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37> 1964년 대한민국 산업화 출발지 대구 제1공업단지
1964년 대구 북구 연암산 상공에서 본 칠성동과 침산동. 드넓은 신천 너머로 아스라이 자리한 단층 건물과 거대한 공장들. 시원스레 뻗은 침산로 왼편에는 제일모직, 오른쪽으로는 대한방직, 삼호방직 공장이 마치 섬유도시를 과시하듯 널찍하게 터를 잡았습니다. 오봉산 아래 침산국(초)교 옆으로는 선학알미늄, 무림제지 공장이 북침산네거리를 꿰차고, 경상감영 터에 더부살이 중인 도청이 이사 올 산격동엔 돈이 모자라 짓다 만 본관 건물만 덩그렇게 섰습니다. 멀리 중앙통(로)에서 제일모직 옆을 지나 곧장 신 도청사로 내달릴 도청교(1968년 개통)와 중앙대로(1971년 개통·전 통일로)는 아직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공장이 밀집한 이곳은 대구 최초 제1공업지역. 그 시작은 일제강점기인 1936년 이 일대가 공업지역으로 지정되면서부터. 신천과 대구역을 낀 터라 용수, 물류 등 공장을 돌리는데 이만한 입지가 없었습니다. 해방 전후에는 섬유·기계·고무·염색 등 크고 작은 공장들이 다닥다닥 어깨를 맞대고 97개나 들어섰답니다. 대구역 뒤뜰격인 칠성동은 기업의 산실. 역 부근에는 김성곤이 삼공유지회사(1939년 설립·쌍용그룹 모태)를, 시민운동장 맞은편 침산로변엔 김수근이 대성산업공사(1947·현 대성그룹 모태 )· 이해준이 삼립자동차공업사(1954·현 에스엘(주))를, 그 왼편 너른 들판에는 이병철이 국내 최초, 최대 소모사(梳毛絲)공장인 제일모직(1954·현 삼성그룹 모태)을 보란 듯이 일으켰습니다. 또 김추호의 아세아산업공사(1945년·현 아세아텍), 이태희의 조선기업사(1945· 현 조일알미늄), 최세정의 화랑고무(1950·현 (주)화랑), 김건기의 평화고무공업사(1950·현 평화산업), 손기창의 경창공업사(1961·현 경창산업) 등 지역 대표 기업으로 우뚝 선 이들 모두 이곳 칠성동에서 시작했습니다. 칠성동은 기업가들에게 그야말로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저 무렵 시대정신은 '근대화', '재건'를 통한 산업화. 어서 공장을 돌려 집집마다 대여섯씩 불어나는 국민들을 먹여 살릴 방도를 찾아야 했습니다. 서울의 구로공단, 부산의 사상공단, 대구는 제1공단이 그 명(命)을 받았습니다. 저 넓은 섬유공장은 주경야독 누님들이, 철공장·연탄공장은 새까맣게 분칠한 형님들이 도맡았습니다. 수출만이 살길이라 밤낮을 몰랐습니다. 대한민국 산업화는 이곳에서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어느덧 61년. 칠성동이 몰라보게 달라졌습니다. 시커먼 탄가루가 질퍽이던 거리, 시끌하던 공장지대가 싹 아파트 숲으로 변했습니다. 공장은 모두 둥지를 떠나 더 넓은 곳으로, 유일한 흔적 제일모직 터가 이곳이 제1공업단지였음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제일모직은 점점 커서 글로벌 삼성그룹으로, 세계의 '별'로 우뚝 섰습니다. 그 제일모직 터는 이제 삼성창조캠퍼스로, 벤처 청년들이 제2의 별을 찾아 또 밤잠을 설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이곳은 지난해 11월 정부로부터 '도심융합특구'로 지정돼 다시 부활을 꿈꾸고 있습니다. 대구의 도심융합특구는 산업·주거·문화가 어우러진 '대구형 판교 테크노벨리'. 도청 터(현 시청 별관), 경북대, 삼성창조캠퍼스가 협업해 신 성장 거점으로 거듭날 예정입니다. 핵심 콘텐츠는 도심항공교통 (UAM), 첨단 로봇, 지능형 반도체. 산업화 출발지에서 다시 차세대 성장 엔진으로 비상할 그날이 머지않았습니다.
2025-03-28 05:30:00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36> 1973년 칠성바위 유적 발굴, 그리고 칠성동
"달성(토성)에 올라가니 갑자기 북두칠성이 움직여 하늘을 빙빙 돌다 북문 밖에 떨어졌다. 괴이한 일이다…." 이조(李朝) 중엽, 이태영(李泰永·1744~1803)은 이상한 꿈을 꾼 뒤 아들을 여럿 얻었습니다. 이는 필시 북두칠성의 정기라 믿은 그는 북두칠성에 따라 아들 이름을 지었습니다. 羲甲(희갑)·羲斗(희두)·羲平(희평)·羲升(희승)·羲準(희준)·羲肇(희조)·羲章(희장). 7형제는 자라서 모두 높은 벼슬에 올랐습니다. 이태영도 대구판관(종5품)에서 경상감사(종2품)로. 가문이 번성하자 옛 꿈이 떠올랐습니다. 별이 떨어진 곳을 찾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과연 북두칠성처럼 바위가 일곱 개. 가문의 경사가 모두 이 바위 덕이라 여긴 그는 바위마다 아들 이름을 새기고 사당까지 지어 봄, 가을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 후로 바위는 칠성암으로 불렸습니다. 자식 없는 부인네들 발길이 잇따랐습니다. 1973년 1월 31일, 중구 태평로 2가 1-1번지에서 칠성바위 발굴이 시작됐습니다. 발굴은 낡은 공회당을 헐어낸 자리에 지을 시민회관 신축에 따른 것. 고고학적으로 칠성바위는 선사시대 지석묘(고인돌). 경북대 박물관과 문화재관리국이 합동으로 조사를 맡았습니다. 먼저 지신제를 올린 뒤 대구시 보호 수목 제1호, 회화나무 아래(동아철강상사 자리) 바위부터 파내려 갔습니다. "이 지석묘는 2천년 이상 된 것으로 유물 출토 가능성이 있다" 김영하 경북대 박물관장은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발굴 이틀째, 2미터 쯤 파 내려가자 해방 전 '義準(의준)'으로 오독했던 '羲準(희준)'이란 이름이 선명히 드러났습니다. 바위를 들어내고 그 아래를 샅샅이 살폈지만 아쉽게도 석곽이나 유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5월 1일부터 나흘 간 실시된 2차 발굴에서는 일부 바위가 교란된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공회당 건물과 가까운 바위 2개는 1939년 일본인이 발굴한 적이 있다'던 말 그대로 였습니다. 발굴이 끝났지만 신문 지상에는 이렇다 할 유물도, 지석묘(고인돌)로서 바위(덮개돌)를 고인 돌이나 석곽이 나왔다는 소식은 없었습니다.〈strong〉 (매일신문 1973년 2월 1일~5월 5일 자)〈/strong〉 "처음부터 상석(윗돌) 아래 묘구(墓構)가 없었거나, 상석을 옮겨 왔을 것…." 발굴에 참여했던 경북대 윤용진 교수는 훗날 대구사학(칠성동 지석묘 조사,1977)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또 "칠성바위는 지금까지 지석묘 개념과 달리 새로운 유적 형태로 재고 돼야 할 것" 이라며 "칠성바위는 묘표적 존재, 즉 묘가 없는 무묘거석(無墓巨石)으로 지석묘와 별개로 공존했을 것"이라 했습니다. 인간을 현세에 내려 보낸 곳, 인간의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곳, 명을 다해 '돌아가셨다'는 그곳. 그래서 장독대 칠성단에서 정화수(井華水)로 빌던 그곳 북두칠성…. 이태영 감사가 아들 이름을 새기면서부터 이 바위는 더는 '무덤(지석묘)'이 아니었습니다. 가장으로, 경상감사로 가문과 백성의 안녕을 빌었던 영험한 '(북두)칠성 바위'로 거듭났습니다. 이 칠성바위가 있어 이름도 칠성동. 칠성의 기운인지 이 동네서 가업을 일으켜 별(스타)이 된 기업도 많습니다. 삼성그룹, 대성그룹, 쌍용, 경창산업, 평화산업, 에스엘(주), 아세아텍, 지우개를 평정한 (주)화랑…. 이 모두 칠성바위가 자리한 칠성동에서 첫 둥지를 틀었습니다. 칠성바위는 칠성동을 넘어 대구의 보물이나 진배없습니다. 그동안 칠성바위는 피란촌의 판자촌에, 산업화의 연탄재에, 시끄러운 철길에 숨을 죽여왔습니다. 이제 때가 왔습니다. 지하철 대구역 비좁은 뒤뜰보다 북두칠성이 휜히 보이는 대구삼성창조캠퍼스 어디쯤 새 보금자리를 튼다면 다시 별(스타)을 찾는 이들을 구름처럼 불러들일 지도 모를 일입니다.
