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사 정현주의 휴먼 토크]귀여운 할머니들

아이들이 방학이다. 단 며칠간의 노루꼬리처럼 짧은 방학이라 아쉬운 탓에 아이들과 느긋하게 아침을 나누며 여유를 부리다 보면 지각하기 일쑤다. 오늘도 족히 10분은 늦게 병원에 도착했다. 자동 출입문이 열리자 아침시간의 정적을 뚫고 몇 개의 간절한 눈동자가 일제히 나를 향한다. 황급히 진료실로 도망치듯 달려 들어가는 나의 뒷그림자까지 그 눈동자들이 따라온다.

"원장님! 왜 이리 늦으셨어요? 어르신들이 30분 전부터 친구 할머니 몇 분까지 모시고 와서 원장님 안 오신다고 채근하세요!" 원래 연세 드시면 아침잠이 없다는데 오전 10시라는 빠르지도 늦지도 않은 어중간한 시간에 진료를 시작하니 얼마나 지루하겠는가? 게다가 원장이 지각까지 했으니 말이다. 마음이 바빠 가운을 입는 둥 마는 둥 진료실에 앉았다. 미안한 마음에 며칠 전 예쁜 진희(물사마귀로 진료받는 4세 된 꼬마) 엄마가 "물사마귀가 깨끗이 없어져 고맙다"며 사다준 포도주스를 한 병씩 내밀며 "늦어서 죄송합니다. 많이 기다리셨지요? 차가 좀 막혀서요." 지각했을 때 가장 무난한 변명을 주절주절 해댔다. "아이다. 좀 늦을 수도 있제. 요새 차가 얼매나 맥히는데! 간호사가 젊은 원장한테 보라 카는데 기다렸데이." 하시고는 연방 벙글거리면서 주스 병을 연다. 성급한 할머니는 벌써 한 모금 마시고 계신다. 할머니들도 귀여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젊은 의사를 마다하고 기다리는 할머니들을 보면서 나도 어느새 그분들과 연령의 공감대를 주는 나이 많은 의사가 돼 버렸나 싶어 씁쓸하기도 했다. 진료실에 동갑내기 아줌마가 들어오면 깜짝 놀란다. 내가 연상하는 내 나이 48세의 중년 여인의 실제모습이 아닌 훨씬 젊고 생기발랄한 이미지를 뇌에 고정시켜 둔 탓이다. '그럼 나도 저런 늙수레한 중년 여인이란 말이지?' 실망하면서 받아들이기 싫지만 자신의 이미지를 다시 수정한다.

15년 전 하루에 수백명씩 진료하는 대형 의료기관에서 봉직의사로 진료한 적이 있었다. 아침마다 수십명이 대기실을 메우고 진료를 기다리는데 희한하게도 할머니'할아버지들은 가장 연장자이신 K원장님 몫이었다. K원장님은 세련되고 이지적인 도회지 이미지를 가지셨기 때문에 연령이 주는 공감대 외에는 공통분모가 없을 듯한데도 진료실에서 그분들과 눈높이를 맞춰 감성의 진료를 하셨다.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을 것 같은 섬섬옥수의 손가락에 화려한 반지가 두어개쯤 자리 잡고 있는 그 손으로 할머니의 손을 잡고 할아버지들의 환부를 만지셨다.

동과 서가 먼 것같이 대조를 이루는 어색한 상황이지만 실제로는 놀랍게도 잘 어울린다. 그러면서 "할머니'할아버지들은 화려하고 단정한 것을 좋아하셔! 의사가 자기 관리하는 것은 환자에 대한 예의야. 가장 소중한 사람을 만날 때 단장하는 것처럼 의사는 진료할 때 가장 멋진 모습으로 진료해야 해. 그래서 나는 열심히 화장하고 꾸민단다. 호호호."

나도 지금은 의사 초년병 때 만난 인생의 멘토 K원장님의 그 당시처럼 할머니들이 찾는 나이 많은 의사가 돼 있다. 그런데 내 내면도 그에 걸맞게 연륜이 깊어졌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매일 대하는 수십명의 환자들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 만나듯이 단장하고 최선을 다해 감성의 진료를 하는지 자신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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