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1=개인사업을 하는 김모(70) 씨는 종합감기약 마니아다. 조금만 기침을 하거나 몸이 좋지 않다 싶으면 어김없이 감기약 두 알을 먹는다. 일주일에 최소한 한 차례 정도는 복용하는데 잘 안 낫는다 싶으면 하루 세 끼 꼬박꼬박 약에 의지한다. 이뿐만 아니다. 가족 중에 감기 기운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줄기차게 약을 복용할 것을 종용한다. 그렇다 보니 김 씨의 집에는 항상 2, 3통 정도의 감기약이 보관돼 있다. 김 씨는 필요 이상으로 감기약 복용을 즐기지만 일단 약을 먹으면 빨리 낫는 것 같고 심적으로 위안이 된다고 생각한다.
#사례2=직장인 이모(24'여) 씨는 평소 통통하다는 주위의 말이 너무 신경 쓰여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그녀는 이를 위해 지난해 4월부터 7개월가량 다이어트 약을 꾸준히 복용했다. 덕분에 2개월 후에 몸무게가 6㎏ 정도 빠졌지만 부작용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혈액순환이 잘 안 돼 부종이 생기고 우울증과 불면증이 생겼으며 자주 위통증에 시달린 것이다. 중간에 1, 2주 정도 약을 끊기도 했지만 몸무게가 다시 늘어나는 요요현상이 나타나 부작용을 겪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약을 다시 먹고 있다.
◆ 스스로 약 처방
우리는 수시로 약을 먹는다. 두통이나 치통, 생리통 등 다양한 통증은 물론 몸 한 부분이 어딘가 좋지 않으면 약부터 찾는다. 의사가 처방해서, 약사가 권해서 먹기도 하지만 광고로 익숙해진 여러 약을 알아서 처방해 먹는다. 자신의 몸에 대해서는 자신이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고 그에 맞는 약도 알아서 찾는다. 이렇게 약을 먹지 않으면 마치 큰일이 나는 것처럼 여긴다. 이는 대체로 약에 관대하고 맹신하는 사회적 분위기의 영향이 크다. 최근에는 외모'학력 지상주의 바람을 타고 젊은이들 사이에 약을 오'남용하는 경우가 늘면서 부작용을 겪는 사례도 많다.
◆외모'학벌주의가 낳은 신(新) 중독
올해로 의약분업이 시행된 지 10년이 됐다. 과거에 비해 약 오'남용은 많이 줄어들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일반적으로 약 오'남용은 장년층이나 노년층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지만 요즘은 젊은층에서도 심각한 수준이다. 특히 외모와 학벌이 최고로 여겨지는 경쟁사회에서 젊은층은 쉽게 약의 유혹에 빠져들고 있다.
이른바 살을 빼준다는 '다이어트 약'이 젊은 여성들 사이에 성행하면서 부작용도 빈번해지고 있다. 한 비만클리닉을 찾은 20대 초반의 여성 박모 씨는 2개월 정도 다이어트 약을 복용하고 몸무게를 20㎏ 정도 감량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약을 끊고 2주 뒤부터 원인 모를 불안감으로 자살 충동을 자주 느꼈고 결국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지만 여전히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이 같은 사례는 허다하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이하 식약청)에 따르면 소비자시민모임이 2008년 체중조절 약'한약을 복용한 환자 1천66명을 대상으로 부작용 유무를 물었더니 전체의 66.4%인 708명이 부작용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부작용으로는 요요현상이 64.3%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어지러움(52.4%), 목마름(40.1%), 메스꺼움'구토(34.0%), 우울증(19.1%), 생리불순(13.0%)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대구식약청 의료제품안전과 최우창 과장은 "다이어트 약은 고도비만인 사람이 4주 정도 단기간에 다이어트 효과를 보기 위해 운동의 보조요법으로 개발된 것으로 장기간 복용하면 여러 가지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요즘에는 비만이 아닌 여성들도 다이어트 약을 거리낌없이 복용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 말했다.
보통 다이어트 약은 식욕을 느끼는 뇌에 작용해 배고픔을 덜 느끼게 하거나 포만감을 증가시키는 식욕억제제와 음식물로 섭취한 지방을 분해하는 효소를 차단해 지방의 체내 흡수를 줄이고 밖으로 배출하는 지방분해효소억제제 등으로 나뉜다. 하지만 약을 구성하는 성분들이 대부분 향정신성의약품(마약류)이다. 최 과장은 "향정신성의약품은 중추신경을 통해 식욕을 억제하기 때문에 다량 복용하거나 장기간 복용했을 때는 의존성과 내성이 생긴다"고 했다.
