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100년 달성 스토리로드] ③옥포면

병든 노모 "아들아, 하얀 쌀밥이 먹고 싶구나" 어머니 그릇엔 이밥, 효자 그릇엔 흰 꽃 수북

옥포면 교항리 다리목마을 세청숲에 수령 200~300년의 이팝나무가 군락을 이뤄 해마다 봄철이면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옥포면 교항리 다리목마을 세청숲에 수령 200~300년의 이팝나무가 군락을 이뤄 해마다 봄철이면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기세리의 석씨 집안과 만수리의 강씨 집안은 후세에 석씨 낭자의 정절을 기려 모열각(慕烈閣)을 세웠다.
기세리의 석씨 집안과 만수리의 강씨 집안은 후세에 석씨 낭자의 정절을 기려 모열각(慕烈閣)을 세웠다.

동쪽은 화원읍, 서쪽은 논공읍, 남쪽은 유가면, 북쪽은 낙동강을 경계로 고령군과 마주한다.

중부내륙고속도로 지선을 경계로 남동쪽은 비슬산 북사면의 산지이고, 북서쪽은 낙동강 유역의 하안저지(河岸低地)를 이룬다.

반송리에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천년고찰 용연사가 있다. 용연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사찰로 전국 5대 적멸보궁으로 손꼽힌다.

중부내륙고속도로 지선은 옥포터널을 거쳐 남해안과 연결되고 동서를 가로지르는 국도를 통해 고령군 및 경남 서부와 연결된다.

최근 충주 석씨 집성촌인 기세리 옥연지에는 '영원한 국민 오빠'로 통하는 송해 씨의 이름을 딴 '송해공원'이 조성 중이다. 이곳 기세리는 송해 씨의 부인 석옥이 씨의 고향이다. 옥포면은 본리리(本理理) 신당리(新塘里), 교항리(橋項里), 강림리(江林里), 송촌리(松村里), 간경리(干京里), 기세리(奇世里), 반송리(盤松里), 김흥리(金興里) 등 9개 법정리와 17개의 행정리로 이뤄져 있다.

◆옥포는 이팝나무 천국

옥포면 교항리 다리목마을 세청숲에 수령 200~300년의 이팝나무가 군락을 이뤄 해마다 봄철이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예부터 다리목마을에서는 애림사상을 키우기 위해 이팝나무에 해코지를 하다 적발될 경우 쌀 한 말씩을 벌금으로 물렸다. 또 이곳 마을 사람들은 땔감이 없을 때도 이팝나무만은 베지 않을 정도로 각별했다.

지금도 해마다 5월이면 이팝나무 아래에서 경로잔치가 열린다. 또 칠월칠석에는 마을 주민들이 모여 당산제를 지낸다. 달성군은 이팝나무를 군목(郡木)으로 지정해 놓고 있다.

게다가 달성군의 군목인 이팝나무(15~20년생 20그루)가 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후인 지난 2013년 4월 청와대로 옮겨 심어지면서 이 지역 이팝나무 군락지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팝나무는 일 년에 쌀밥 한 그릇 먹기 어려운 가난한 나라에서 경제대국을 이끌어낸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추억이 얽혀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퍼스트레이디 대행 시절(1974~79년) 식수 행사 때 주로 이팝나무를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팝나무라는 이름은 꽃이 필 때 나무 전체가 하얀 꽃으로 뒤덮여 '이밥' 즉 쌀밥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얘기가 있다. 입하(立夏)에 꽃이 피기 때문에 '입하목'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팝나무, 그리고 전설

효(孝)와 관련된 이팝나무의 전설도 있다. 가난한 나무꾼이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그 어머니는 오랫동안 병을 앓아서 식사도 잘 하지 못하고 누워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어느 날 "얘야, 흰 쌀밥이 먹고 싶구나"라고 했다. 아들은 식사를 하겠다는 말에 너무 반가워 "예, 어머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얼른 밥 지어 올게요"라고 대답하고 부엌으로 나왔다.