2025-03-14 05:30:00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35> 1970년대 중학교 진학 무시험 추첨 '뺑뺑이'
1970년 2월 3일. 운명의 날이 왔습니다. 오늘은 전국 10대 도시서 사상 첫 실시되는 중학교 무시험 진학 추첨날. 지긋지긋한 '입시지옥'은 언니, 오빠들까지만. 이제 뺑뺑 돌리기만 하면 중학교엘 간다니, 아이들은 아침부터 재잘재잘 신이 났습니다. 대기소는 중앙국(초)교(현 2·28 기념공원), 추첨장은 인근 대구여중(현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시험도 아닌데 교문 앞엔 학부형 수백 명이 목을 빼고 섰습니다. 추첨 첫날은 여학생들만. 추첨기는 모두 25대. 양과 질이 똑같은 은행 알을 학교별 배정수(8천8백59명) 만큼 만들고, 알 마다 학교별 번호를 써 25대에 균등하게 넣었습니다. 추첨은 학생이 직접 추첨기를 오른쪽으로 두 번 돌려 섞은 다음, 왼쪽으로 한 번 돌리면 진학할 학교 번호가 적힌 알이 나오는 방식. 1명 당 시간은 길어야 1분. 추첨기 한대로 한 시간에 6~70명씩 처리해, 추첨은 오후 3시쯤 끝이 났습니다. 남학생 1만3천52명이 추첨하는 4일은 꼬마들이 소풍이라도 온 듯 날뛰는 바람에 교사들이 진땀을 뺐습니다. "어제보다 훨씬 많네. 역시 아들이 좋은 모양…." 추첨장 교문 앞엔 학부형 수천 명이 길을 메웠습니다. '뺑뺑이'를 돌리고 나오는 아이들은 하나 같이 밝은 표정. 이제 최대 관심은 운명의 학교. 속타는 시간이 흘러 이날 오후 4시, 경북도 교육위원회가 극비리에 보관해 온 번호별 학교명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아뿔사! 난리가 났습니다. 도 교육위에는 소위 삼류학교에 걸린 학부형들의 욕설전화가 잇따라, 일부는 "차라리 시골로 가 지방학교에 가겠다"며 울분을 토했습니다. 남산동의 한 학부형은 당첨된 경명여중 위치를 묻는 전화에 직원이 "팔달교를 지나서 있다"고 잘못 말하자 전화통에다 대성통곡했습니다. 진짜 문제는 동촌 해안동에서 평리중에 배정된 아이. 30리(12km) 등굣길이 까마득했습니다. "하늘이 노오랗다. 땅이 빙빙 돈다." "혼자 이불을 덮어쓰고 울었다." "벌덕 일어나 손뼉치며 소리를 질렀다. 너무 기뻐 눈물이 날 정도였다." 아양국(초)교 어린이 글짓기에 드러난 동심은 온통 벌집 쑤신 듯 했습니다. 우등생이 삼류학교, 이름자도 못쓰는 아이가 일류학교 당첨도 다반사. 엇갈린 희비 속에 가는 곳마다 화젯거리였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중학교 무시험 진학은 1971년부터 전국으로 확대 실시됐습니다. 서울은 컴퓨터로, 지방에선 여전히 수동식 '뺑뺑이'를 돌렸습니다. 먼거리 배정을 막기 위해 대구·포항·김천에는 학군제가 도입되고, 면 단위 등 경북 182개 단일 학군에서는 등록금만 예치하면 진학할 학교가 결정됐습니다. 〈strong〉(매일신문 1970년 2월 4일~ 1971년 2월 12일 자)〈/strong〉 입시지옥·일류병을 없애자며 도입한 이른바 중학교 평준화. 해방후 25년 동안 지속된 입시가 사라지자 무엇보다 아이들이 밝아졌습니다. 발표력이 좋아져 교실은 더 쾌활하고 더 명랑해졌습니다. 악착스레 과외를 시킬 필요도 없어 학비 걱정도 줄었습니다. 1968년 겨우 55.9%에 머물던 중학교 진학율이 1972년엔 71%, 1979년엔 92,9%…. 평준화의 공이 이렇게 컸지만, 또 다른 숙제를 남겼습니다. 사라졌던 중학 입시지옥은 고스란히 고입(高入)으로, 다시 대입(大入)으로, 이제는 인 서울로, 그러다 보니 초등때부터 선행학습으로…. 뺑뺑 돌아 다시 입시지옥에 내몰렸습니다. 저 문턱을 넘자니 아이를 낳고 기를 자신이 없습니다. 인구 소멸도 속내를 보면 다 교육 때문. 1968년 그때, 잘 살려면 배워야 한다며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이라 했던 국민교육. 이제는 인구 소멸을 막을 역사적 과제가 됐습니다.
2025-02-14 05:30:00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34> 1960년대 '입시지옥' 중학교 입시
1966년 12월 3일 대구 한 여중 입시 체능고사장. 전날 필답고사를 치른 6학년 수험생들이 오늘은 영하 2℃의 쌀쌀한 날씨에도 운동장에 쪼그려 앉았습니다. 팔굽혀펴기 시험에 바득바득 용을 쓰는 아이, 차례를 기다리는 친구들, 운동장 멀리서 지켜보는 학부형 모두 초조하긴 매한가지. 이번 시험은 예년보다 쉽게 나와 체능고사에서 당락이 결정될 거란 소문에 운동장은 아침부터 긴장감이 돌았습니다. 중학 입시는 총 800점 만점. 국어·산수·사회·자연·반공도덕·음악·미술·실과 등 필답고사195문제에 780점. 체능고사는 달리기(60m), 넓이뛰기, 공던지기, 턱걸이(여자는 팔굽혀펴기) 등 4개 종목(각 5점 만점)에 20점. 이 가운데 팔굽혀펴기나 턱걸이는 한 개가 곧 1점을 갈라, 학생들은 말 그대로 젖 먹던 힘까지 쏟았습니다. 앞서 2일 필답 시험날 수험생과 학부형들은 새벽밥을 지어먹고 오전 7시부터 시험장으로, 대구 시내 경찰은 싹 다 동원돼 이들의 수송을 도왔습니다. "엿처럼 잘 붙어라~." 수재들이 모인 경북중학교 앞에는 엿장수·떡장수가 40~50명이나 몰려 북새통을 이루고, 그 틈새로 중학생 언니 오빠들은 '불우소년을 돕자', '합격' 이라 쓴 엿 봉지를 흔들며 졸졸 학부형을 따라다녔습니다. 이윽고 시작종이 울리고 운동장을 서성이던 학부형들은 시험이 끝나도록 떠날 줄 몰랐습니다. "내년부터는 과외를 묵인 하든가, 전면금지 하든가 해야 할 것…." 시험이 끝나자 공립학교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상부의 과외수업 억제정책을 따랐던 공립학교보다 학원출신 재수생과 국·사립학교에서 성적이 더 좋았기 때문. 공립학교 측은 "국·사립학교 학생들이 활개를 치며 과외를 한 때문"이라 성토했습니다. "정상교육 좀 먹는 과외를 전면 금지하고 학원을 폐쇄하라"는 강경론도 나왔지만 학부형들의 교육열은 막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1960년까지만 해도 학교별 시험문제를 냈던 중학 입시는 1961년부터 전국에서 같은 문제로 시험을 보는 국가고사로 전환됐습니다. 당시 일류 중학교 경쟁률은 평균 4대 1. 명문학교 진학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전국에 재수생이 2만명에 이르고, 가정교사를 두고 과외를 받는가 하면, 더 좋은 학교에 보내려 '치맛바람'도 생겨났습니다. 고작 중학교 입시인데도 합격자 발표날엔 명단이 신문 지상을 도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1964년, 서울 한 중학교 입시에서 '무즙파동'이 일어났습니다. '엿을 만들때 엿기름 대신 넣을 수 있는 것'을 묻은 문제에서 ①디아스타제 ②꿀 ③녹말 ④무즙 가운데 정답은 ①번. 하지만 일부 학부형들이 무즙에도 디아스타제가 들어있다며 반발해 재판까지 간 끝에 무즙도 정답으로 인정되는 홍역을 치렀습니다. 1968년 대구에선 원서접수 마감(11월 20일)을 5시간 앞두고 점장이집에 우르르 학부형들이 들이닥쳤습니다. "학교 성적은?" "그 학교는 안돼." "거긴 틀림없어." 거침없는 예언에 희비가 엇갈렸습니다. 아이들은 길거리에 철봉을 세우고는 번갈아 수험생, 채점관으로 예비시험까지 봤습니다. 그해 제일여중에서는 입학 정원과 지원자가 희한하게도 4백78명으로 똑같아 모두 무시험으로 합격하자, 지레 겁먹고 지원을 포기했던 교장과 학부형들은 무릎을 쳤습니다. 〈strong〉(매일신문 1962년 12월 5일~1968년 12월 13일 자)〈/strong〉 '무즙파동' 에 '입시지옥' 논란이 거세자 1968년 7월 문교부는 '중학교 무시험 진학'을 발표했습니다. 이에 따라 1969년 서울에서 처음 실시되고, 다음 해엔 대구 등 10대 도시에서, 1971년부터는 전국 중학교에서 입시가 사라졌습니다. 시험대신 도입한 건 '진학 추첨제'. 물레 모양의 추첨기를 뺑뺑 돌리면 나오는 은행 알에 적힌 번호에 따라 진학할 학교가 결정됐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2025-01-31 05:30:00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33> 1971년 동촌 금호강 얼음 채취
