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곡이라 이 골짜기에 누가 배를 감췄던가/ 밤이라 타는 사람 없어 지난세월 이미 천년/ 큰 냇물 건너기 어렵거늘 그 끝이 어디인가/ 건너갈 길 없으니 다만 절로 가련하네….'
성주 출신의 유학자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이 지은 '무흘구곡'(武屹九曲) 가운데 배바위(무학정)를 노래한 시이다. 한강은 중국 송나라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받아 성주 대가천을 거슬러 오르며 풍광이 빼어난 아홉 곳을 골라 차례로 이름을 붙이고 7언절구의 시를 지었다.
◆한강 정구와 무흘구곡
가야산 골짜기에서 발원한 물이 잠시 성주댐에 갇힌 후 다시 동남으로 방향을 틀어 성주와 고령 땅을 적시며 낙동강으로 흘러가는 대가천은 아름다운 비경과 함께 한강 정구의 삶의 자취와 혼이 고스란히 서려 있는 곳이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한강 정구(1543~1620)는 퇴계(退溪) 이황과 남명(南冥) 조식 문하에 나아가면서 유학자로 성장했다. 과거를 치르지 않고 포의(布衣'벼슬이 없는 선비)로 지내던 한강은 수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았지만 출사하지 않다가 37세 때 처음 벼슬길에 올라 창녕현감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는 강원도 관찰사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분골쇄신했고, 전란 후 향리인 성주에서 후학을 가르치다 78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대가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맺은 한강은 벼슬에서 물러난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가야산이 보이는 대가천변에 초당을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바로 그가 세상을 떠난 후 회연서원(檜淵書院)으로 바뀐 회연초당이다. 회연서원은 가천면 소재지에서 수륜면 방향으로 대가천을 따라 33번 국도를 달리다 보면 왼쪽에 자리 잡고 있다. 임진왜란으로 많은 유생들이 피해를 입고, 지방의 교육기관이 붕괴된 직후 한강은 이곳에 초당을 짓고 제자를 키운 것이다. 초당 앞에 100그루의 매화나무를 심고 '백매원'이라 불렀다. 겨울에도 지조를 잃지 않는 매화처럼 고고한 선비의 향기를 널리 퍼뜨리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회연초당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한강은 중국 송나라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받아 봉비암부터 용추폭포까지 대가천의 아홉 절경을 '무흘구곡'으로 정했다. 1곡은 회연서원 바로 옆에 있는 봉비암(鳳飛岩). 푸른 물을 안고 우뚝 서 있는 바위에서 날아가는 봉황의 모습을 떠올리며 이름을 붙였다.
무흘구곡 가운데 가장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곳은 4곡에 해당하는 선바위, 입암(立岩)이다. 30번 국도를 따라 김천 증산면 쪽으로 달리다 무학리를 지나 계곡을 따라 한참 가다 보면 하천 건너편으로 30여m 높이의 우뚝 솟은 기암이 보인다. 바위의 상단 중간에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이곳에 학이 집을 짓고 살았다 해서 소학봉(巢鶴峰)이라고도 한다. 이 이름에서 물가에 우뚝 선 바위처럼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려 한 한강의 의지가 엿보인다.
◆독용산성(禿用山城'경상북도 기념물 제105호)
해발 955m 독용산 정상부에 자리 잡은 독용산성. 성 안에 계곡을 두고 800m 독용산 능선을 따라 쌓은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성주군 가천면 금봉리와 금수면 봉두리, 무학리, 영천리에 걸쳐 있다. 영남지방 산성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둘레가 7.7㎞(평균 높이 2.5m, 폭 1.5m)에 이른다. 축조 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4세기 가야시대의 것으로 추정한다. 성벽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화강암을 깨뜨려 쌓았고, 아랫부분에 큰 돌을 깔고 위로 가면서 작은 돌을 흩어쌓기식으로 쌓아 사이 사이에 잔돌 끼움을 해 성벽의 틈새를 메웠다. 성 안에는 동서남북 네 방향의 성문터와 수구, 포루·망루·객사·군기고·창고 등이 있었던 건물터, 연못터, 우물터, 계곡 등이 남아 있다.
