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의 헤어짐을 떠올려보면 10년이 가까워오는 지금도 황당한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존(John)은우연한 기회에 알게되어 오래 사귄 친구였는데 늘 단정하고 진중한 모습에 매사에 사려깊고 합리적이어서 지금도 미국적 미덕을 고루갖춘 이상형으로 내머리속에 각인되어 있다. 그러다가, 사귐이 깊어지고 정이 붙어 스스럼없이 속내를 터놓을 수 있을 정도의 지우(知友)가 되었다고 자신할때이다. 어느날인가. 예사롭게 찾아온 그는 해외지사로 발령을 받아 떠나게 되었다는 설명을 붙이며 이별의 짧은 메시지를 전했다. 아무런 예고도 적절한 이별의 예식도 없었지만 그는 여전히 예의바르고 깍듯했다. 무슨 살붙이라도 잃은듯이 황당하고 구차한 태도를 숨길수 없었던 나에게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매끄럽고 합리적인 모습으로 이별을 고했다.
그러나 우리 한국인은 헤어짐에 유달리 서투르다. 손님이 문밖을 나서자마자 매정하리만치 깨끗하게 문을 닫아 돌아서버리는 그들은 두서없는 감정을 자제하고 이별도 무척이나 실용적이다. 그들의 편에 서서 보면 이 좁은 반도속에 얽혀 살면서 그러려니 했던 우리의 정리(情理)와 그 은근한행태는 왠지 어색하고 심지어 전근대적으로 비치기까지 한다. 그러나 계몽의 변증법이 흔히 그러하듯이 많은 경우 우리의 어리숙함과 서투름은 문화적 차이와 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한채 서세동점의 역학구도에 의해 떠밀려 생긴 부작용이다. 헤어짐을 진하게 아쉬워하고, 때로는 그 아쉬움이 제풀에 지칠때까지 달래야 하는 우리의 정서에 대한 비판적 시선도 터보엔진을 단 자본주의의 계산적 이성과 양풍(洋風)에서 자유롭지 못한것이 사실이다.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부산 근교 어느 산사(山寺)의 한켠을 빌어 종교생활에 전념하면서 말년을 조용히 보내셨는데 나를 맞이할때는 잠시 일손을 거두고 한번 씩 웃을뿐이었지만 나를 보내실때는온 산을 다 내려오시면서 연신 손을 흔들어대는 것이었다. 군생활중에 면회를 마치고 걸음을 돌리는 어머니는 또 어떠했던가. 다시 돌아설 천리길을 뒷전에 두고 편모(偏母)는 초병(哨兵)의 어깨너머로 하염없이 내 모습만 살피고 또 살폈다.
그렇다고 헤어짐을 마냥 정서와 감상의 차원에서 방치할 것은 아니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 인간사에 여러 이별은 당연지사니, 습속과 관행이 늘 그러하듯이 헤어짐에도 적절한 매듭짓기를 연습해야 할 것이다. 나중에 쓸 요량으로 무슨 물건이든 묶어놓아보면 쉽게 알겠지만 무릇 매듭이란너무 단단히 매면 제대로 풀리지 않아 뒷일이 막막해지는 법이고, 너무 헐렁하게 두면 당장의 소임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법이다. 헤아려보면, 헤어짐의 이치도 꼭 그러하다.
내 공부가, 그리고 내 삶의 일상이 늘 그러했지만, 내 이별의 역사도 이단단함과 헐렁함, 정리와합리, 그리고 전근대적 감상과 탈근대적 허무사이에서 수없는 배회를 거듭했다.이제 격주로 띄우던 내 편지를 접고 이 칼럼의 보이지 않던 독자와도 헤어질때가 되었다. 비록 이것은 사소한 일이겠지만 태어나고 죽는 것이 결국 헤어짐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되새기면 우리 일상의 되풀이되는 헤어짐에 어찌 뜻을 매길수 없으랴.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고, 헤어짐은 성숙의실천에 다름 아니라고.
〈전주 한일신학대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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