1971년 1월 12일 대구 동촌유원지 동촌장 여관(현 메르모텔 부근) 앞 금호강. "사그랑~삭" "사그랑~삭…." 얼음장 톱질은 나무를 베는 산판일에 비하면 그저 먹기. 소리마저 상쾌해서 인부들은 추운줄도 몰랐습니다. 두툼한 얼음판을 가로 30cm 세로 40여cm씩 네모꼴로 자르고는 묵직한 얼음 집게로 건져 올려 강가 트럭으로 날랐습니다. 벌써 나흘째. 매일 이렇게 10여 트럭씩 얼음을 떠갔습니다. 이들은 경북잠사회 잠업사업소 인부들. 채취한 얼음은 생활용이 아닌 잠종(누에씨) 저장용. 누에씨(알)는 월동하다 기온이 오른 4월 중순 쯤 깨어나(부화) 애벌레(누에)가 되는데, 유일한 먹이인 뽕잎이 5월은 돼야 피어나서 이때까지는 무조건 재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고안된 게 잠종냉장고. 석빙고처럼 땅을 반쯤 파서 만든 빙실에 얼음을 채워 늦은 봄까지 누에씨를 보관했습니다. 얼음을 채취하는 이곳은 매일 1천여 명이 찾아오는 스케이트장. 인부들은 달랑 '위험' 깃발 하나만 세워 놓고 야금야금 '운동장'을 잘라 먹었습니다. " 다른 곳도 많은데 하필 스케이트장에서…." 동촌파출소는 단속할 법이 없다며 구경만, 간이식당 주인들은 손님이 줄까 동동거렸지만 트럭이 강바닥까지 쑥 들어오는 이런 명당이 어딨냐며 인부들은 들은 채도 않았습니다.〈strong〉(매일신문 1971년 1월 14일 자)〈/strong〉 일제강점기, 양잠을 산업화하면서 곳곳에 건립했던 잠종냉장고. 지금껏 남아 있는 원형은 1915년에 만든 충남 최초의 공주 잠종냉장고 한 곳 뿐. 경북대 상주캠퍼스(옛 상주공립농잠학교)에는 1986년에 복원한 잠종냉장고가 있습니다. 1921년 상주공립농잠학교 개교 당시 건립돼 1960년대까지 사용하다 학교 이전 등으로 헐리자 이 학교 출신 이병춘(농잠 14회) 씨 성금으로 옛 모습을 되살린 것입니다. 잠종냉장고가 없던 시절엔 서늘한 자연 동굴이 곧 저장소. 기록에 의하면 일제강점기에는 전북 진안 대두산 기슭 풍혈이, 경북 의성 빙계계곡 빙혈과 풍혈은 아득한 조문국 시절부터 누에씨 보관소로 이용됐습니다. 특히 의성 빙혈과 풍혈은 1908년 발견 당시에도 잠종 저장소로 사용했다니 '빙혈의 재발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제강점기 대구엔 동촌 금호강에 얼음창고가 있었습니다. 위치는 현재 화랑교와 망우당 기념관 사이 언덕배기. 겨울이면 바로 아래 금호강에서 얼음을 떠 달구지로, 등짐으로 져 날랐습니다. 창고에 저장한 얼음은 초여름이면 고관대작 저택으로, 부잣집으로, 생선 가게로 팔려나갔습니다.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당시부터 대구는 명주실(견사)을 생산하는 제사공장이 즐비한 섬유도시. 누에씨(알)에서 부화해 자란 누에가 지은 고치를 풀어 질 좋은 견사를 얻으려면 무엇보다 튼실한 누에씨가 필요했습니다. 늦은 봄까지 누에씨를 저장하는 잠종냉장고에도 얼음은 없어선 안될 물건이었습니다. 금호강 얼음창고는 해방 직전까지 사용됐습니다. "1969년 제가 이곳에 처음 와서 본 얼음창고는 폐허로 잡초가 무성했지요." 그때부터 지금껏 동촌에 살고 있는 박석희(81·동남보트 대표) 씨는 1972년 이곳에 망우당공원을 조성하기 전까지 얼음창고 흔적이 남아있었다고 했습니다. 지난날 매일신문에서 찾아 낸 금호강 채빙 기록은 1956년, 1971년 단 2건. 얼음공장이 생기고 냉장고가 보급되면서, 누에씨를 저장하려 꽁꽁 언 금호강에서 얼음을 썰어대는 풍경은 다시는 볼 수 없는, 마지막 역사로 남았습니다.
2025-01-17 05:30:00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32> 산유국의 꿈, 1960~70년대 유전 개발
1965년 5월 30일 오후 8시 영일 유전 제3지구 포항시 해도동 석유 시추장. "터졌다~~!" 일순간 현장은 흥분의 도가니였습니다. 시추기(케이싱 파이프)가 지하 350m에 이른 24일부터 가스가 서서히 분출하더니 이날 밤 지하 408m에 이르자 맹렬히 치솟았습니다. 분출 압력이 손을 댈 수 없을 정도 여서 80cm 거리에서도 불이 확 붙었습니다. 1월 18일 시추 기공식 후 5개월 만이었습니다. 급보를 받은 김인 경북지사는 이튿날 현장으로, 상공부는 미 고문관 1명, 지질연구소 기술자 3명을 급파했습니다. 조사 결과 매탄 90%, 애탄 10%가 섞인 천연가스. "이 가스는 석유가 고인 오일 풀(oil pool)을 덮고 있는 지층에 도달했다는 확증." 유전 책임자 정우진 씨는 "이 가스 만으로도 공업화가 충분하다" 며 성공을 확신했습니다. 이제 가스층 아래에 진짜 오일 풀이 있는 지가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그러나 시추장은 금새 싸늘해졌습니다. 분 당 19리터(ℓ)까지 솟던 가스가 하루 만에 6리터(ℓ)로 뚝 떨어졌습니다. "공업화는 다 틀렸다." 그렇다고 멈출 순 없는 일. 여름 내내 파 들어갔습니다. 그러던 9월 17일, 지하 1천30m 지점에서 그만 화성암반에 부딪혔습니다. 상공부는 즉시 시추 중지령을 내렸습니다. 산유국의 꿈은 민족 숙원. 맨 처음 영일 유전 개발은 정부가 아닌 민간 석유 탐사원 정우진 씨가 1959년 고향 칠포리에서 고래 화석을 발견하면서 시작됐습니다. 고래 화석은 이 일대가 바다였다는 증거. 유전에 결정적 요소인 유공충(有孔蟲) 화석까지 나오자 정 씨는 유전 개발에 전 재산을 걸었습니다. 지질학자 귀동량에 일본 서적까지 뒤져 석유가 나올 만한 후보지 세 곳을 골랐습니다. 마침내 1964년 3월 12일, 영일 유전 제2지구 영일군 의창면 초곡동(현 포항시 흥해읍 초곡리)에서 첫 시추 기공식을 갖고 그해 5월 시굴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한 달도 못 가 실패. 시추기가 지하 암반에 끼여 두 달 동안 옴짝달싹도 못했습니다. 인근 두 번째 후보지(마산동)에서도 또 실패. 당시 장비는 외국에서 30년 전 퇴출된 충격식 시추기로, 암반을 뚫기엔 어림도 없었습니다. 1965년 '포항 해도동' 시추에서 가스층이 발견되자 이번엔 정부가 나섰습니다. 1967년 4월, 정부 초청으로 포항에 온 자유중국 석유공사 기술진이 11월까지 영일만 일대 3곳을 뚫었지만 모두 화성암 돌출로 실패. 당초 2년 동안 7~8곳을 시추키로 한 이들은 "화성암 지대엔 개발 가치가 없다" 며 이듬해 3월 짐을 싸 떠났습니다. 제1차 석유파동(1973년)에 휘청이던 1976년 1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의 연두 기자회견은 전국을 뒤흔들었습니다. "포항 상도동 지하 1천5백m 지점에서 석유가 몇 드럼 나 왔다." "질은 상당히 좋다." 이제 우리도 산유국이란 소식에 온통 흥분의 도가니였습니다. 그러나 그 감격도 잠시 뿐. 몇 드럼 나왔다던 석유는 원유가 아닌 인위적 정제를 거친 경유로 판명났습니다. '포항의 실패'를 만회할 제2의 석유 시추가 1979년 경북 의성에서 극비리에 추진됐습니다. 의성 일대는 당시 경북대 지질학과 장기홍 교수가 유력 석유 산지로 지목한 곳. 탐사 업체는 대구의 흥구석유(대표 서주원). 흥구석유는 방계회사인 중용광업을 통해 경북 일대에 석유 광업권을 따낸 뒤 그해 10월 의성군 다인면 가원2동에 첫 시추탑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이듬해 8월까지 철야 작업에도 석유는 끝내 솟지 않았습니다. 다시 시작하는 2025년 새해. 이번에는 '대왕고래' 프로젝트. 초유의 탄핵정국 속에 지난 달 20일 포항 앞바다에서 첫 시추가 시작됐습니다. 해 뜨는 동해에 정말 '대왕고래'가 살고 있는 지, 응어리 진 속이라도 후련하게 풀렸으면 좋겠습니다.