독용산성은 성산가야 멸망 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다시 활용된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임진왜란을 피해 산으로 오르던 백성들이 발견했으며 임진왜란 때 화를 입지 않은 유일한 성이다. 임진왜란 후 경상북도 병마절도사에 예속된 병영이 설치되기도 했으며 숙종 원년 1675년 순찰사 정중휘가 개축했다. 일제강점기 발굴조사한 군기고에서는 쇠도끼, 쇠창, 쇠화살, 삼지창, 말안장, 갑옷 등이 출토됐다. 조선 말기 군사적 필요성이 없어지면서 방치되어 성곽과 시설물이 많이 허물어졌다. 최근 복원된 성곽 일부와 동문을 제외하면 당시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성주댐 수문 아래 중산마을로 올라가는 코스가 등산객들에게 각광받고 있다. 자동차를 이용하면 대구~성주~가천면소재지~신계리 방면으로 접어들면 독용산성을 알리는 팻말이 나온다. 좁은 포장도로를 따라 조금 올라가면 독용산성으로 오르는 임도(6.2㎞)가 나타난다. 임도는 좁지만 시멘트 포장도로라 불편하지 않다. 꼬불꼬불 이어진 산길을 굽이 돌 때마다 빼어난 조망이 펼쳐지고 첩첩이 쌓인 가야산 준령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성주댐이 오른쪽 발아래 나타나 시원한 자태를 뽐내면 저 멀리 성문이 보인다. 주차장에 도착해 차를 세운 후 낙엽을 밟으며 흙길을 따라가면 이내 동문루와 성곽이 눈에 들어온다. 동문루를 통해 산성 안으로 들어가면 별장박시연선정비, 별장장천학불망비 등이 방문객을 맞는다. 복원된 성곽을 타고 독용산 정상까지 갈 수 있다.
◆안림천변의 벽송정(碧松亭)과 벽송정 유계
고령읍에서 안림천변을 따라 쌍림면을 거쳐 합천 야로로 가는 26번 국도는 해인사로 통하는 대표적인 길이다. 대가야시대에는 야로에서 생산된 철을 왕도인 고령으로 운송한 '대가야 철의 길'이었다. 조선 초기 낙동강 개경포에서 내린 팔만대장경판을 해인사로 이운했던 '팔만대장경 이운의 길'이었고, 신라말 최치원이 경주에서 해인사를 왕래했던 '최치원의 길'이기도 했다.
쌍림면 신촌리의 안림천변 오른쪽 산기슭에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는 벽송정(碧松亭'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10호). 신라 말 지방에서 유명한 학자들로 구성된 유림들이 지은 정자인 벽송정은 각지의 선비들이 모여 토론을 했던 곳이다. 원래 지금의 자리에서 300m 정도 떨어진 들 한가운데 있었으나, 1920년 대홍수 때 안림천의 범람으로 유실된 후 그 잔해를 모아 지금의 장소에 이전했다. 벽송정은 누각 형태로 그 밑으로 소달구지가 드나들 정도로 높았으며 도리깨질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지금은 2칸 팔작지붕의 홑처마집으로 나지막한 담장이 둘러져 있다. 처마에는 최치원과 정여창, 김굉필 등의 시문을 새긴 현판이 걸려 있는 유서 깊은 정자이다.
