이 안나…." 상수도가 없던 그 무렵 신천 부락민들은 도리 없이 강 건너 공동 우물물을 철길로 길러 먹었습니다. 공동우물 이용자는 1천여 세대 5천여 명. 하도 위험해 철길 옆 난간에 인도교를 놔 달라는 진정도 번번이 허사. 임시 변통으로 하천에 드럼통을 엮어 만든 가교는 비만 오면 맥없이 쓸려갔습니다. 이런 사정에 신천 1구(1동) 홍 모씨는 사비로 거금을 들여 가까운 냇바닥에 우물을 파고는 물을 팔았습니다. 우물물 한짐은 10환. 철길로 물을 긷다 죽기보단 낫다고 인근 5백여 세대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사 먹었습니다. 철도 교통량도, 푸른다리 보행자도 갈수록 늘어 1964년엔 이곳에서 사망자가 10월 초까지 이미 30명. 특단의 조치가 내려졌습니다. 10월 4일 철도청 대구보선사무소가 푸른다리 양 끝 제방에 보행을 막는 콘크리트 담장을 치자 신천동 부락민이들이 괭이를 들고 달려왔습니다. 식수 통로가 막힌다는 아우성에 보선사무소측은 침목으로 가교 부설을 약속했지만 말 뿐이었습니다. 절망의 푸른다리에 마침내 희망이 찾아왔습니다. 1965년 10월, 우여곡절 끝에 푸른다리 옆으로 제2신천교(현 신천교)가 놓였습니다. 예산이 모자라 대봉교 신설, 수성교 확장 등 대구 시내 11곳 교량 공사도 다 미루고 이 다리 하나만 세웠습니다. 푸른다리 아래 하상부지에는 자활촌이 생겼습니다. 남대구경찰서 도움으로 설치한 대형 텐트에 '직업소년 자활단' 간판이 걸리고 구두딱이 통, 넝마주이 망태도 선물로 들어왔습니다. 세끼 식사에 야학까지 소문나 입단 희망자가 줄을 이었습니다.〈strong〉(매일신문 1960년 2월~1965년 10월)〈/strong〉 신천 동쪽 주민들이 열차를 피해 물을 긷고, 시장엘 가고, 강건너 도심을 드나들던 1958년 푸른다리. 반달처럼 푸근했던 둥근 교각은 2014년 선로 확장공사때 재건축으로 간데없고, 그토록 원했던 철길 옆 보행로는 2016년에서야 들어섰습니다. 하얀 수증기를 토해내며 덜커덩 덜커덩 밤새도록 달리던 기관차는 쏜살같이 달리는 고속철로 변했습니다.
2024-08-30 05:30:00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22> 1973년 낙동강 화원유원지 모래찜질
1973년 8월 7일 달성군 낙동강 화원유원지. 폭우성 소나기도 잠시뿐, 35℃를 오르내리는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리는데 한 뼘 그늘도 없는 백사장에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발바닥은 후끈, 숨은 턱턱 막혀도 저마다 자리를 잡고는 우산 그늘에 쏙 드러누웠습니다. 이른바 모래찜질 피서객. 이날도 줄잡아 100여 명이 털털대는 버스에 짐짝처럼 몸을 싣고 이 먼 곳까지 왔습니다. 말이 좋아 이열치열(以熱治熱)이지 가마솥 더위에 모래밭을 찾은 건 다 사정이 있었습니다. 신경통, 류마티스, 관절염, 만성피로…. 또 누구는 부인병에 좋다고 무작정 따라왔습니다.〈strong〉(매일신문 1973년 8월 9일 자)〈/strong〉 달궈진 모래는 너무 뜨거워 화상을 입을 정도. 한겹 옷을 걸치고는 모래 구덩이에 몸을 묻고 지긋이 눈을 감았습니다.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을라치면 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꼭두새벽부터 장사한다고, 논밭을 일군다고, 휴일도 모르고 날품을 판다고 사시사철 그리도 설쳤으니 팔 무릎 어깨 허리 어디 하나 성할 틈이 없었습니다. 말동무와 같이 온 아낙네들은 시집 흉, 남편 흉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이곳저곳 쑤시고 아픈 것도 억울한데 시집살이 생각하면 울컥 화가 또 치밀었습니다. 부질없는 한숨에 먼산을 쳐다보니 미루나무 높은 데서 찢어질 듯 울어대는 한여름 매미 소리…. 무더위에 이 무슨 고생이냐 했는데 한참 수다를 떨고 나니 후련했습니다. 속이 다 시원했습니다. 모래찜질은 독소가 되는 몸속 노폐물을 땀으로 빼내는 자연 건강요법. 혈을 돌리고 염증도 없애고 아픔도 멎게 한다고, 옛날부터 선조들이 해오던 여름철 연례행사였습니다. 에어컨은 무슨, 선풍기도 귀해 부채 하나로 여름을 나던 그 시절, 서민들은 아파도 병원을 몰랐습니다. 폭염도 땡볕도 대수가 아니었습니다. 