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위기의 대학병원…의정갈등 장기화에 "이젠 한계다"

24시간 당직 후에도 못 쉬고 바로 외래·수술…체력적·정신적 '번 아웃'
개원·2차종합병원 러브콜에 교수들 마음 흔들리지만 발걸음 쉽게 못 떼
전공의 모집은 큰 기대 안 해…의료계 "정부 정책 조정 필요" 한 목소리

지난달 11일 서울 한 대학병원 응급실 모습. 연합뉴스
지난달 11일 서울 한 대학병원 응급실 모습. 연합뉴스

지난해 2월 말 정부의 의료개혁 정책에 반발한 전공의들이 사직서를 던지면서 시작된 의료계와 정부의 갈등이 1년을 향해 가면서 대학병원 위기가 심화하고 있다. 전공의 공백 장기화에 교수(전문의) '구인난'까지 겹치면서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다"는 아우성이 멈추지 않고 있다.

대학병원 교수들은 야간당직을 서고도 다음날 바로 외래진료에 수술까지 해야 하는 기계 같은 일상을 반복하고 있다. 교수들은 "당직 전담 전문의 도입 등 대책을 내놓지 않으면 조만간 대학병원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 대학병원 교수들 "신체적·정신적 한계 도달"

14일 대구 시내 한 대학병원의 이비인후과 A 교수는 전날 24시간 당직 근무 후 곧바로 진료실로 향했다. 원래는 24시간 당직 근무 다음날은 휴무가 원칙이지만 전공의도 없어 한 사람이라도 외래 진료를 보지 않으면 환자들이 큰 불편을 겪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다.

A 교수는 "24시간 당직을 선 다음날 수술이 있으면 수술을 들어가야 한다"며 "수술 전후로 환자 상태를 확인하고 입원 절차까지 모두 교수가 신경써야 하다보니 당직이나 수술이 끝나도 쉴 틈은 없다고 보는 게 맞다"고 말했다.

비단 A 교수 뿐만 아니라 쉴 새 없이 돌아오는 당직근무와 휴식이 보장되기 힘든 현재 상황과 구조 등은 대학병원 교수들이 모두 겪는 일이며 이 때문에 많은 교수들이 신체적, 정신적 탈진을 호소하고 있다.

또 다른 대학병원 B 교수는 "겨우 퇴근할 수 있게 되면 '내가 지금 뭐하고 있나' 싶은 회한이 몰려오다가도 '그래도 환자들을 놓을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는다"며 "1년 지나니 적응은 된 것 같은데, 언제까지 이렇게 '몸을 갈아넣으면서' 버틸 수는 없지 않느냐"고 호소했다.

이 때문에 각 병원에서는 당직비 인상이나 다양한 복지 제공 등 '당근책'을 제시하고 있지만 반발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일부에서는 '이럴 거면 차라리 당직 전담 전문의를 채용해달라'는 교수들의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

14일 국가보훈부는 전국 보훈병원에 의사 84명을 신규 채용해 환자를 24시간 진료하는 체제를 갖췄다고 밝혔다. 또 전국 보훈병원 내 진료과와 수술실 등에 진료지원 간호사 213명을 배치·운영하는 등 진료 차질 최소화를 위해 노력 중이라고 설명했다.

대학병원에 근무하는 의료진들은 적어도 이 정도 규모의 의료진 채용을 통해서라도 현 상황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대구 시내 한 대학병원 C 교수는 "병원에서는 당직에 지쳐있는 교수들에게 당직비를 10~20만원 더 주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지금 대학병원에 근무하는 교수들은 돈 때문에 당직을 서는 게 아니지 않느냐"며 "이대로 가다가는 대학병원 교수들도 다 쓰러질 판이니 인력을 더 늘려달라는 것"이라고 답답함을 털어놨다.

지난달 9일 대구 시내의 한 대학병원에서 내원한 시민들이 국정 소식과 관련된 뉴스를 시청하고 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지난달 9일 대구 시내의 한 대학병원에서 내원한 시민들이 국정 소식과 관련된 뉴스를 시청하고 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 병원들도 "일하려고 오는 사람이 없다" 아우성

대학병원 관계자들은 교수들의 상황과 요구를 알고 있지만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교수나 전임의 등 '전문의' 채용은 언감생심이고 자칫 근무하는 교수들이 병원을 그만둔다고 할까봐 더 걱정이다.