2025-01-03 05:30:00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31> 1970~80년대 대구 신천 안전 스케이트장
1985년 12월 28일 대구 중동교 상류 신천 안전 스케이트장. 한파로 꽁꽁 얼어붙은 빙판에서 겨울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엉거추춤 걸음마가 서툰 개구쟁이, 쌩~쌩~ 솜씨를 부리는 아이, 쭈볏쭈볏 점잔빼는 동네 아저씨 모두 신이 났습니다. 그해 겨울 대구는 말 그대로 엄동설한(嚴冬雪寒). 12월 8일부터 최저 영하 5~10℃의 혹한이 내리 스무날이나 지속돼 앞산을 덮은 눈조차 녹을 새가 없습니다. 신천이 얼어붙자 구청이 나섰습니다. 상동에는 수성구, 중동교 위엔 남구, 대봉교~수성교 하상은 중구, 도청교~성북교 구간은 북구, 동구는 동촌 금호강에, 서구는 감삼동(현 달서구) 무논에다 물을 채워 얼렸습니다. 안전 깃발에 안전 요원, 간이 화장실, 뜨끈한 오뎅(어묵) 국물이 그만인 간이 음식점까지 들인 스케이트장 입장료는 공짜. 그해 신천은 겨울 내내 잔치판이었습니다. 1960~70년대 대구 대표 겨울 놀이터는 동촌 금호강과 수성못. 수심이 깊다 보니 12월은 불안해서 스케이트광들은 어서 겨울 한복판, 1월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도심에서 너무 멀어 이 버스 저 버스 갈아타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기온이 오른날엔 살얼음판이 꺼지는 무서운 일도 잦아 대책이 절실했습니다. 1970년 12월 30일, 신천에 처음으로 안전 스케이트장이 문을 열었습니다. 남산여고 앞 드넓은 하천을 불도저로 싹 밀어 만든 아이스링크 넓이는 9천여 평(약 3만㎡). 선수용 경기장, 연습장에 어린이 썰매장도 갖췄습니다. 이 빙상장은 그 전 해부터 신인빙상대회를 주최해 온 매일신문사가 대구시와 함께 만든 합작품. 개장 첫날 시범경기를 구경하겠다고 입장료 20원에도 수천 명이 몰렸습니다. 스케이트가 부러웠던 아이들은 골목에서 썰매로 달랬습니다. 하수도가 변변찮아 길바닥에 흘러내린 구정물이 얼기라도 하는 날은 볼이 빨개지도록 탔습니다. 이런 아이들이 안쓰러웠던지 당국은 이듬해(1971년) 12월 말, 삼덕·동부·내당·옥산·인지국교(초교) 등 5곳 운동장에 미니 스케이트장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복병을 만났습니다. 이상난동(異常暖冬). 1972년 1월은 이상한 겨울이었습니다. 소한(小寒), 대한(大寒)에도 춥기는 커녕 봄날 같은 날씨가 겨울 방학을 다 망쳐놨습니다. 신천 안전 스케이트장엔 보트를 띄워야 할 판. 개장도 못하고 철수했습니다. 가게에 진열된 스케이트는 거의 반값에 준대도 쳐다도 안 봤습니다. 누구는 연탄 걱정을 덜었다지만 동심에겐 참 야속한 겨울이었습니다. 1974년부터 신천 안전 스케이트장은 더 위쪽, 상동까지 쫓겨났습니다. 수질이 나빠져 빙점이 낮아지고 생활 온수마저 흘러들어 결빙 기간도 더 짧아진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사정 때문일까? 그해 12월 23일 파동에 개관한 대구스포츠센터에 처음으로 실내 스케이트장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 빙상장은 수도권 외 지방 최초 시설로, 1995년 고성동에 전용 빙상장이 들어서기 전까지 우리나라 빙상은 물론 '빙상도시 대구'를 이끈 산실이 됐습니다. 그 원천은 다름 아닌 신천 놀이터. 금호강, 수성못이 너무 위험하다고 신천 자갈밭에 판을 깔아 준 덕에 아이들은 겨울이 즐거웠습니다. 얼음판을 빙빙 돌며 저토록 신나게 놀더니 오늘의 대한민국을 쇼트트랙 강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산업화, 도시화를 지나고 보니 온난화, 기후위기…. 매섭던 동장군도 맥을 못춰 이제 신천 강물은 얼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도 겨울은 얼음을 지쳐야 제맛. 오늘(20일)은 동장군 대신 전기로 얼린 스케이트장이 문을 열었습니다. 신천과 팔거천 두 곳에서 겨울잔치가 시작됐습니다.
2024-12-20 05:30:00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30> 1960년대 월남전 파병 그후
1971년 12월 9일 부산항 제3부두. 이윽고 미군 수송선에서 청룡부대 장병들이 쏟아졌습니다. 파월 6년만. 김종필 국무총리, 3부 요인, 가족·학생·시민 수만명이 성대히 맞았습니다. 비둘기·오색 풍선이 하늘을 수놓고, 다섯 대의 경비행기에서 뿌린 꽃가루가 부두를 뒤덮었습니다. 부산 데레사여고생들의 합창 '개선 행진곡'은 청룡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남(자본주의)과 북(공산주의)이 싸운 베트남 판 남북전쟁, 월남전(越南戰·1955∼1975). 1964년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전쟁에 뛰어든 미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존슨 미 대통령, 응웬칸 남베트남 총리가 잇따라 우방국에 원군을 요청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파병을 결정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생존을 위한 결단이었습니다. 1964년 9월 의무중대, 태권도 교관단 파병. 이듬해 3월엔 백구부대(해군수송단)와 비둘기부대(건설지원단)가 출병. 9월엔 포항에서 청룡부대(해병 제2여단)가 군장을 꾸렸습니다. 이어 맹호(수도사단)·십자성(군수사령부)·백마(제9사단)·은마(공군지원단)부대가 1967년까지 잇따라 전장으로 향했습니다. 일 최대 상주 병력 5만명. 미군 다음으로 많은 파병이었습니다. "한국군과 교전은 피하라." 얼마나 독했던지 월맹(북베트남) 수장 호찌민은 혀를 내둘렀습니다. 1966년 6월, 호찌민도 도리 없이 김일성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해 10월부터 북한이 파병한 규모는 조종사 96명 등 384명의 공군 전투부대와 소규모 비전투부대(베트남 측 기록). 다 합쳐도 1천명 안팍. 얼굴도 못들 형편이었지만 김일성은 다 계획이 있었습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공작원 31명이 30kg 군장에 시속 10km로 산을 타 청와대 코앞까지 들이쳤습니다. 허가 찔린 1·21 사태.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 생포된 김신조의 기자회견은 국민들은 경악했습니다. 그 다다음 날, 북한은 자기네 영해를 침범했다며 공해상에 있던 미 해군 정찰함 '푸에블로호'를 강제로 끌고 갔습니다. 1월 26일, 박정희는 즉각 보복을 명령했습니다. 김신조 일당과 똑같은 31명으로 1968년 4월에 북파키로 했습니다. 그래서 '684북파부대', 실미도 부대가 급조됐습니다. 이어 4월 1일엔 향토를 지키자며 예비군을 창설했습니다. 이런 우리를 시험하듯 북한은 그해 10월부터 늦가을까지 울진·삼척에 무장 공비를 120명이나 풀었습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아홉 살 이승복을 공비들은 입을 찢어 죽였습니다. 간첩을 가려내려 11월 21일부터 주민등록증이 발급되고, 이듬해(1969년) 1월 9일엔 고교에 교련이 도입됐습니다. 유사시 학생도 동원키 위한 조치였습니다. 북한은 그러나 꿈쩍도 않았습니다. 그해 3월 주문진에 무장공비 침투, 4월 미 정찰기 격추, 6월 흑산도에 간첩선 침투, 12월엔 강릉발 서울행 칼(KAL)기도 납치해 갔습니다. 〈strong〉(매일신문 1965년 9월 20일~1973년 2월 3일자) 〈/strong〉 파병을 막겠다고 이렇게 들쑤셨지만 김일성의 계략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1964년부터 1973년 철군까지 베트남 파병 연 인원은 무려 32만명. 그 대가로 중화학 공장을 지어 수출하고, 경부고속도로를 닦고, 군장비도 현대화했습니다. 북한에 밀리던 군사·경제력이 보란 듯이 앞지른 시기도 이 무렵. 그때 박정희는 김일성보다 몇 수 위였습니다. 2022년 2월 24일,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습니다. 금방 끝낸다던 전쟁이 3년째 수렁에 빠졌습니다. 이번엔 김정은이 결단했습니다. '러시아의 요청'은 명분. 파병 대가는?고립무원 김정은의 속내는? 베트남 파병 60년 만에 남북이 또 수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2024-12-06 05:30:00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29> 1970년대 초 금호강 모래 채취
1972년 11월 늦가을 대구시 북구 팔달교 상류 금호강. 해가 짧아져 강물도 차가운데 물장화에 빵모자, 수건을 두른 마부들은 연신 물속으로 말고삐를 다잡았습니다. 강기슭 모래는 벌써부터 다 파먹고 동이 나 멀리 더 멀리 바퀴가 잠기도록 말을 몰았습니다. 모래를 퍼 나르는 말달구지는 어림잡아 10여 대. 한 바리 할 때마다 품값을 쳐주니 마부들의 등살에 조랑말은 숨 돌릴 새가 없습니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하천마다 지천으로 널려 아이들이 두꺼비집이나 짓던 모래가 때를 만났습니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이 무렵, 사리(沙利) 즉 모래와 자갈은 필수 건축재. 다리를 놓고 주택을 개량하고 공장을 짓는데 철근, 시멘트가 아무리 귀하다 해도 모래 없이 되는 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천마다 이렇게 모래를 긁느라 야단이었습니다. 그 중에도 모래 채취 최적지는 금호강. 비만 오면 헐벗은 산등에서 미끄러진 토사가 샛강을 타고 흘러들었습니다. 자호·고촌·신령천(영천), 청통·오목·남천(경산), 불로·동화·팔거천(대구)을 지나 이곳에서 수북이 백사장을 이뤘습니다. 영천에서부터 경산, 대구 팔달교에 이르는 구간은 실어내는 길도 좋아 그야말로 노다지였습니다. 약삭빠른 업자들은 앉은 자리에서 권리금까지 붙인 채취권을 되팔아 삽 한번 뜨지 않고 큰 돈을 만졌습니다. 바가지를 쓴 영세업자들은 본전을 찾겠다고 애꿎은 인부들의 노임을 후렸습니다. 얼마나 퍼냈는지 표도 잘 안나 허가량을 속이는 건 일도 아니었습니다. 퍼 담으면 모두 돈이어서 갈수기 땐 강바닥까지 트럭을 들이밀고 실어 날랐습니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1970년 7월 7일 준공) 공사가 한창이던 무렵엔 없어서 못팔았습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공사 시즌에는 '모래'가 아니라 '금싸라기'였습니다. 급기야 당국은 고속도로 공사장 2km 내에서는 고속도로 공사용 외엔 사리 채취를 못하게 했습니다. 그 후에도 사리 채취는 각급 도로 공사가 우선. 단 새마을 가꾸기, 교실 증축용 만큼은 예외였습니다. 새마을 운동에다 각종 공사로 사리 수요가 폭증한 1971년 2월, 경북 도내 대부분의 하천 바닥이 기준 이하로 낮아져 빨간불이 켜졌습니다. 일부 업자들은 홍수에 떠밀려 개인 소유 밭에 쌓인 자갈까지 쓸어갔습니다. 눈을 피해 밤중에 라이트를 끈 채 하천을 드나드는 일도 다반사. 금호대교, 무태 잠수교 주변에선 허가량 보다 무려 다섯 배나 더 파냈습니다. 이 때문에 홍수기엔 제방이 힘을 잃고 잠수교 다리는 맥 없이 주저앉았습니다. 군데 군데 웅덩이가 생겨 멱감던 아이들이 변을 당하는 일도 잦았습니다. 1972년 대구 8km 구간 금호강에 설치된 위험 표지판은 33개. 모래 채취로 웅덩이 위치가 수시로 바껴 이 마저도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1973년 9월부터는 금호강 팔달교 일대에서 칠곡 지천까지 모래 채취가 전면 금지됐습니다. 강바닥을 너무 긁어 팔달교 교각이 붕괴 위험에 처한 때문이었습니다. 모래 운송이 손쉬워 무태·조야·노곡·팔달교 언저리를 맴돌던 채취꾼들은 점점 더 아래로, 1981년 6월엔 달성군 다사면(읍) 금호강 끝단까지 밀려났습니다. 1980년 12월 영천댐 준공, 1981년 공산댐 완공…. 산림도 우거지고 모래길도 끊긴 지 오래. 금호강 백사장은 점점 자갈밭으로 변해갔습니다. 산업화가 한창이던 그 무렵, 논밭을 적셔주고 공업용수, 식수에다 모래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던 금호강. 금호강은 오늘의 대구를, 경북을 키워낸 어머니였습니다.