모래를 끼얹고 온종일 드러누워도 돈 한 푼 안드니, 낙동강 모래밭은 이들의 병원이자 속 편한 쉼터였습니다. '어정 7월 건들 8월'. 바쁜 모내기를 끝낸 7월은 발걸음도 어정어정 한결 가볍고, 농작물이 알아서 여무는 8월은 할 일도 없어 건들건들 그늘을 찾아, 또 이렇게 모래찜질로 몸을 달래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화원유원지 모래찜질은 1970년대를 지나오면서 점차 자취를 감췄습니다. 1976년 10월 낙동강에 안동댐이 들어선 뒤 강물에 실려오던 모래도 줄고, 도시화로 건축붐이 일면서 강바닥 모래는 귀한 몸값으로 팔려나갔습니다. 드넓던 화원유원지 백사장도 점차 볼품을 잃었습니다. 미루나무, 버드나무, 이태리포플러가 늘어섰던 그때 화원유원지 강변숲은 이제 주차장으로, 운동장으로, 공원으로 탈바꿈했습니다.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가 끝도 없어서 엄마랑 누나랑 강변 살자던, 곱디 고운 백사장은 더는 볼 수 없습니다. 모래 섞인 계란을 도란도란 까먹으며 모래에 몸을 묻던 추억도 다 물속으로 사라졌습니다.
2024-08-16 05:30:00
[사진으로 기록한 100년 전 경주 고적] 일제의 눈으로 본 조선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은 한반도 전역에서 조선고적조사 사업을 벌였다. 고적조사는 1909년 탁지부(현 기획재정부) 건축소 사업으로 시작됐다. 탁지부는 대한제국 산하 기관이었지만 일제의 조선총독부 지휘를 받았다. 사업명은 조선고적조사였지만 실은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일본 지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숨은 목적이 있었다. 조사는 주로 고건축과 고고학 분야 기록, 조사, 발굴사업으로 해방 전까지 계속됐다. 조사 책임자는 도쿄제국대학 세키노 다다시 건축학 교수. 동 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한 야쓰이 세이이쓰는 그의 조사단원이었다. 야쓰이는 사진촬영을 전담했다.1911년 무렵부터는 유적을 단독으로 조사 및 발굴도 했다. 주요 지역은 경주, 평양, 부여 등 고도(古都). 야쓰이는 1909년부터 1920년까지 경주를 수시로 찾아 발굴사업에 참여했다. 고적 촬영에는 유리건판을 필름처럼 사용하는 카메라 옵스큐라가 사용됐다. 이 무렵 경주에는 '동양헌' 이란 사진관이 있었다. 주인은 일본 사진작가 다나카 가메쿠마가. 경주에서 제일가는 고적 전문 사진작가였다. 그는 1907년 토함산 중턱에 석굴암 존재가 알려진 뒤 1913년부터 1920년까지 3차례 이뤄진 해체 보수공사 과정을 사진으로 남기기도 했다. 야쓰이는 경주에서 동양헌의 다나카와 깊이 교류하기도 했다. 야쓰이는 4~6세기에 한반도 남부를 일본이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신봉하던 인물. 그는 1909년 조선고적사업 중간 보고서 격인 '한홍엽(韓紅葉)'에서 "한반도는 고대부터 일본의 지배를 받아왔기 때문에 당대에 일본의 보호를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썼다. 고적조사는 그 역사적 증거를 찾으려는 과정이기도 했다. 당시 야쓰이가 촬영한 100년 전 경주 고적 사진 원본이 일본에서 어렵게 발굴, 수집돼 한국으로 돌아왔다. 사진은 영남대 정인성 문화인류학과 교수가 야쓰이의 외동딸이 보관해 오던 것을 2014년 사비를 들여 구입한 것. 모두 100여 점으로 대부분 소형(15.6×11.3cm) 유리건판으로 촬영된 것이다. 사진은 촬영본이 트리밍 없이 인화된 원본으로 학술적 사료 가치가 높다. 정 교수는 "일본에서 환수한 기록 유산을 (사)한국국외문화재연구원의 도움으로 '한국고고학자가 새로 쓰는 조선고적조사보고' 발간과 함께 이제야 일반에 공개하게 됐다"고 말했다. 정 교수가 지난 20여 년 동안 일본 등지에서 수집한 고문서, 사진 등 기록 유산은 모두 1만여 점. 최근에도 경주 유적과 불법 도굴로 수집된 유물을 기록한 사진 등 140여 점을 수집했다. 이 기록물도 정리해 조만간 공개할 예정이다. 100년 전 경주 고적 사진 원본은 (사)한국국외문화재연구원과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BK사업 팀 공동주최로 경주엑스포대공원 문화센터 전시실에서 24일까지 전시 중이다.
