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사·만·어] 거리 유지

버스 정류소 벤치에 앉아 있다 보면, 낯선 사람이 옆에 와서 앉는 경우가 있다. 빈자리 두고 굳이 바싹 붙어 앉을 건 뭔감? 더 이상 앉을 만한 공간이 없는데도 굳이 비집고 들어와 앉는 사람도 있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거리를 필요로 한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마찬가지다. 채소 씨앗을 파종한 농부들이 중간에 두 번, 세 번 솎아내기를 하는 것 역시 포기 간 일정한 거리를 만들기 위해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가족 간에 대화를 많이 하라고 하지만, 사람마다 '많은 대화'의 기준은 다르다. 가족이니까 '희망거리'가 엇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서운함과 갈등이 발생하기도 한다. 엄마는 꼬치꼬치 묻고 싶은데, 딸은 방문을 닫는 것도 '희망거리'의 차이 때문이다. 대부분의 패륜범죄 역시 부모와 다 큰 자식이 한집에서 살 때 발생한다.

미국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의 '프락시믹스'(Proxemics) 즉 '공간의 근접학'에 따르면, 사람은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혹은 타인의 방해로부터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 일정한 거리를 원한다고 한다. 낮과 밤, 친숙한 환경과 낯선 환경, 상대에 따라 희망거리는 다르다.

그에 따르면 가장 가까운 거리는 '친밀한 거리'로 대체로 0∼45㎝를 말한다. 대화뿐만 아니라 시각, 후각, 촉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거리다. 다음은 '개인적 거리'로 신체를 접촉하지 않는 거리로 45∼120㎝ 정도인데, 평소 음성으로 대화가 가능한 거리다. 가정의 식탁 폭이 이 정도에 해당한다. 세 번째'사회적 거리'는 120∼360㎝로 상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눈에 볼 수 있는 거리로 사회적인 업무를 적절하게 수행할 수 있는 거리라고 한다. 회의실 탁자 간격이 이 정도가 아닐까. 마지막으로 '공공거리'는 360㎝ 이상이다. 길에서 이보다 상대가 더 가까이 다가오면 불안을 느끼거나 침입당했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거리는 사람과 문화에 따라 다르다. 이 차이로 불편함, 서운함, 분노가 발생한다. 부부나 연인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여성은 친밀한 남성에게 가까이 다가서려고 하고, 남성은 거북해서 물러서려고 한다. 남성이 물러서면 여성은 서운함을 느끼고, 다른 식으로 앙갚음한다. 남성은 여성의 이런 반응을 '이유도 없이 신경질을 부린다'고 생각한다.

연애의 시작과 끝, 인간관계의 성공과 실패는 서로 간의 거리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있다. 거리를 무시하면 파렴치한이 되기도 하고, 냉정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덜떨어진 사람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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