2024-11-22 05:30:00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28> 1968년 동대구 개발 신호탄, 동대구역 건설
"현 역사(驛舍) 동대구로 이전" 1967년 11월 12일, 극비의 '대대구 건설' 청사진이 베일을 벗었습니다. 핵심은 1968년 말 준공 목표로, 화물역으로 건설중인 동대구역을 여객전용으로 바꾼다는 것. 이에 따라 1969년 새해부터는 동대구역에서 여객업무를 보고, 대구역은 화물만 취급하다 평리동에 화물 전용역 신설 후 아예 문을 닫기로 했습니다. '철도는 남북 분할, 신천은 동서 분할'. 여객용 동대구역 건설은 대구 시가를 동쪽으로 확장하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인구는 느는데 도심은 비좁아 중앙통(로)을 넓히려다 내린 결단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황무지나 다름없던 구릉지 신천·신암·효목동은 새로운 황금시대로, 개발에 포함된 수성·범어·만촌 들판마저 땅값이 들썩했습니다. 1년이 지난 1968년 12월 25일, 하늘에서 본 동대구역사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여객 업무를 볼 새해가 코앞인데 역사 본관은 아직도 골조 공사. 주택과 상업지구를 겸한다는 신천동은 허허벌판. 논밭 사이로 낸 도로는 먼지가 풀풀 날렸습니다. 1966년 7월 16일 동대구역 기공식을 하고도 기반 공사가 늦어져 지난 6월 25일에서야 역 본관을 착공했으니 연말 준공은 누가 봐도 역부족. 새해부터 이곳에서 기차타기는 다 틀렸습니다. 그해 12월 27일 밤, 철도청은 부랴부랴 동대구역장에게 '영업개시 보류'를 통보하고 대합실에 내건 열차 시간표도 뜯게 했습니다. 1층 만이라도 완공해 새해엔 틀림없이 업무를 보겠다던 약속은 결국 헛말이 됐습니다. 설상가상으로 29일엔 받침대가 틀어져 공사중인 본관 2층 옥상 슬라브가 무너지고, 강추위로 공사마저 중단돼 '동대구역 시무(始務)'는 해를 넘기고도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돌아간 건 다 돈 때문이었습니다. '대대구 건설'을 지원하겠다던 정부 공약은 번번이 예산에서 제외됐습니다. 1967년 상반기에 착수키로 한 동서관통로(현 달구벌대로), 1968년 말까지 계획한 제3공단 조성도 지지부진. 1968년 4월에 첫 삽을 뜨려 했던 신천 동부지구·신암지구 구획정리는 5개월이 지나도록 손도 못 댔습니다. 시장, 부시장, 국회의원들은 안달났습니다. 정치적 고향 대구를 음양으로 지원했던 박정희 대통령도 도리 없었습니다. 이유는 제2차(1967~1971)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3년 반 만에 끝내자는 통에 이쪽이 더 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할 일이 태산인데 돈줄이 막혀 신문 지상엔 '대대구 건설 휴지화'란 탄식이 쏟아졌습니다. 대구시는 시유지인 서문시장과 교동시장을 민간에 팔기로 했습니다. 서문시장은 1만2천1백55평 중 도로를 뺀 8천평(26,446㎡), 교동시장은 4백56평 가운데 3백평(992㎡). 이렇게 해서 마련한 55억원을 대대구 개발에 쓰기로 했습니다. 1969년 6월 9일, 우여곡절 끝에 동대구역이 준공돼 이날 오후 3시 역 광장에서 시무식이 열렸습니다. 구경 나온 시민들이 1만여 명. 넓은 광장이 명절처럼 붐볐습니다. 10일 0시 46분, 한밤 적막을 뚫고 동대구역에 첫 기적이 울렸습니다. 연한 마찰음을 내며 도착한 열차는 부산발 서울행 보통급행 '은하'호 였습니다. 〈strong〉( 매일신문 1966년 2월 18일~1969년 6월 11일 자)〈/strong〉 동대구엔 신도시, 서대구엔 제2공단(성서), 남대구엔 두류산 종합대공원, 북대구엔 제3공단…. 강계원 시장(1964.1~1966.5)이 설계하고 태종학 시장(1966.5~1969.10)이 불도저처럼 밀어붙였던 대대구 건설. 동서관통로 공사가 늦어지면서 제2공단 건설은 보류됐지만 동대구역은 청석받이 구릉지 신천 동부를 신시가로 탈바꿈 시킨 일등공신이었습니다.
2024-11-08 05:30:00
(사)대구서부범죄피해자지원센터, 지역문화 탐방행사 가져
(사)대구서부범죄피해자지원센터는 지난 2일 심기봉 이사장을 비롯한 센터 임원, 대구지검 서부지청 서제원 피해자 전담 검사, 회원, 피해자 가족 등 89명이 참가한 가운데 경주, 울산 지역 문화유적을 둘러보는 제5회 누리보듬과 함께하는 지역문화탐방 행사를 가졌다. 대구서부범죄피해자지원센터는 2007년 법무부 승인 후 창설된 비영리 공익법인으로, 대구시 서구·달서구, 달성군 및 경북 성주·고령 내 범죄 피해자와 가족들의 피해 회복을 위한 다양한 봉사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24-11-06 18:14:18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27> 1963년 군인에서 대통령으로 고향 찾은 박정희
1963년 10월 18일, 대구관광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은 박정희 대통령 당선자는 곧장 구미로 향했습니다. 15일 실시된 제5대 대선에서 개표 초반부터 여지없이 밀리다 16일 새벽이 돼서야 경상·전라·제주에서 나온 몰표로 막판 뒤집기. 15만6천26표 차, 기적같이 윤보선 후보를 누른 벅찬 가슴으로 맨 먼저 고향으로 달렸습니다. 오전 10시 20분, 세단 승용차로 도착한 고향 상모리엔 벌써부터 말끔히 차려 입은 100여 동민이 마을 어귀까지 마중을 나왔습니다. "평안하셨습니까?" "아주머니 안녕하셨어요?" 박 대통령은 이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청해 안부를 묻고는 뒷산 선영(先塋)으로 향했습니다. 상모리 생가에서 선영까지는 1.5km. 비탈길을 구두에 넥타이 차림 그대로 올랐습니다. 양장을 곱게 입은 육영수 여사도 코고무신으로 뒤를 따랐습니다. 논두렁엔 알이 꽉 찬 벼이삭, 산자락엔 흐드러진 들국화. 선거전이 워낙 치열해 이 가을에 이렇게 금의환향(錦衣還鄕)하리라곤 꿈에도 몰랐습니다. 선영은 좌판도 비석도 없이 초라한 그대로. 제물은 통닭 한 마리에 밤, 대추, 탁주가 전부. 박 대통령은 무릎 꿇어 술 한 잔으로 당선을 고했습니다. 다소곳이 지켜보던 육 여사도 며느리에서 이젠 국모(國母)로 큰절을 올렸습니다. 성묘를 마친 박 대통령 내외는 뒤돌아 고향 산천을 한참 내려다 봤습니다.〈strong〉(매일신문 1963년 10월 18, 19일 자)〈/strong〉 헐벗은 민둥산, 그 자락으로 구불구불한 논두렁. 옹기종기 앉은 마을은 전봇대도 없는 온통 초가집. 문명이라곤 희미하게 들판을 가로지른 한 줄 경부선 철길 뿐. 1963년 이곳은 여전히 가난한 농촌이었습니다. 저 들판에 가뭄이, 아니면 홍수로 탁류가 무시로 들이쳐 보릿고개를 넘고 또 넘던 유년의 고향, 딱 그대로였습니다. 돌아보면 참 격랑의 세월. 이곳에서 대구사범학교로, 문경에서 교편도 잠시. 만주국 군관학교에서부터 줄곧 군인의 길을 걷다가 무능한 정치, 부패를 보다 못해 민생고를 내손으로 해결하겠다며 유서까지 써 놓고 '군사혁명' 이름으로 정치판에 뛰어든 군정(軍政) 2년 3개월. 이제 떳떳하게 대통령에 올라보니 눈앞엔 모든 게 산더미. 성묫길 내내 사진 속 그의 얼굴엔 말이 없었습니다. 두 달 뒤인 12월 17일, 대통령 취임식으로 제3공화국이 시작됐습니다. 이날은 한국 정치사에 큰 전환점이었습니다. 4·19혁명으로 들어선 제2공화국의 의원내각제는 5·16 군사 쿠데타로 11개월 만에 종지부. 헌법을 바꿔 권력은 의회에서 다시 행정부로, 그것도 이승만의 자유당 시절보다 더 힘이 센 강력한 대통령 시대를 예고했습니다. 박 대통령의 당면 과제는 재건을 넘어 조국 근대화. 가는 곳 마다 큼직하게 쓴 '증산·수출·건설'이 눈앞을 따라다녔습니다. 증산은 경지정리·다단계 개간으로, 수출은 구로(서울)·사상(부산)·제3공단(대구) 조성으로, 건설에는 무엇보다 철강이 필수라며 포항 모래벌에 제철소를 꿈꾼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가난을 벗어보자는 주름진 농민들, 동생 학비를 벌겠다며 공장을 돌리던 여공(女工)들, 가족들이 눈에 밟혀 밤낮을 모르던 산업 일꾼들…. 박 대통령 뒤에는 이렇게 야무진 원군이 있었습니다. 묵묵히 구슬을 꿰, 기어이 헐벗은 강산을 옥토로 바꾸었던 3천만 국민이 있었습니다. 모두 우리의 아버지·어머니, 형님·누이들이었습니다.