2024-08-15 05:30:00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21> 1973년 금호강에 옮긴 영천 5일장 &기우제
1973년 7월 27일 경북 영천군 영천읍 금호강. 백사장 땡볕에 난데없이 5일장이 섰습니다. 6월 중순부터 계속된 가뭄에 논에 모가 타들어가, 곳곳에서 올린 기우제도 모두 허사. '장터를 하천으로 옮기면 비가 온다'는 속설에 급기야 관·민이 함께 문외동 시장을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1962년에도, 68년에도 시장을 옮기자 우연인지 비가 왔다", "영천시장을 옮기면 일주일 내 틀림없이 비가 온다"… 노인들은 여부 없이 효험을 장담했습니다. "이럴 시간에 한줌이라도 강바닥을 파는 게 더 낫겠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시큰둥했습니다. "현대 과학 문명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군민들의 요구가 심해 도리 없었다" 영천읍장은 장터를 옮겨 놓고도 내심 속이 탔습니다. 그런데 또 우연일까, 지성이면 감천일까? 이날 오후 3시쯤 마른 하늘에서 갑자기 소낙비가 내렸습니다. 같은 시각, 28km 떨어진 경주에서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날은 황남동 155호분(천마총) 발굴 현장에서 금관을 꺼내 올리던 날. "청명하던 하늘이 갑자기 컴컴해지더니 폭우가 쏟아졌다. 기상이변이었다…." 당시 조사단원이었던 윤근일 전 경주문화재연구소장은 그날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정말 효험이 있었던 걸까. 금호강에 장이 선 지 사흘 뒤인 30일, 새벽부터 흠뻑 비가 내렸습니다. 이날 낮 12시 현재 영천 강우는 37mm. 의성·경주·경산·선산·칠곡·성주·군위 등엔 50mm 안팍으로 흡족하게 내려 완전 해갈을 봤습니다. 이런 연유로 영천에선 가뭄이 들면 으레 시장을 옮기곤 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때마다 비가 왔습니다. 1976년 7월엔 9일(강수량 14mm) 하루 빼고는 비 다운 비가 없어 8월 2일 금호강에 장이 선 다음날 46mm나 왔습니다. 가뭄이 혹독했던 1977년에는 6월 중순부터 비 구경을 못해 7월 17일, 또 영천장을 강변으로 옮겼더니 이날 오후부터 다음날까지 20.1mm가 내렸습니다. 그해 성주에선 보기 드문 '키 기우제'가 열렸습니다. 7월 27일, 벽진면 가암1동 부녀자들이 목욕재계 후 모인 곳은 마을 앞 냇가 이천(利川). "용신님 제발 비를 내려 주소서" 아낙네들은 저마다 키에 물을 담아 까부르며 빌었습니다. 〈strong〉(매일신문 1973년 7월 29일, 1976년 8월 4일, 1977년 7월 19·29일 자)〈/strong〉 옛날부터 가물 때면 시장을 옮겼다는 사시(徙市). 신라 진평왕 때도 큰 가뭄이 들어 시장을 옮기고 용을 그려 빌었다고 합니다. 그 기저에는 음양(陰陽)사상이 있었습니다. 용왕이 사는 하천(음)에 장을 세워 시끌벅적하게 하면 하늘(양)의 용신이 감응해 비를 뿌린다는 것. 키의 모양새는 용의 꼬리. 하천에서 용이 꼬리치듯 부녀자들이 키를 까부르면 하늘의 양기가 발동해 비를 내린다고 믿었습니다. 영천은 비가 적게 내리기로 이름난 곳. 그래서 저수지(정부 누리집 2023년 8월 기준)가 무려 985개. 경북 전체(5천4개)의 19.6%가 영천에 몰려 있습니다. 1956년 제2 탄약창이 영천에 들어선 것도, 1996년 천문대를 영천 보현산에 세운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장마가 입추(8월 7일)가 지나도 계속되면 기청제(祈晴祭)를 올렸습니다. 제발 해를 보게 해 달라고 또 빌었습니다. 대자연 앞에서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한없이 약한 존재입니다.