조선시대인 1520년대부터 벽송정을 중심으로 벽송정 유계(碧松亭 儒契)가 결성돼 지금까지 500년 이상 맥을 이어오고 있다. 벽송정 유계는 '벽송정' 정자와 그 일대 전답과 재산을 중심으로 유지돼 왔으며, 계원들이 활터에 모여서 활을 쏘고 시문을 짓고 수련을 하고 연회도 펼쳤다. 벽송정 유계는 조선시대 고령 지방의 양반들을 주축으로 전국의 양반들이 참여했으며, 명망 있는 고령 지역의 사족은 대부분 벽송정 유계에 가입해 지역 유림의 여론을 주도하고 영향력을 키웠다고 한다. 그러나 가입 절차와 계원 자격 유지도 까다로웠다. 세습된 계원이 아닐 경우 여러 사람의 추천과 동의를 받아야 가입이 가능했고, 참석률이 저조할 경우 벌칙을 주거나 계원 자격을 박탈했으며, 벌칙은 상'중'하로 경중을 가려 술과 음식 등 재물로 행했다. 벽송정 유계의 일괄고문서인 입의에 따르면 고령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문중은 고령군 도진리의 고령 박씨로 보이며 이들은 고려시대 때부터 이 지역에서 사족으로 굳건한 가문을 형성했고 여론을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회천변의 무릉도원인 고령 박씨의 본향 도진리
고령읍에서 대가천과 안림천을 품은 회천은 개진면을 지나 우곡면 도진리로 흘러가 낙동강을 만난다. 회천변의 우곡면 소재지인 도진리는 고령 박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암행어사를 지낸 박문수와 고 박정희 대통령도 고령 박씨이다. 도진리는 고려 말(1350년) 박경(朴景)이 개척한 후 지금까지 650년간 이곳에서 세거해 오면서 고령 박씨의 본향을 이루고 있다. 이 때문에 도진리의 박씨들을 다른 문파와 구분해 '도진 박씨'라고 부른다. 박경이 처음 이 마을에 정착할 당시 회천변에 복숭아꽃이 만발해 복숭아꽃 피는 무릉도원이란 뜻의 도(桃)자와 회천을 건너는 나루터 진(津)자를 합쳐 '도진'이라고 불렀다. 고령 박씨들은 도진리를 '강변의 무릉도원'으로 부르고 있다.
고령 박씨들은 1592년의 임진왜란과 1597년 정유재란 때에 박정번'박정완 형제와 그 자제인 박효선, 박광선, 박원갑 등이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웠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때에는 박기열이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했고, 박재필은 3·1만세운동을 주도했다. 해방 후 박경점은 건국에 기여한 공로로 광복장을 받았고, 한국전쟁 때 박수헌이 전과를 올렸다. 이처럼 도진 박씨는 국가 위기 때마다 적극적으로 충과 효를 실천해 도진리는 1997년 7월 13일 경상북도 제1호 충효마을로 지정됐다. 마을에는 2005년 2월에 준공한 도진 충효관이 있다. 이곳에는 도진 박씨 소윤공파 문적(경북도 유형문화재 제298호)을 비롯한 도진 박씨 문중에서 전해오는 각종 고문서와 문집 등이 전시되어 있다.
성주 고령·정창구기자jungcg@msnet.co.kr
#"대가천 흐르는 수륜지역, 광역 친환경 농업단지 조성"
◆김항곤 성주군수
김항곤 성주군수는 "가야산 자락 대가천이 흐르는 수륜지역 1천225ha 면적에 2007년부터 3년간 총 118억원을 투입해 도정공장, 가축분뇨 자원화센터, TMR조사료공장, 원예용 공동육묘장 등을 갖춘 광역 친환경 농업단지를 조성해 농업경영비를 절감하면서 고품질 친환경 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김 군수는 "천혜의 자연관광자원인 가야산과 대가천을 활용한 친환경 농업 실천으로 안정적인 농업소득을 보장하고, 축산을 연계한 자연순환형 농업 정착을 통해 지속가능한 농업을 구현할 계획이다"고 했다. 이 같은 친환경 농업단지를 관광·수출 농업단지로 발전시켜 나가겠다는 것.
그는 "가야산에서 발원한 물을 막아 생겨난 성주호는 독용산과 신흥산 등과 어우러져 천혜의 자연경관을 연출하고 있으며, 댐을 도는 7km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자동차 드라이브코스"라고 말했다. 또 "군은 성주댐의 자연경관과 맑은 물을 활용해 성주호 주변에 휴양'레저형 관광지 조성과 가야산국립공원, 자연휴양림, 독용산성, 회연서원 등의 자연경관과 문화 유적을 연계하는 종합휴양레저단지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고 했다.
김 군수는 "한강 정구의 무흘구곡 제1곡에서 제9곡에 이르는 수려한 경관자원과 선현들의 산수경영 문화를 간직한 역사적 장소를 토대로 문화경관을 정비하고 구곡 관련 테마를 가미한 경관가도 조성사업도 추진하고 있다"며 "하천'계류의 아름다운 풍광과 그 속에 담긴 문화적 향기를 대가천에서 회천과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물길에 녹여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내는 문화용광로로 만들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성주·정창구기자 jungc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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