2024-10-25 05:30:00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26> 1967년, 1970년 두 번 열린 포항종합제철 기공식
1967년 10월 3일 오후 2시 경북 영일군 대송면 동촌동(현 포항시 남구). 푸른 파도 철썩이는 바닷가에서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오늘은 벼르고 벼르던 영포지구종합제철공업단지 기공식 날. 두루마기 촌로, 양복을 빼입은 신사, 교복 차림의 학생, 까까머리 꼬마까지 줄 잡아 10만 인파.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 모였습니다. 포항 거리마다 청사초롱, 만국기가 나부끼고 새벽부터 100여 대의 버스·승합택시·트럭이 지방민들을 실어 날랐습니다. 트럭 짐칸도 못 얻어 탄 주민들은 먼지가 풀풀 나는 비포장길을 하염없이 걸으면서도 "선거 때 찍은 내 한 표는 되찾았다"며 저마다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철강공업이 없는 산업발전은 '제발로 서지 못하는 문어'. 각고의 노력으로 1966년 12월 6일 미국 피츠버그에서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이 발족되고, 우여곡절 끝에 이들이 빌려주기로 한 외자 1억불과 내자 151억8천100만원으로 건설하게 된 연간 60만톤의 철강 생산기지. 당초 기공식은 1일로 예정됐으나 국군의 날과 겹쳐 개천절 공휴일인 이날로 택해 더 많은 인파가 몰렸습니다. 해병대 주악으로 시작된 식은 건설부의 사업 설명, 내빈들의 일장연설, 여고생들의 전진의 노래에 이어 기공을 알리는 발파음에 오색 풍선이 창공을 수놓으며 끝이 났습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40분 남짓. '동양 최대 공장 건설'이란 소문에 잔뜩 기대하고 왔건만 여흥을 풀 행사도 없이 싱겁게 끝났습니다. 우천으로 연기된 국군의 날 행사가 이날 열린 바람에 박정희 대통령 얼굴은 구경도 못했습니다. 대신 참석한 장기영 부총리는 전날 내각개편으로 경질돼 하필 이날이 퇴진하는 날. 장 부총리마저 밋밋하게 치사를 끝내고는 식 도중 총총걸음으로 퇴장하자 그만 잔치판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볼 것도, 먹을 것도 없어 김빠진 기공식. 우르르 돌아가는 길만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기공식은 그렇다 쳐도 문제는 그 다음. 이듬해 4월 1일, (주)포항종합제철이 창립되고 제철소의 꿈을 한창 키워갈 무렵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쳤습니다. "한국의 60만톤 제철소는 경제적 타당성이 없다…." 1969년 4월, KISA는 IBRD(국제부흥개발은행)의 이 같은 전망 보고서를 내밀며 끝내 차관 제공을 거부했습니다. 4년간 공들인 KISA를 통한 제철소 건설은 한 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졌습니다. 돈줄이 막혔으니 공사는 제자리 걸음.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새 돌파구가 절실했습니다. 이 무렵 한창 논의 중이던 대일청구권 자금은 한줄기 빛. 정부 당국자들에게 그것은 마치 제철소를 위해 준비된 구원투수 같았습니다. 일본 철강업계, 경제계, 정계 인사들을 찾아 집요한 설득 끝에 마침내 새 길을 찾았습니다. 제3차 한일각료회담 이틀째인 1969년 8월 27일, 정부는 일본측으로부터 포항종합제철 건설 지원을 이끌어냈습니다. 대일청구권 자금 중 농림수산 분야 자금을 제철소 건설에 전용할 수 있게 하고, 부족분은 일본수출입은행 차관으로, 공장도 60만톤에서 103만2천톤 규모로 키워 신일본제철 기술로 짓기로 했습니다.〈strong〉(매일신문 1967년 9월 26일~ 1970년 4월 3일 자)〈/strong〉 1970년 4월 1일, 3년 전 첫삽을 뜬 그 자리에서 다시 기공식이 열렸습니다. 백사장과 개펄, 무논, 솔밭을 쓸어 모은 공장 부지는 350만평(약 1천157만㎡). 이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공업국가 건설에 철강은 가장 근간" 이라며 "철강공업을 빨리 육성해 기계·조선·자동차·건설·군수산업 등을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박태준 포항종합제철 사장은 "대일청구권 자금은 선조들의 피의 대가"라며 "공사 기일을 맞추지 못하면 우리는 전원 저 오른쪽 영일만에 들어가 빠져 죽는다"며 각오를 다졌습니다. 1973년 6월 9일 오전 7시 30분, 마침내 제1고로에서 첫 쇳물이 쏟아지고 7월 3일 종합제철 1기 설비가 준공됐습니다. 준공 후 반세기가 흐른 지금 철강 생산(3천844만톤) 세계 7위(2023년 기준), 월드 스틸 다이내믹스(WSD) 선정 철강사 경쟁력 14년째 세계 1위. 오늘의 포스코는 그때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2024-10-11 05:30:00
경상북도 행정동우회(회장 김영재)는 지난 4일 동우회원 120명이 참여한 가운데 봉화군 내성천을 찾아 생활 쓰레기를 수거하며 자연정화활동을 가졌다.
2024-10-07 14:10:00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25> 1957년 문경 시멘트공장 준공식
1957년 9월 26일 경북 문경군 점촌읍(현 문경시) 신기동. 난생 처음 보는 우람한 건물이 가을 하늘로 우뚝 섰습니다. 마침내 다가온 문경 시멘트 공장 준공식. "공장이 근대식으로 준공됨에, 앞으로 시멘트를 많이 만들어서 전란을 입은 우리나라를 하루 속히 재건해야…." 이승만 대통령의 치사에 준공식장은 내빈과 2천여 학생, 주민들의 만세 함성으로 달아올랐습니다. 6·25 동란으로 폐허가 된 국토 재건은 지상 과제. 유엔(UN)에서 운크라(UNKRA·유엔한국재건단)가 창설돼 1953년부터 본격 원조가 시작됐습니다. 재건에 필요한 3대 기간 산업은 비료(식량 증산), 유리와 시멘트(건설). 비료 공장은 충주에, 판유리 공장은 인천에, 시멘트 공장은 원석(석회석)이 풍부하고 연료 수송이 쉬운 문경이 적지로 낙점됐습니다. 이렇게 문경 시멘트 공장은 '국토 재건'이란 역사적 사명으로 태어났습니다. 890만 달러 원조로 덴마크 최신 기술로 세운, 운크라 최대 사업이었습니다. 석회석을 1천500도 이상 고온으로 굽는 소성로(킬른) 2기에 생산량은 연간 20만톤. 국내 시멘트 수요의 3분지1을 감당하고 3년 뒤엔 2기를 더 지어 동양 최대인 연간 40만톤, 필요량의 70%까지 책임지기로 했습니다. 시운전 끝에 그해 11월 21일 첫 완제품 1만2천 포대(560톤)가 출하됐습니다. 판매가는 대당 1천400환. 시중가(2천300환) 보다 대폭 싸게 각지로 공급됐습니다. 이 무렵 벌인 월포·구룡포·감포·양포 방파제 공사, 안계 위양교·포항 오천 세계교·영양 대천 잠수교·현풍 차천 잠수교·안동 길안 잠수교 공사에도 야무진 시멘트가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이제 비만 오면 폭삭 주저 앉던 나무다리 걱정은 덜게 됐습니다. 공장은 당초 계획대로 민간에 불하돼 12월부터는 대한양회가 인수, 운영했습니다. 인수금은 60억환. 덴마크로부터 4개월 간의 기술 강습으로 운영 기술도 온전히 넘겨 받아 종업원 334명 모두 한국인으로 공장을 돌리게 됐습니다. 〈strong〉(매일신문 1957년 9월 26일~1958년 6월 14일 자)〈/strong〉 새마을사업이 한창이던 1970년대, 시멘트는 '건설의 감초'. 도로, 주택, 공장 등 건설 현장마다 시멘트가 부족해 물건을 받으려는 화물차들이 줄지어 며칠씩 기다려야 했습니다. 공장 옆엔 전용 비행장에 농구장, 축구장, 기생집도 생겨났습니다. 한창일 땐 종업원이 500여 명, 인근 협력 업체까지 더하면 1천여 명에 달해 무명의 한촌(寒村)이던 신기 들판은 근대화를 이끄는 공업지대로 탈바꿈했습니다. 공장은 다시 1975년 쌍용양회에 인수돼 역사적 사명을 감당해 오다 지난 2018년, 마지막 심장을 멈췄습니다. 태어난 지 61년 만입니다. 공장은 멈췄지만 근대화의 상징, 산업유산으로 또 다른 부름을 받았습니다. 지금 이곳엔 뉴딜사업이 한창입니다. 운크라 원조시설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한 곳. 전후 재건,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 그 역경과 도전의 세월을 시멘트 생산으로 함께 해온 이곳이 '대한민국 시멘트 역사의 성지'로 다시 태어나길 소망합니다.