2024-08-02 05:30:00
가정평화협회 대구경북지구(회장 임정배)는 28일 김상하 전 현풍향교 전교, 이수만 대경 언론인회 사무총장, 김동진 상산김씨 대종회 회장를 비롯해 오장홍 통일천사 대표 등 통일 지도자 1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구 그랜드 호텔 다이너스티홀에서 가정가치 회복운동대회를 열고 가정과 나라를 지키는데 앞장설 것을 다짐했다. 이 자리에서 조인범 가정평화협회 회장은 "우리나라가 저출산과 이혼 등으로 지역과 나라의 존립 기반이 무너지고 있다" 며 "유교 문화 뿌리가 깊은 대구경북에서 화목한 가정을 위한 가정 평화운동에 앞장서 줄 것"을 호소했다.
2024-07-29 13:28:51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20> 1961년 대구 물난리
1961년 7월 8일, 대구에 새벽부터 장맛비가 또 맹위를 떨쳤습니다. 신천에 물이 위험 수위를 넘기고도 계속 붇더니 기어이 일을 내고 말았습니다. 이날 오전 10시쯤 신천동 4구(현 수성 4가) 제방이 침식되면서 터졌습니다. 이 일대 저지대 가옥이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습니다. 신천 푸른다리(경부선) 인근 하상 부락엔 가옥 300호가 어른 허리 깊이로 잠겼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부모 등에 업혀 간신히 피난하고, 가재도구는 언덕 위 산으로, 지붕 위로 날랐습니다. 상동·범어동·신천동·동인동 일대는 배수가 안 돼 흙탕물로 덮혔습니다. 또 내당동 저지대, 대봉동 이천교 앞, 대명동 영선못(현 영선시장 자리) 아래 재건주택이 침수되고 효성여대(현 효성타운 자리) 서편엔 앞산에서 흘러든 빗물에 제방이 4곳이나 터졌습니다. 북비산 금호강 유역에는 축구장 50개 넓이의 논밭이 물바다로, 원대동 일대 들판도 푹 잠겼습니다. 가창댐은 물이 넘쳐 한없이 토해 내고, 금호강은 위험 수위, 낙동강은 상주·왜관·현풍 모두 홍수 수위를 넘겼습니다. 5관구 군인, 경찰, 소방대원으론 턱없이 부족해 비상 소집된 의용소방대도 팔을 걷었습니다. 복구 장비도 변변찮아 무너진 제방에는 통나무를 때려 박고 삽으로 가마니에 모래를 채워 쌓았습니다. 전날인 7일에는 봉덕동 1구 '사들못' 도랑이 터져 가옥 70여 동이 피해를 봤습니다. 침산국민(초등)학교 어린이들은 도로가 물에 잠겨 등교도 못했습니다. 서문시장은 침수에 누수로 절반이 철시했고, 침산 가설시장엔 손님 대신 흙탕물이 들어찼습니다. 온 들이 물바다로 변한 내당동 5구에서는 피난설까지 돌았습니다. 3일(59.6mm)과 4일(74,6mm), 7일(84.8mm)과 8일(83.7mm) 등 3일부터 8까지 대구에 내린 장맛비는 302.7mm. 가옥 약 1천호가 침수되고 도로와 제방 10여 곳이 무너졌습니다. 신천에선 급류에 지프차가 휩쓸리고, 귀갓길에 아들에게 줄 빵을 사 하천을 건너다, 떠내려 오는 보릿짚을, 또 목재를 건지려다 3명이나 변을 당했습니다. 9일부터 대구에는 비가 잦아들었지만 장마 전선이 북상하면서 영주에서는 12일 밤 시가지가 물에 잠기는 대홍수를 겪기도 했습니다.〈strong〉(매일신문 1961년 7월 4일~14일 자)〈/strong〉 해마다 이맘때면 가뭄이 아니면 이렇게 물난리를 쳤습니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장맛비는더 난폭해졌습니다. 2024년 올해도 그렇습니다. 대구에선 7월 2일(22.1mm)과 3일(12.4mm) 찔끔 비를 뿌리다 4일에는 폭염(최고 34.8℃)을 보이더니 9일에는 하루 만에 191mm나, 그것도 양동이로 쏟아붓듯 내렸습니다. 지리하게 내리던 장마는 옛일. 언제 어디에 얼마나 내릴 지 슈퍼 컴퓨터의 예측도 비켜가기 일쑵니다. 1961년 그 무렵엔 모든 게 부족해서 그랬다지만, 이수(利水)도 치수(治水)도 이렇게 눈부신데 피해는 외려 더 커졌습니다. 더 높이, 더 많이, 더 편하자고 앞만 보고 달려온 지 60여 년. 그새 장마는 성난 게릴라처럼 괴물로 변했습니다. 지금 자연은 무척 화가 났습니다.