하지만 나무꾼은 쌀독에 쌀이 조금밖에 남지 않은 걸 보고 걱정이 태산같이 몰려왔다.

"어떡하지, 내 밥이 없으면 어머니가 걱정하실 텐데. 아니, 나 먹이려고 잡수시지 않을지도 몰라." 나무꾼은 이 궁리 저 궁리 끝에 좋은 생각 하나를 떠올렸다.

나무꾼은 마당에 있는 큰 나무에 올라가 하얀 꽃을 듬뿍 따서 자기 밥그릇에 수북하게 담고, 어머니 밥그릇에는 흰 쌀밥을 담아 들고 들어갔다.

"하얀 쌀밥이 먹음직스럽구나."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지내던 어머니는 오랜만에 흰 쌀밥을 맛있게 먹었다.

"어머니, 정말 맛있어요." 흰 꽃밥을 먹으면서도 어머니가 오랜만에 맛있게 식사하시고 만족해하시는 걸 본 나무꾼은 너무 기뻐 큰 소리로 웃었고 아들이 웃자 어머니도 덩달아 웃었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임금이 가난한 나무꾼 집에서 모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그 연유를 알아보게 했다.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임금은 크게 감동하여 나무꾼에게 큰 상을 내렸다.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지자 사람들은 그 나무를 '이팝나무'라고 불렀다.

◆이팝나무에 얽힌 한 맺힌 이야기

이팝나무 전설에는 가난한 서민의 삶이 배어 있다. 이팝나무에 꽃이 피는 때는 24절기로 따지면 입하 무렵이라 서민들이 가장 넘기 힘든 '보릿고개' 시기다. 이 때문에 입하 절기에는 딸 집에 가지마라는 얘기도 있다.

시어머니의 구박을 받던 착한 며느리가 5월 어느 날 조상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시어머니가 내주는 쌀로 제삿밥을 짓게 됐다. 며느리는 친정이 워낙 가난해 시집올 때까지 잡곡밥만 짓고 한 번도 쌀밥을 지어 본 적이 없었다. 며느리는 밥물을 얼마로 잡아야 할지 잘 몰랐고, 혹시 제삿밥을 잘못 지어 낭패를 당할까봐 몹시 걱정이 됐다.

그래서 뜸이 제대로 들었나 보려고 밥알 몇 개를 떠서 먹어보고 있는데 시어머니가 문틈으로 이 광경을 보고는 "제사에 쓸 쌀밥을 몰래 퍼먹고 있다"면서 이 사건 이후부터 온갖 구박을 다했다.

이를 견디다 못한 며느리는 뒷산에 올라가 목을 매 죽고 말았다. 이 며느리가 묻힌 무덤가에 흰 쌀밥 같은 꽃이 수북하게 피는 나무가 자랐다. 사람들은 쌀밥에 한이 맺혀 죽은 며느리가 환생한 것이라고 해서 이 나무를 이팝나무라 불렀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기세리 충주 석씨 열녀 낭자

옥포면 기세리는 충주 석씨 집성촌이다. 이 마을의 석씨 낭자는 인물이 빼어나고 행실이 정숙했다. 과년한 낭자는 이웃 마을인 만수리의 진양 강씨 총각과 혼인을 하기로 했다. 낭자는 두렵고 초조한 마음으로 혼인 날을 기다리며 부덕을 닦았다.

혼인을 앞둔 어느 날 계집종이 달려오더니 "아씨 아씨! 큰일 났사와요. 만수리 낭군께서 어젯밤에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합니다"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낭자는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종들이 주무르고 찬물을 끼얹고 해서 겨우 정신을 차렸으나 울지도 못하고 넋이 나간 채 하루해를 보냈다. 이튿날 아침, 계집종은 낭자가 없어진 것을 발견했고, 집안은 온통 난리가 났다.

만수리의 강씨 총각 집에서도 혼인을 며칠 앞둔 신랑이 죽어 비탄에 빠졌는데 이튿날 아침에 낭자가 총각의 시체 옆에 죽어 있는 것이 아닌가? 모두 놀랐으나 낭자의 정절을 가상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혼례를 올리지 않은 상태라 강씨 집안에서 장례를 치를 수 없었다. 결국 낭자의 시신을 기세리의 석씨 집안으로 돌려보냈다.