2024-09-27 05:30:00
통일을 실천하는 사람들 대구본부, '탈북1호' 안찬일 박사 초청 토크 콘서트 개최
통일을 실천하는 사람들 대구본부 (상임대표 오장홍 )는 24일 우정구 전 대경언론인회 회장을 비롯한 시민단체 대표, 통일 관련 지도자 등 2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구 중구 매일빌딩에서 2024 코리안드림 통일공감 토크 콘서트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탈북1호 박사인 안찬일 세계 북한연구센터 소장은 "북한 김정은 체제의 4대 세습 움직임과 최근 불거진 두 개 국가론, 통일반대 주장이 남북 청소년에게 통일에 대한 관심을 촉진시키고 있다" 고 분석하고 "이런 결과가 통일을 앞당길 수 있다" 며 대비를 촉구했다.오장홍 대표는 한반도 평화통일이야말로 갈등과 대립의 역사를 청산하는 길" 이라 말하고 "오는 28일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에서 가질 코리안 드림 천만 시민캠페인의 하나인 통일실천 대행진에 지역민들이 많이 참석해 줄 것을 호소했다.
2024-09-25 16:11:36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24> 1959년 추석날, 아! 사라호
1959년 9월 17일 추석날. 새벽 바람이 수상쩍더니 차례상을 후려치는 비바람이 몰아쳤습니다. 이날 새벽, 제주를 휩쓸고 통영에 상륙한 제14호 태풍 '사라'. 오후 들어선 경북을 표적 삼아 무섭게 내달렸습니다. 대구·청도·경산, 영천·경주·포항, 안동·청송·영덕을 지나 울진까지 초토화. 도처가 눈 뜨고 볼 수 없는 '물지옥'이었습니다. 이날 오후 8시,대구 동촌 아양교는 이미 위험 수위. 날이 밝자 유원지 점포와 가옥 50여 동이 몽땅 떠내려갔습니다. 신천 상류 파동, 검단·서변·불로동 제방은 간데 없고, 신암·산격·북비산 저지대는 물바다로, 달서천이 역류한 원대동 일대 논밭은 황톳빛으로 잠겼습니다. 영천에선 17일 오후 2시쯤 금호강 물이 영천교 남쪽 제방을 타고 넘었습니다. 놀란 주민들이 우르르 영천역까지 도망 왔지만 강물도 뒤쫓아 들이쳤습니다. "이거 큰일이다." 영천역 조역(助役) 임경현 씨는 기관차에 화물 열차 20량을 달아 주민들을 실어 날랐습니다. 왕복 세 번으로 2천400명이나 구했습니다. 18일 영천 금호면(읍)에선 익사자가 13명. 이날 정오 현재까지도 물에 잠긴 진량·안심 일대에선 경찰 보트가 고립자를 구하느라 이리저리 바쁘고, 하늘에선 헬리콥터가 뿌린 구호식량, 건빵 봉지가 쏟아졌습니다. 경산 고산(현 시지) 저지대도 침수돼 고산지서 이종능 경사는 나룻배 하나로 주민을 76명이나 살렸습니다. 월성(경주)에선 외동 입실천, 천북 신당천, 안강 칠평천 등 물길이 죄다 터져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큰물, 형산강이 범람한 강동면 일대는 3천여 가옥이 물밑으로. 강둑 옆 낙산리(현 오금1리)는 마을이 통째(가옥 57호 유실) 잠겼습니다. 태풍과 해일이 쌍으로 덮친 포항 해도동 일대에서도 침수 가옥이 6천여 호에 달했습니다. 안동 용상동 주민들은 추석날 오후 5시쯤 반변천 물이 선어정 산등을 넘는 걸 똑똑히 보고는 하얗게 질렸습니다. 용상동 일대는 순식간에 쑥대밭, 산 너머 와룡국교도 휩쓸려 한동안 안동에선 '용자 든 이름은 짓지 말라'는 말까지 돌았습니다. 영양의 곡창지대 영양면(읍) 현1,2동 들판도 자갈밭으로, 청송은 외지로 가는 도로가 싹 끊어지고 석유·양초까지 동나 고립무원. 진보로 통하는 길을 뚫는다고 이유백 파천면장부터 어린아이까지 지게로 꼬박 나흘간 돌을 날랐습니다. 영덕 강구항은 말 그대로 물지옥이었습니다. 청송·영일(포항)·영덕에서 50개의 내가 모여든 오십천 강물이 해일과 부닥치며 수위를 8m나 올려 강구 시가를 삼키고 20t급 발동선 6척을 10m 절벽 위 국도로 내동댕이쳤습니다. 순식간에 거지꼴로 오들오들 떨며 차가운 밤 바다를 서성이는 5천여 강구 이재민들…. 상인 신동휴 씨가 추석 대목을 본 400만환이 든 궤짝, 1억5만환이 든 동해수산(대표 김원규) 금고도 못 건지고 다 떠내려 갔습니다.〈strong〉 (매일신문 1959년 9월 19일~9월 27일 자)〈/strong〉 태풍이 빠져나간 길목, 울진에서는 초가지붕이 물에 둥둥. 근남·기성·온정·평해까지 다 쓸고 갔습니다. 오갈 데 없는 66세대 300여 주민들은 이듬해 4월, 정부 주선으로 휴전선 아래 불모지, 철원으로 눈물을 훔치며 집단 이주했습니다. 사망·실종 280명(전국 849명), 부상 1천277명(전국 2천533명), 이재민 40만8천83명, 구호대상자 19만9천201명(1959년 9월 28일 집계 경북 인명 피해). 평균 초속 45m(최대 초속 85m), 한나절만에 150mm가 넘게 내린 폭우에 재산 피해는 말도 못해 복구에는 처음으로 군 병력이 동원됐습니다. 해방 후 이보다 더 무서운 태풍은 없었습니다. 1959년 그날, 고향 진주에서 명절 휴가 중이던 신정식 상등 해병은 교통 두절에도 가야 한다며 포항까지 500리길을 4일 동안 걸어서 기어이 제시간에 귀대했습니다. 물지옥 속에서도 살아야 한다고 악착 같이 헤쳐 나온 형님·누이, 아버지·어머니들…. 모두가 '상등 해병'이었습니다.