2024-07-19 05:30:00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19> 1962년 극심한 한발(가뭄)에 물길 찾는 학생들
1962년 6월 29일, 모내기 철 윤기가 흘러야 할 논바닥은 바싹 말라 뽀얀 먼지가 일고, 비만 오면 넘쳐 흐르던 금호강·동강 물줄기도 멈춘 지 오래. 40여 일 계속된 한발(旱魃·가뭄)에 29일 현재 전국 모내기 진척도는 65.6%. 가뭄이 제일 심한 경북은 겨우 35%. 수일 내 비가 안 오면 모가 말라 죽어 비가 와도 모내기를 못할 지경에 처했습니다. "공무원, 학생, 군인, 민간인 등 가능한 손은 모두 동원하라". 이날 중앙한해대책위는 최후의 수단을 긴급 하달했습니다. 모내기가 어려운 곳은 가식(假植), 물이 있는 논에 모를 임시로 심었다가 비가 오면 다시 제 논에 옮겨 심고 이마저도 힘든 곳은 대파(代播), 대체 작물을 심도록 했습니다. "10일까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묘판의 모를 없애라" 7월 1일, 거도적 가뭄과의 대결이 시작돼 대구 아양교 하류 금호강에 학생들이 떼로 나왔습니다. 이들은 경상중 1천900명, 대구중 1천500명 등 모두 3천400명. 강물이 말라 멈춘 아양교에서 양수기가 설치된 대구선 철교 부근까지 300m 구간에 바글바글 붙었습니다. 학생들의 작업은 강 오른편 20정보(6만평)의 마른 논에 양수할 물길을 내는 일. 전날 208공병대 그레이더 한 대가 급히 파헤쳐 놓고 간 강바닥에 벌떼처럼 달라붙어 삽질을 해대자 그럴싸한 물길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날 공무원과 교사(2천600명)들은 신천 용두방천에서, 공산초(300명)·공산중(200명)·동중(500명) 학생들은 동화천에서, 대륜중·고(900명)·중앙상고(500명) 학생들은 연못과 우물을 파며 물을 찾느라 진땀을 뺐습니다. 4일에는 대대적인 동원령이 내려져 대륜중 1천500여 명이 군인들과 신천 상류 가창 일대 하천을 4km나 파는 등 21개교 9천100여 명이 물을 찾고 모를 냈습니다. 이날까지 동원된 대구시내 학생들은 연 4만300여 명. 시골 학생들은 볼 것도 없었습니다. 경주에선 전국에서 처음으로 '호미모'가 등장했습니다. 물이 없으니 호미로 마른 논에다 흙을 파고 모를 심었습니다. 20일 내에 비가 오면 평년작의 80%는 건질 수 있다 해서 가뭄이 심한 경주 남산리(동) 들판에 4일까지 심은 호미모는 무려 50정보(15만평). 여기엔 경주 초·중학생이 2천300명이나 거들었습니다. 이 무렵 아이들은 삽질에 호미질은 다반사여서 너나없이 한몫하는 일꾼들이었습니다. 그러던 4일 밤, 남쪽에서 애먹이던 장마전선이 올라와 비를 뿌렸지만 도내 평균 강우는 겨우 16.2mm. 이틀 후에 또 찔끔 내려 평균 5mm. 농민들 속을 뒤집어 놓더니 마침내 태풍 '죤'이 비구름을 왕창 몰고 왔습니다. 12일 새벽부터 대지가 흠뻑 젖도록 쏟았습니다. "지금이라도 좋다" 도내 4천281정보(4천200ha)에 심은 가식묘가 본답으로 재이앙되고, 1만265정보(1만ha)의 대파 지역 일부도 갈아엎고 다시 모를 냈습니다. 가뭄으로 망칠뻔 했던 1962년 모내기는 학생들의 손과 태풍 덕에 겨우 마칠 수 있었습니다. 〈strong〉(매일신문 1962년 6월 30일~7월 13일 자)〈/strong〉 한해 전인 1961년 딱 이 무렵(7월 11일), 영주에 200mm가 넘는 폭우에 대홍수가 일어나 인명과 재산을 앗아갔는데 이번엔 태풍이 농민을 살렸습니다. 우연치곤 너무 공교롭고 자연의 희롱이라면 하늘은 너무도 짓궂기만 합니다.