대구 시내 한 대학병원은 올해 상반기에 일할 교수 초빙을 지난해 가을부터 계속 진행해왔지만 14일 현재 정원의 20%를 겨우 넘긴 수준으로 교수 초빙이 진행됐다. 이 대학병원 관계자는 "이 정도 수준은 그나마 나은 수준이라고 알고 있다"며 "남은 교수들도 서울에 자리가 생기면 그리로 가려는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많아서 이를 달래고 병원에 남게 하는 작업도 함께하고 있다"고 말했다.

더군다나 종합병원들이 교수들을 초빙해 몸집을 키우려 하는 시도도 교수들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 실제로 대구 지역 의료계 내부에서는 한 2차 병원이 개원을 준비하면서 이직을 고민하는 대학병원 교수들과 접촉을 많이 가졌다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다. 실제로 이 병원의 외벽에는 대학병원 교수 출신 의료진을 초빙했다는 광고를 크게 걸고 있다.

최근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다 종합병원으로 이직한 의사 D씨는 "대학병원에서도 환자를 볼 때 최선을 다 했다고 생각했지만 종합병원으로 옮기니 환자와의 유대 관계를 더 공고히 할 수 있는 여건이 됐다"며 "환자와의 관계를 더 깊게 가져 제대로 진료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종합병원으로의 이직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설령 대학병원을 나간다고 해도 장밋빛 미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내과 계열 교수들은 개원이 그나마 쉽지만 외과 계열 교수들 중 개원의로 일하기가 곤란한 필수의료과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대학병원 교수 출신 개원의 E씨는 "흉부외과나 혈관외과처럼 대학병원과 같은 상급종합병원이 아니면 하기 어려운 수술을 맡아했던 필수의료과 교수들이 마음 속 갈등이 많아 간혹 내게 털어놓곤 한다"며 "게다가 요즘 경기도 안 좋아 막상 개원한다고 해도 의원을 경영하는 데 대한 두려움도 어느정도는 작용하다보니 마음이 복잡한 교수들이 많다"고 전했다.

오는 3월 수련에 들어갈 레지던트 모집을 하루 앞둔 14일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 관계자가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오는 3월 수련에 들어갈 레지던트 모집을 하루 앞둔 14일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 관계자가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 전공의 모집은 기대조차 안 해

15일부터 올해 상반기 전공의 모집이 진행되고 있지만 여기에 거는 기대는 병원도 전공의도 크지 않다.

"상반기 전공의 모집에 지원할 사람이 있을까"라는 질문에 한 대학병원 고위 관계자는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이 관계자는 "정부가 전공의들이 한 요청 중에 들어준 게 하나도 없지 않느냐"며 "이미 정부와 사회에 마음이 다친 전공의들이 돌아올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본다"고 예측했다.

전공의들 또한 의견은 변하지 않았다. 대구 지역 사직전공의 F씨는 "전공의들은 정부의 잘못된 의료개혁 정책에 대해 수정과 의료계의 의견 반영을 요구한 것이지 수련 특례나 입영 특례를 바란 게 아니다"라며 "지난 2월 이후 하나도 변한 게 없는데 돌아가려는 전공의들이 있을 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올해 신규 의사 국시 필기시험 지원자 수가 285명에 불과, 신규 의사 공급 절벽이 시작된 만큼, 앞으로 전문의를 구하려해도 구할 수 없는 상황이 눈앞에 닥쳤다.

대구 시내 또 다른 대학병원 관계자는 "보건복지부에서 '전문의 중심병원'으로 상급종합병원의 구조를 전환한다고 했지만 당장 전문의 자체를 상급종합병원으로 유인하기가 어려운 게 지금의 현실"이라며 "정부가 지금의 현실을 제대로 보고 정책을 조정할 필요는 분명히 있다"고 의견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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