2024-09-13 05:30:00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23> 1958년 대구 신천 푸른다리
1958년 여름날 대구 신천 경부선 철도교(푸른다리). 기적소리 요란한 기관차가 지나간 다리 위에 다시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이 일대 다리라곤 멀리 신천교(현 칠성교)와 수성교 뿐이어서 위험해도 신천을 건너기엔 기차가 드문 철길이 지름길. 물동이를 인 아낙네, 중절모 신사, 시장 가는 엄마도 양산 그늘에 아기를 등에 업고 하늘 높은 철길을 꼬물꼬물 걷습니다. 푸른다리 일대는 피란민이 모여 살다 눌러 앉은 곳. 다리 아래는 갈 곳 없는 고아, 넝마주이 부랑아들이 우글대는 우범지대. 서울로 진출한 거지왕 김춘삼도 이곳 출신이었습니다. 다리 위 철길에선 인명사고가 잇따라 '희망의 다리'로 바꿔보자고 파란색을 칠해 '푸른다리'로 불렸지만 현실은 '절망의 다리'였습니다. 부랑아들은 휴지나 고물을 주워 팔아 끼니를 해결했습니다. 1961년 4월 무렵엔 푸른다리파 일명 '해파리' 일당이 부쩍 행패를 부렸습니다. 교동 강산면옥 앞 구두닦이 소년까지 건드리고 돈을 뺏었습니다. 그해 3~4월 두 달 동안 경찰에 걸린 것 만 10여 건. 경찰이 뜨면 그때뿐, 푸른다리는 늘 이들의 아지트였습니다. 푸른다리는 '마의 철교'로 소문났습니다. 1959년 정월 대보름날 다리를 건너다 술과 달에 취해 실족사 한 직공(職工). 1961년 6월 20일 승강구에서 졸다 열차가 급정거 하는 바람에 추락사 한 승객. 1963년 8월 28일 동생을 업고 건너다 눈앞에 들이닥친 열차에 동생을 다리 밑으로 던지고 자신은 무참히 깔린 청각장애 언니…. 인명사고가 끊이질 않았지만 그럼에도 철길로 걷는 데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신천1·2구(1·2동)에는 70자(21m)를 파도 물이 안나…." 상수도가 없던 그 무렵 신천 부락민들은 도리 없이 강 건너 공동 우물물을 철길로 길러 먹었습니다. 공동우물 이용자는 1천여 세대 5천여 명. 하도 위험해 철길 옆 난간에 인도교를 놔 달라는 진정도 번번이 허사. 임시 변통으로 하천에 드럼통을 엮어 만든 가교는 비만 오면 맥없이 쓸려갔습니다. 이런 사정에 신천 1구(1동) 홍 모씨는 사비로 거금을 들여 가까운 냇바닥에 우물을 파고는 물을 팔았습니다. 우물물 한짐은 10환. 철길로 물을 긷다 죽기보단 낫다고 인근 5백여 세대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사 먹었습니다. 철도 교통량도, 푸른다리 보행자도 갈수록 늘어 1964년엔 이곳에서 사망자가 10월 초까지 이미 30명. 특단의 조치가 내려졌습니다. 10월 4일 철도청 대구보선사무소가 푸른다리 양 끝 제방에 보행을 막는 콘크리트 담장을 치자 신천동 부락민이들이 괭이를 들고 달려왔습니다. 식수 통로가 막힌다는 아우성에 보선사무소측은 침목으로 가교 부설을 약속했지만 말 뿐이었습니다. 절망의 푸른다리에 마침내 희망이 찾아왔습니다. 1965년 10월, 우여곡절 끝에 푸른다리 옆으로 제2신천교(현 신천교)가 놓였습니다. 예산이 모자라 대봉교 신설, 수성교 확장 등 대구 시내 11곳 교량 공사도 다 미루고 이 다리 하나만 세웠습니다. 푸른다리 아래 하상부지에는 자활촌이 생겼습니다. 남대구경찰서 도움으로 설치한 대형 텐트에 '직업소년 자활단' 간판이 걸리고 구두딱이 통, 넝마주이 망태도 선물로 들어왔습니다. 세끼 식사에 야학까지 소문나 입단 희망자가 줄을 이었습니다.〈strong〉(매일신문 1960년 2월~1965년 10월)〈/strong〉 신천 동쪽 주민들이 열차를 피해 물을 긷고, 시장엘 가고, 강건너 도심을 드나들던 1958년 푸른다리. 반달처럼 푸근했던 둥근 교각은 2014년 선로 확장공사때 재건축으로 간데없고, 그토록 원했던 철길 옆 보행로는 2016년에서야 들어섰습니다. 하얀 수증기를 토해내며 덜커덩 덜커덩 밤새도록 달리던 기관차는 쏜살같이 달리는 고속철로 변했습니다.
2024-08-30 05:30:00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22> 1973년 낙동강 화원유원지 모래찜질
1973년 8월 7일 달성군 낙동강 화원유원지. 폭우성 소나기도 잠시뿐, 35℃를 오르내리는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리는데 한 뼘 그늘도 없는 백사장에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발바닥은 후끈, 숨은 턱턱 막혀도 저마다 자리를 잡고는 우산 그늘에 쏙 드러누웠습니다. 이른바 모래찜질 피서객. 이날도 줄잡아 100여 명이 털털대는 버스에 짐짝처럼 몸을 싣고 이 먼 곳까지 왔습니다. 말이 좋아 이열치열(以熱治熱)이지 가마솥 더위에 모래밭을 찾은 건 다 사정이 있었습니다. 신경통, 류마티스, 관절염, 만성피로…. 또 누구는 부인병에 좋다고 무작정 따라왔습니다.〈strong〉(매일신문 1973년 8월 9일 자)〈/strong〉 달궈진 모래는 너무 뜨거워 화상을 입을 정도. 한겹 옷을 걸치고는 모래 구덩이에 몸을 묻고 지긋이 눈을 감았습니다.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을라치면 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꼭두새벽부터 장사한다고, 논밭을 일군다고, 휴일도 모르고 날품을 판다고 사시사철 그리도 설쳤으니 팔 무릎 어깨 허리 어디 하나 성할 틈이 없었습니다. 말동무와 같이 온 아낙네들은 시집 흉, 남편 흉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이곳저곳 쑤시고 아픈 것도 억울한데 시집살이 생각하면 울컥 화가 또 치밀었습니다. 부질없는 한숨에 먼산을 쳐다보니 미루나무 높은 데서 찢어질 듯 울어대는 한여름 매미 소리…. 무더위에 이 무슨 고생이냐 했는데 한참 수다를 떨고 나니 후련했습니다. 속이 다 시원했습니다. 모래찜질은 독소가 되는 몸속 노폐물을 땀으로 빼내는 자연 건강요법. 혈을 돌리고 염증도 없애고 아픔도 멎게 한다고, 옛날부터 선조들이 해오던 여름철 연례행사였습니다. 에어컨은 무슨, 선풍기도 귀해 부채 하나로 여름을 나던 그 시절, 서민들은 아파도 병원을 몰랐습니다. 폭염도 땡볕도 대수가 아니었습니다. 모래를 끼얹고 온종일 드러누워도 돈 한 푼 안드니, 낙동강 모래밭은 이들의 병원이자 속 편한 쉼터였습니다. '어정 7월 건들 8월'. 바쁜 모내기를 끝낸 7월은 발걸음도 어정어정 한결 가볍고, 농작물이 알아서 여무는 8월은 할 일도 없어 건들건들 그늘을 찾아, 또 이렇게 모래찜질로 몸을 달래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화원유원지 모래찜질은 1970년대를 지나오면서 점차 자취를 감췄습니다. 1976년 10월 낙동강에 안동댐이 들어선 뒤 강물에 실려오던 모래도 줄고, 도시화로 건축붐이 일면서 강바닥 모래는 귀한 몸값으로 팔려나갔습니다. 드넓던 화원유원지 백사장도 점차 볼품을 잃었습니다. 미루나무, 버드나무, 이태리포플러가 늘어섰던 그때 화원유원지 강변숲은 이제 주차장으로, 운동장으로, 공원으로 탈바꿈했습니다.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가 끝도 없어서 엄마랑 누나랑 강변 살자던, 곱디 고운 백사장은 더는 볼 수 없습니다. 모래 섞인 계란을 도란도란 까먹으며 모래에 몸을 묻던 추억도 다 물속으로 사라졌습니다.
2024-08-16 05:30:00
[사진으로 기록한 100년 전 경주 고적] 일제의 눈으로 본 조선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은 한반도 전역에서 조선고적조사 사업을 벌였다. 고적조사는 1909년 탁지부(현 기획재정부) 건축소 사업으로 시작됐다. 탁지부는 대한제국 산하 기관이었지만 일제의 조선총독부 지휘를 받았다. 사업명은 조선고적조사였지만 실은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일본 지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숨은 목적이 있었다. 조사는 주로 고건축과 고고학 분야 기록, 조사, 발굴사업으로 해방 전까지 계속됐다. 조사 책임자는 도쿄제국대학 세키노 다다시 건축학 교수. 동 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한 야쓰이 세이이쓰는 그의 조사단원이었다. 야쓰이는 사진촬영을 전담했다.1911년 무렵부터는 유적을 단독으로 조사 및 발굴도 했다. 주요 지역은 경주, 평양, 부여 등 고도(古都). 야쓰이는 1909년부터 1920년까지 경주를 수시로 찾아 발굴사업에 참여했다. 고적 촬영에는 유리건판을 필름처럼 사용하는 카메라 옵스큐라가 사용됐다. 이 무렵 경주에는 '동양헌' 이란 사진관이 있었다. 주인은 일본 사진작가 다나카 가메쿠마가. 경주에서 제일가는 고적 전문 사진작가였다. 그는 1907년 토함산 중턱에 석굴암 존재가 알려진 뒤 1913년부터 1920년까지 3차례 이뤄진 해체 보수공사 과정을 사진으로 남기기도 했다. 야쓰이는 경주에서 동양헌의 다나카와 깊이 교류하기도 했다. 야쓰이는 4~6세기에 한반도 남부를 일본이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신봉하던 인물. 그는 1909년 조선고적사업 중간 보고서 격인 '한홍엽(韓紅葉)'에서 "한반도는 고대부터 일본의 지배를 받아왔기 때문에 당대에 일본의 보호를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썼다. 고적조사는 그 역사적 증거를 찾으려는 과정이기도 했다. 당시 야쓰이가 촬영한 100년 전 경주 고적 사진 원본이 일본에서 어렵게 발굴, 수집돼 한국으로 돌아왔다. 사진은 영남대 정인성 문화인류학과 교수가 야쓰이의 외동딸이 보관해 오던 것을 2014년 사비를 들여 구입한 것. 모두 100여 점으로 대부분 소형(15.6×11.3cm) 유리건판으로 촬영된 것이다. 사진은 촬영본이 트리밍 없이 인화된 원본으로 학술적 사료 가치가 높다. 정 교수는 "일본에서 환수한 기록 유산을 (사)한국국외문화재연구원의 도움으로 '한국고고학자가 새로 쓰는 조선고적조사보고' 발간과 함께 이제야 일반에 공개하게 됐다"고 말했다. 정 교수가 지난 20여 년 동안 일본 등지에서 수집한 고문서, 사진 등 기록 유산은 모두 1만여 점. 최근에도 경주 유적과 불법 도굴로 수집된 유물을 기록한 사진 등 140여 점을 수집했다. 이 기록물도 정리해 조만간 공개할 예정이다. 100년 전 경주 고적 사진 원본은 (사)한국국외문화재연구원과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BK사업 팀 공동주최로 경주엑스포대공원 문화센터 전시실에서 24일까지 전시 중이다.
2024-08-15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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