2024-07-05 05:30:00
통일을 실천하는 사람들 대구경북본부, 2024 통일실천 전진 대회 개최
통일을 실천하는 사람들 대구경북 본부(대표 오장홍)는 2일 오후 2시 이경우 대경언론인회 회장, 김규제 삼일보국운동연합 총재, 장수규 맨발걷기 회장 등을 비롯한 통일 지도자 2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구정책연구원 5층 컨벤션홀에서 2024 통일실천 전진대회를 가졌다. 이날 대회에서 오장홍 대표는 "국내외 정세와 붕괴 직전의 북한 상황 등에 비추어 볼때 통일의 기회가 왔다" 며 " 국난극복의 보루인 대구경북에서 한반도 통일을 앞당기는 대열에 앞장 서자"고 강조했다. 이어 가진 특강에서 서인택 통일천사 중앙의장은 "통일은 건국 이념인 홍익인간 정신을 바탕으로 한 코리안 드림의 실현" 이라 말하고 광복 80주년이 되는 내년에 한반도 통일을 위한 1천만 캠페인에 시·도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호소했다.
2024-07-04 10:49:59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18> 1966년 차바퀴 보리타작
1966년 6월 16일 대구-하양 간 국도. 배고픈 보릿고개도 어느새 9부 능선. 보리베기가 한창인 6월 중순, 도로에 난데없이 보릿단이 좍 깔렸습니다. 달리는 차량으로 손쉽게 타작하는 이른바 '차바퀴 보리타작'. 이곳을 비롯해 영천, 성서, 화원, 칠곡 등 국도마다 타작하는 농민들로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마른 보릿단은 미끄럽기 그지없어 운전자들에겐 살얼음판. 짐 실은 트럭은 엉금엉금, 사람을 태운 버스는 지각 도착이 일쑤였습니다. 이 때문에 사고도 잦아 경찰이 뜨면 보릿단도 팽개치고 줄행랑을 쳤습니다. 도리깨질에 비하면 일도 아니어서 농민들은 차바퀴의 유혹을 쉬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시작은 억수 같이 비가 내린 3년 전 일이었습니다. 1963년, 삼남지방에 구질구질한 봄비가 그칠 줄 모르더니 끝내 장마로 이어졌습니다. 5월 27일, 봄 강우로 경산 들판엔 쓰러진 보리가 이미 3~5할. 6월 16일부터 시작된 장마에 태풍 '샤리'마저 북상해 25일까지 대구엔 270mm가 넘는 비가 내려 베어 놓은 보릿단이 물에 둥둥 떠다녔습니다. 쉴 새 없는 장대비에 손을 못써 거름 취급 받는 보릿단…. 그래도 건져야 한다고 탁류가 휩쓰는 동촌에선 배를 저어 보릿단을 날랐습니다. "올해 보리농사는 헛농사." 60년 만의 대흉년으로 91만 농민(전 농민의 35%)들이 보리농사를 망쳐 살길이 막막해졌습니다. 도처에서 보리에 수염 같은 싹이 나고 썩어가던 6월 25일, 영천읍(시)과 금호면(읍)에선 군·관·민·학생들이 밤낮없이 도리깨질을 해댔습니다. 영천 탄약사령부가 지원한 조명 발전기로 불을 켜고 철야로 건져낸 보리는 1천500석(1석=10말). 타작한 보리는 아스팔트 도로에 널어 말렸습니다. 비가 오면 걷고 그치면 또 널고…. 국도 십리(4km)길이 보리로 덮혔습니다. 30일 밤, 박경원 경북지사가 영천 타작 현장을 새벽까지 지켜보고는 급히 시장·군수들을 도청으로 불러들였습니다. "도내 전 포장 도로를 이용해 마지막 순간까지 한 톨의 보리라도 건져야 한다!" 7월 1일부터 '거도적 보리건지기운동'이 시작됐습니다. 물에 잠긴 보리도 뜨끈한 아스팔트에선 하루면 충분. 날이 개자 각지에서 철야로 타작이 시작되고 도로마다 보리가 한없이 깔렸습니다. 영천의 기적, 신박한 '국도 아스팔트 건조' 덕에 헛농사라며 낙심했던 1963년 경북도 보리농사는 그래도 평년의 반타작, 76만석은 족히 건질 수 있게 됐습니다.〈strong〉(매일신문 1963년 6월,1966년 6~7월)〈/strong〉 이때부터 도로에서 보리 말리기가 시작돼 농민들도 차츰 꾀가 늘었습니다. 바싹 마른 보릿단 위로 차바퀴가 구르자 절로 되는 탈곡…. 힘든 도리깨질을 왜 했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교통량이 늘고 미끄러운 보릿단에 사고도 많아 차바퀴 보리타작은 점차 자취를 감췄습니다. 1966년 경북도 보리수확 예상량은 무려 평년 대비 210%. 조기 파종 등 보리 증산운동에 하늘까지 도와줘 단군 이래 대풍이라 했는데 날벼락이 쳤습니다. 가마당 정부 매입가가 생산비(1천493원)에 턱도 없는 1천5원. 3년 전엔 흉년으로, 이번엔 서글픈 풍년으로 농심은 또 탈탈 털렸습니다.