낭자의 아버지는 "이미 정한 혼사이기 때문에 강씨 집안 사람이 됐고, 그 댁에서 장례를 치러야 마땅하다"며 다시 강씨 집안으로 딸의 시신을 돌려보냈다. 이렇게 낭자의 시신이 왔다갔다하다 결국 각각의 집안에서 장례가 치러졌다.

그해 봄에 심한 가뭄이 들기 시작하더니 몇 달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

어느 날 낭자의 아버지인 석씨 노인이 밤에 일어나 하늘을 보니 무지개가 보였다. '밤에 무지개가 보이다니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튿날 밤에도 무지개가 계속 떠 있었다.

석 노인이 그 무지개의 뿌리를 찾아 나선 결과 하나는 강씨 총각의 묘에, 또 하나는 석씨 낭자의 묘에 연결돼 있었다. 이를 확인한 두 가문은 묘를 파서 합장하기로 했다. 합장하고 봉분을 다지기도 전에 하늘에 검은 구름이 모여들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그해 가뭄을 해소할 만큼의 충분한 비가 내렸다.

기세리 석씨 집안과 만수리 강씨 집안은 후세에 죽어서라도 부부의 연을 맺은 석씨 낭자의 정절을 기려 모열각(慕烈閣)을 세웠다.

◆송촌리의 묘터와 풍수

옥포면 송촌리는 약 400여 년 전 성산 배씨 조모 유씨(兪氏)가 자식들을 거느리고 임진왜란을 피해 성주에서 이주해오면서 마을이 형성됐다고 한다. 마을 주위에 소나무가 울창해 솔비골이라 불리기도 하는 마을이다.

송촌리에서 제일 잘사는 한 부자가 마을을 둘러싼 산을 거의 다 소유하고 있었다. 이 부자는 갑부라 할 만큼 재산은 많았지만 놀부처럼 욕심이 많아 이웃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다. 이 부자가 늙어서 몸이 쇠약해지자 아들에게 "내가 죽으면 우리 산에서 제일 좋은 묘터를 찾아서 유택으로 쓰라"는 유언을 남긴다.

효성이 지극한 아들은 풍수와 함께 산을 헤맨 끝에 좋은 묘터를 발견했다. 얼마 후 자신의 아버지가 별세하자 아들은 풍수와 함께 미리 마련해 둔 묘터를 파기 시작했다.

그러자 땅속에서 조그만 청색을 띤 돌이 나왔는데 이를 본 풍수는 기겁을 하고 "이곳에 묘터를 쓰면 큰 화를 입는다"며 묘를 쓰지 말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아들은 이곳에 꼭 묘를 써야 한다고 우겼다. 풍수는 하는 수 없이 "꼭 이 자리에 묘를 쓰려면 내가 저쪽 산을 넘어간 후에 하라"고 부탁한 뒤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풍수가 산을 넘어가기도 전에 아들이 묘터를 곡괭이로 세 번 파자 묘터 안에 있던 청색 돌이 하늘을 날아 풍수의 뒤통수를 때려 죽게 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아들은 너무나 놀라서 허겁지겁 자신의 아버지를 묻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은 물론 자식, 심지어 키우던 말과 소 등 가축들도 모두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송촌리에는 묘터와 관련된 또 다른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송촌리에 포산 곽씨 문중산이 있었다. 어느 해인가 본리동에 사는 곽 씨가 죽어 송촌리 문중산에 묘를 썼다.

그런데 그해 이후부터 해마다 흉년이 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곽씨 묘가 들어섰기 때문이라며 묘를 이장해줄 것을 요구했다. 곽씨 집안은 이에 동의하고 묘를 파고 관을 들어내니 관 밑에 함박꽃이 피어 있었다.

그 후로 송촌리에는 풍년이 들고 몇 년이 흐르면서 온산에 함박꽃이 만발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송촌리를 함박골이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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