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4월 사우디 아라비아의 신문에는 한 여성의 처참한 얼굴 사진이 실렸다. 시퍼렇게 멍 들고 잔뜩 부풀어 오른 그 얼굴이 사우디의 유명한 TV앵커 라니아 알 바즈인 줄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바즈는 그날 남편에게 심하게 구타당한 끝에 의식을 잃기까지 했다. 깨어나 보니 코뼈가 부러지는 등 얼굴 열세 군데에 골절상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언론에 사진 공개를 허락했고, 전 세계 여론이 들끓었다.
◇ 바즈는 남편의 상습적인 폭력에 시달려 왔다. TV 화면에서는 유능한 여성 앵커였지만 가정에서는 남편이 휘두르는 폭력 앞에서 두려움에 떨어야만 했다. 결국 남편은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바즈는 작년 말 남편과 이혼했다. 망가진 얼굴을 여러 차례 성형 수술한 끝에 다시 TV 앵커로 복귀했다. 가정 폭력과 이혼의 아픔을 딛고, 남성 위주의 사우디 사회에서 악착같이 재기에 성공한 그녀는 최근 자신의 라이프 스토리를 책으로 엮어내기도 했다.
◇ 20여 년간 남편의 폭력에 시달려 온 아내가 결국 남편을 목 졸라 죽인 사건이 15일 서울에서 발생했다. 이모(36) 씨는 20년 전 "사랑한다"는 말에 끌려 김모(49) 씨와 결혼했다. 하지만 남편은 결혼 초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을 만큼 술을 퍼마셨고 손찌검을 해댔다. 최근엔 월세도 못낼 만큼 가난에 찌들렸지만 남편은 여전히 술과 행패 부리는 것밖에 몰랐다.
◇ 제대로 먹지 못한 세 아이들을 위해 아픈 몸으로 일해 번 돈으로 모처럼 사온 돼지고기 3근, 그것조차 술로 바꿔 마시는 남편 앞에서 이 씨는 이성을 잃고 말았다. 암 수술을 받고 온 자신을 구타했던 일 등 20년간 쌓였던 분노가 폭발했다. 비극적인 사건은 그렇게 해서 벌어졌다.
◇ 가정 폭력은 가정 파괴의 주범이며, 사회 질서를 해치는 위협 요인이다. 배우자 학대는 부부의 관계를 파괴시킬 뿐 아니라 자식들에게까지 대물림되기 쉽다. 폭력이 난무하는 가정에서 자란 자녀가 훗날 가정을 꾸리면 그 자신이 가정 폭력을 행사할 확률이 높다는 것이 여러 연구를 통해 입증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가정 폭력은 이혼'아동 학대 등 4대 가정 위기 지표 가운데 가장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가정 폭력 방지법 시행 8년째이지만 법은 있으나마나 한 실정이다. 더이상 가정 폭력에 희생되는 가정이 생겨나지 않도록 뭔가 특단의 대책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전경옥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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