2024-06-21 06:01:00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17> 1962년 대구 신천 근로구호공사
이 많은 사람들이 대체 왜? 필름을 보고도 믿기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 "그래도 엄연한 사실!" 낡은 필름이 계속 말을 걸어왔습니다. 필시 사연이 있을텐데 언제, 무엇 때문에 이토록 운집했는지 알 수 없으니 속이 탔습니다. 필름 속 단서는 대구 앞산 용두바위가 보이는 신천, 장대 높이 내 건 '남산 5구동 근로구호 공사장' 글씨, 옷 차림새는 1960년대. 이렇게 좁히고는 무작정 신문을 훓었습니다. 수년 치를 뒤지고도 제자리. 근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눈이 확 뜨였습니다. 1962년 6월 13일 오전 신천 중동교 부근 근로구호 공사장. 공사 3일째인 이날은 전날 보다 수천 명이 더 늘어 2만2천78명. 강바닥이 사람들로 하얗게 들어찼습니다. 명목은 호안공사였지만 실은 실업자 구호사업. 전년도 큰 물난리로 흉년이 들자 이번 보릿고개가 너무 혹독해 노임으로 당일 쌀을 지급한다니 저렇게 쏟아졌습니다. 이렇게 몰린 또 다른 원인은 3일 전 전격 실시된 통화개혁. '환'을 '원'으로, 10대 1로 평가절하되면서 신권이 없어 식량을 못 구한 시민들까지 가세했습니다. 인파에 놀란 강원채 대구시장은 하루 250여 명씩 2개월 간 1만6천명을 취역시키려던 당초 계획을 바꿔 무제한 일하도록 했습니다. 거의 절반은 부녀자. 10대부터 60대 노인까지, 젖먹이를 업은 부인, 신사숙녀 차림의 젊은 남녀…. 한 세대에서 3, 4명이 나온 곳도 수두룩했습니다. 남편을 잃고 어린 자식 다섯에 일곱 식구를 떠안아 딸과 같이 나온 이정희(53) 씨. 결혼 예물이 적다고 구박하는 시어머니와 불화 끝에 양잿물을 마시고도 죽지 못해 미음을 끓일 쌀을 구하러 왔다는 어느 여인 …. 구호공사는 이들에게 마지막 '지푸라기'였습니다. 작업은 강바닥에서 사리(자갈)를 날라 제방을 쌓는 일. 장비라곤 삽과 괭이, 바구니와 들것이 전부. 모두 맨몸으로 힘을 써야 해서 만삭으로 작업하던 김이남(31·대봉동 5구) 씨는 그만 강바닥에서 불쑥 아기를 분만했습니다. 안타까운 사정에 당국은 쌀 한 가마니로 산모를 긴급 구호했습니다. 엄마 따라 왔다가 손을 놓친 미아도 16명이나 돼 아이를 찾아가라는 순회 방송이 종일 귓전을 울렸습니다. 오후 5시, 일은 끝났지만 워낙 혼잡해 개인별 작업량은 측정 불가. 당국은 군 트럭에 싣고 온 노임곡 930가마니를 풀어 똑같이 쌀 2kg(약 47원)씩 지급했습니다. 3일간 연 취역자는 무려 3만5천여 명. 노임곡이 바닥나 공사가 중단됐습니다. 사흘 뒤, 이번엔 세대 당 1명씩 1천8백80명으로 다시 시작했지만 현장에는 영세민 500여 명이 몰려와 쌀이 떨어졌다며 눈물지었습니다. 〈strong〉(매일신문 1962년 6월 13·14·16·17일 자)〈/strong〉 그때는 먹고 산다는 게 저토록 힘겨웠습니다. 언 62년. 벌거숭이 앞산 자락, 초가삼간, 판자집도 다 옛말. 산천도 신천도 참 많이 변했습니다. 그날, 쌀이 없다고 주린 배로 엄마 따라 자갈을 모으던 저 아이들은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요?