여성들이 살빼는 약에 빠져 있다면 남성들은 이른바 '몸짱 약'에 노출돼 있다. 몸짱 약은 스테로이드제로 단백질 흡수를 촉진시켜 근육량을 증가시키는 효과가 있는 반면 발기부전과 내분비계 이상 등 부작용도 심해 식약청으로부터 '오'남용우려 의약품'으로 지정돼 있다. 최근 몸짱 열풍으로 인해 운동선수뿐 아니라 운동 좀 한다는 젊은 남성들도 몸짱 약을 먹는 사례가 많다. 게다가 의사의 처방전에 의해 약국에서만 판매할 수 있는데도 헬스장이나 인터넷 등을 통해 암암리에 판매되고 있는 실정이다.
소위 '공부 잘하는 약' 오'남용도 갈수록 문제가 되고 있다. 염산메칠페니데이트는 몇 년 전부터 잠을 쫓고 집중력을 높이는 공부 잘하는 약으로 둔갑해 고3 수험생이나 일부 학원가를 중심으로 유통되고 있다. 이 약품은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나 우울성 신경증, 수면 발작 등의 치료제인데도 일반 학생들이 복용하고 있다. 이 약 또한 향정신성의약품으로 잘못 사용할 경우 심혈관계 부작용이나 돌연사, 행동장애와 사고장애, 정신병, 조증 등 다양한 부작용을 일으킨다.
◆약 맹신하는 사회
서모(76) 할머니의 안방 서랍에는 약봉지가 가득하다. 서 할머니는 수시로 서랍을 열어 약을 먹는다. 허리가 아플 때 먹는 약, 침침한 눈 때문에 먹는 약, 다리가 쑤실 때 먹는 약, 머리 아플 때 먹는 약 등 종류도 다양하다. 한 봉지 안에 들어 있는 알약 수도 3, 4개가 보통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어쩌다 하루 수십 개를 먹을 때도 있다. 서 할머니는 이런 생활이 굳어져 버려 옆에 약이 없으면 불안함을 느낄 정도라고 한다.
과거에 비해 약 오'남용이 많이 줄었다고 하지만 노인층을 중심으로 아직 약을 입에 달고 사는 이들이 적잖다. 이들은 큰 효과가 없지만 약을 먹고 나면 나아질 것이라는 위안을 얻기 때문에 쉽게 약 먹는 습관을 버리지 못한다. 더욱이 반복되는 약 광고는 이런 습관을 부채질한다. 대구시약사회 문승욱 학술이사(참사랑약국 약사)는 "상당수 사람들이 약국에 와서 상담을 하지 않고 특정 약품을 지칭해 달라고 하는 경우가 여전하다. 특히 게보린이나 판콜, 판피린 등 처방전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의약품은 더욱 그런 경향이 심하다"고 말했다. 또 약을 판매할 때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고 약사가 이야기를 해도 흘려듣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문 이사는 "판콜이나 판피린 등을 마치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여긴다"며 "자신의 병명이 뭔지 모르고 막연하게 오는 이들도 많다"고 했다.
최근에는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발기부전치료제 오'남용도 자주 발생하고 있다. 상당수는 인터넷 등을 통해 불법적으로 구매한다. 식약청이 지난해 전국의 만 19세 이상 성인 남녀 1천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전체의 30.2%가 발기부전치료제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다고 답했다.
병의원 처방약이 많은 것도 문제다. 국내 병의원의 1회 처방당 약 품목 수는 평균 3.2~4.1개(2009년 2분기)로 선진국의 2, 3배 수준이다. 또 쓰이지 않고 폐기되는 약도 매년 60t에 이른다. 최근 한나라당 심재철 의원이 보건복지부로부터 받은 폐의약품 회수현황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수도권'광역시 지역의 1만6천452개 약국으로부터 총 6만2천86㎏의 의약품을 수거, 폐기했다. 폐의약품 수거를 전국적으로 확대할 경우 실제로 폐기되는 의약품은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심 의원은 "의약품이 꼭 필요한 환자에게 필요한 만큼만 처방될 수 있도록 하는 공급자 측면의 대책과 의료기관 쇼핑과 같은 약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소비자 측면의 대책이 동시에 마련돼야 한다"고 했다.
전창훈기자 apolonj@msnet.co.kr
사진·안상호 편집위원 shah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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