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공동위원회의 목적은 1945년말 한국문제에 대해 관련 강대국, 특히 미국과 소련의 합의로서 발표된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을 시행하기 위한 구체안을 마련하기위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원래 모스크바 결정은 '한국을 민주주의 독립국으로 발전시키고 일제 통치의 잔재를 신속히 청산하기 위하여한국에 민주주의적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정했고, 이를 위해 남북한에주둔하고 있는 미소 양군 대표로 하여금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 이 위원회가 남북한의 민주적 정당 사회단체들과 협의하여 임시정부 수립안을 작성토록 규정하고 있었다.이같은 모스크바결정에 따라 제1차 미소공동위위원회가 1946년 3월20일부터약 한달반에 걸쳐 진행된 바 있었다. 그러나 제1차 미소공위는 결국 미소양측의 의견 일치에 도달하지 못했고, 따라서 5월8일 중단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제1차 미소공위가 중단될 수 밖에 없었던 가장 일차적인 원인은 미소공위 협의 대상 정당 사회단체의 선정기준과 방식의 규정에 있어 미소 양측이합의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측은 가능하면 자신의 지지기반이 될 수 있었던 우파진영이 비록 반탁을 주장하고 있었을지라도 '표현의자유'를 내세워 미소공위 협의대상에 포함시키고자 했었다. 반면, 소련측은반탁운동을 전개했던 이들을 모스크바 결정에 반하는 '반민주적'단체라 하여미소공위 협의대상에 배제하고자 했었다.
물론 미·소가 겉으로 내세운 이유야 이상과 같았지만, 그것은 내막적으로한국의 임시정부 수립에 있어 미·소의 주도권 다툼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있었다. 즉 미국측은 그 대부분이 우익세력인 반탁진영을 미소공위 협의대상에 가능하면 많이 포함시켜야만 친미적인 한국정부를 수립할수 있었고, 반면소련측은 협의대상에서 가능한 한 반탁진영을 배제하고 좌파세력을 많이 포함시켜야만 친소적인 한국정부를 수립할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같은 미소의 이해가 조정되지 않음으로써 제1차 미소공위가 중단되었던 것이다.제1차 미소공위가 이렇게 결렬된 이후 제2차 미소공위가 재개되기 까지에는약 1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에 미군정과 소군정은 남북한에서 자신의체제를 한층 강화시켰다. 미군정 역시 이 기간동안 좌파진영을 집중적으로탄압하는 한편 남조선과도 입법회의를 수립해 놓고 있었다.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위가 재개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남북한에서서로 다른 체제가 강화됨으로써 그 성공 가능성은 더욱 약화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통일된 임시정부를 수립할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다. '레베데프 비망록'의 첫 부분은 바로 이같은 제2차 미소공위의 개막에 즈음하여 서울로 향하고 있는 소련대표단의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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