2024-06-07 06:00:00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16> 바다의 보릿고개, 1962년 5월 경북 양포항
1962년 5월 중순 경북 양포항. 대풍을 안긴 꽁치도 해류를 쫓아 북으로 달아나고, 다시 한몫 볼 갈치·방어는 한여름은 지나야 해서, 이제 잡히는 건 잡어 뿐. 어한기 5월은 바다에도 보릿고개. 그래도 양포는 낫습니다. 끝물 돌미역 따기가 한창입니다. 주섬주섬 점심을 든 아낙네들이 백사장에 모였습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제주에서 온 출가 해녀. 솜씨가 좋다고 불러들인 이들이 물개 마냥 거침없이 미역밭을 누비는 통에 제바닥 해녀들은 한껏 심술이 났습니다. 수심 8m도 거뜬해 당할 재간이 없으니 참 배가 아팠습니다. 옆 동네 감포엔 제주서 온 이들이 무려 191명. 17세 소녀, 서른 아홉 과부, 돌이 겨우 지난 계집을 업고 온 젊은 아낙네도 끼였습니다. 모두 육지 벌이가 나을까 해서 왕복 뱃삯에 반년살이 양식값 등 거금 2만환을 장만해 왔습니다. 품삯은 현물로 1할. 돌미역 열단을 따면 한단을 받았습니다. 백사장에 돌미역이 까맣게 발리고 고깔 같은 띠집, 움막이 여기저기 곤두섰습니다. 해가 지면 움막에 불이 켜지고 작대기에 걸린 남포등이 해풍에 달그랑달그랑 저녁참을 부릅니다. 미역 한오리는 상품(上品)으로 천환, 한단(열오리)이면 만환. 도둑 걱정에 철야로 지킵니다. 울도 담도 없는 백사장이어서 조바심에 뜬눈으로 지샙니다.〈strong〉(매일신문 1962년 5월 21·24일 자)〈/strong〉 움막에서는 미역돌도 지킵니다. 미역돌은 자연산 돌미역이 자라는 미역밭. 이 돌에도 다 임자가 있었습니다. 해안선을 따라 바닷속으로 쭉쭉 뻗은 무형의 바다 두렁이 있어 수확철이면 손을 탈까 서로가 눈 뗄 수 없습니다. 미역 포자가 잘 번지도록 수시로 잠수해 김도 매고 잡초도 뽑습니다. 육지의 밭매기와 다를 바 없지만 숨을 참고 해야 하니 여간 고된 게 아닙니다. 그래도 미역밭은 바다의 옥토. 이 무렵엔 미역돌도 사고 팔아 미역밭을 가졌다면 큰소리 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대다수 오막살이 영세민엔 언감생심. 그물을 꿰매는 보망 수선공(하루 노임 6천9백환)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고급 일자리. 대부분 날품으로 미역을 따거나, 종일 그물에 걸린 고기를 떼는 일(하루 노임 9백환)로 밥벌이를 했습니다. 이 배고픈 보릿고개를 넘을라치면 선창에서 고기를 부리다 떨어뜨린 죽은 녀석도 악착같이 건졌습니다. 이날도 엄마는 물고기를 손질해 널어 놓고는 미역을 따러 갔습니다. 아기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엄마가 생각이나 백사장엘 왔습니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푸른 파도에 까만 갯바위 뿐. 하얀 수건을 두른 엄마는 보이질 않습니다. 한낮 뙤약볕이 저만치 지나도록 대바구니 머리에 인 울 엄마는 오지를 않습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엄마인가 돌아보면 철썩이는 파도소리, 갈매기 울음소리…. 아기는 하릴없이 조약돌을 세다가 기다림에 지쳐서 잠이 들었습니다. 바다가 들려주는 자장 노래에 팔을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들었습니다.
2024-05-24 06: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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