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덕일의 우리역사 되찾기] <3>정약용과 이익의 고대강역관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정약용 '낙랑군=평양설'…존경했던 이익에 반박한 이유는?

성호 이익의 초상
성호 이익의 초상
다산 정약용의 초상
다산 정약용의 초상
기자묘(하남시 상구시)
기자묘(하남시 상구시)

◆식민사학자들이 이용하는 정약용

한국 고대사학계는 한사군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는 '낙랑군=평양설'에 목숨을 건다. 한국 역사학계는 전 세계 역사학계 중에서 칸막이가 가장 심하다. 자신의 전공 이외의 분야는 건드리면 안 된다. 다른 분야를 언급하려면 그 분야 전공자들의 견해를 무조건 따라야 한다. 결국 '낙랑군=평양설'은 한국 역사학계 전체의 단 하나뿐인 정설(定說)로 승격된다.

문제는 이 '낙랑군=평양설'을 정설로 고착화시킨 곳이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이고, 현재는 중국 동북공정에서 이를 근거로 북한 강역을 중국사의 한 부분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일반 국민들이 늘어나면서 '낙랑군=평양설'에 대한 비판이 높아져가자 식민사학자들은 "정약용도 식민사학자라는 말이냐?" 따위의 말로 상황을 호도하고 있다. 그 누구보다 애국심이 깊었던 (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지만 현실이 그렇다.

◆낙랑군이 요동에 있었다는 조선 후기의 많은 학자들

다산 정약용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못지않게 다방면에 많은 저서를 남겼다. 다빈치는 의학서는 쓰지 않았지만 정약용은 마진(麻疹:홍역)에 관해 서술한 《마과회통(麻科會通)》이라는 의학서까지 남겼으니 정말 다양한 분야를 연구한 학자이다.

정약용이 남긴 역사지리서가 우리나라의 강역이라는 뜻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다. 그런데 일본인과 한국인 식민사학자들은 정약용의 《아방강역고》를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논리를 펴는데 악용하고 있다. 정약용은 《아방강역고》 〈사군총고(四郡總考)〉에서 "사군(四郡)은 위만조선을 나눈 것이다"라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사군을 처음 나눌 때 압강(鴨江:압록강) 동쪽은 (사군의) 경계 안에 들어갔지만 압강 서쪽은 요동의 땅이었으니 서로 섞이지 않았다. 다만 진번(眞蕃) 한 군은 지금의 강계(江界) 바깥 변경에 있었던 것 같다."

압록강 동쪽은 한사군의 땅이었고, 압록강 서쪽은 요동군의 땅이었다는 것이다. 정약용은 자신의 견해를 표시할 때는 '정약용이 살펴보니'라는 뜻의 '용안(鏞案)'이란 표현을 쓴다. 필자는 '용안'에서 의미심장한 한 구절을 발견했다. 정약용이 "지금 많은 사람들은 낙랑의 여러 현이 혹 요동에 있었다고 의심한다"라고 쓴 구절이다. 정약용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많은 학자들은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요동에 있었다고 보았다는 뜻이다. 많은 학자들이 낙랑군이 요동에 있었다고 주장하면 그들이 무슨 자료와 논리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봤어야 하는데 정약용은 그렇게 하지 않고 바로 '낙랑군=요동설'에 대한 반박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한서 지리지》에는 낙랑과 요동이 각각 하나의 군이 되어서 각각 그 현을 다스렸으니 낙랑군의 현이 요동과 섞여 있을 수 없다."

정약용는 한(漢)에서 요동군과 낙랑군을 따로 두었는데 어떻게 낙랑군 산하의 군현들이 요동군 소속일 수 있느냐고 반박한 것이다. 이는 정약용이 지역으로서의 요동과 행정구역으로서의 요동군을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낙랑군이 셋이라는 주장

정약용도 낙랑군에 대한 사료를 살펴보니 '낙랑군=평양설'과는 다른 내용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낙랑군 일부가 이동했는데 그곳이 춘천이라는 설을 주장했다. 정약용은 〈낙랑고〉에서 낙랑군 설치 초기에는 한(漢)에서 관리를 파견했지만 그 후에는 그 지역의 추장들이 관리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면서 "지역의 토착 추장이 후(侯)가 되어서 서로 세습하다가 평양을 버리고 춘천에 도읍했는데, 멸망했다가 다시 부흥하면서 모두 낙랑이라고 칭했으니 이는 낙랑이 둘이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평양에 낙랑군이 있었고 토착 추장들이 춘천으로 이주해 세운 낙랑군도 있었다는 것이다. 정약용은 〈별유고(別有考)〉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압수(鴨水) 서쪽은 본래 낙랑땅이 아니었는데도 동유(東儒:조선 유학자)들이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혹 요동에 또한 낙랑이 있다고도 일컬으니 그렇다면 낙랑은 셋이 있는 것이다."

정약용은 낙랑의 위치에 대해서 ①평양설 ②춘천설 ③요동설의 셋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중에서 평양설이 맞고 요동설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고, 춘천은 일부 세력이 이주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성호 이익의 통찰력

정약용과 동시대의 학자들은 무슨 근거로 낙랑군이 요동에 있었다고 생각했을까? 그 답은 다름 아닌 중국 고대 역사서들에 있다. 중국 후한(後漢:서기 25~220년)의 역사를 저술한 《후한서(後漢書)》 〈광무제(光武帝) 본기〉 건무(建武) 6년(서기 30년)조에 "처음에 낙랑인(樂浪人) 왕조(王調)가 낙랑군을 근거로 복종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주석에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같은 《후한서》 〈최인(崔駰:?~92)열전〉에는 거기장군 두헌(竇憲:?~92)이 최인을 낙랑군 장잠현의 현령으로 임명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주석에 "장잠현은 낙랑군에 속해 있는데, 그 땅은 요동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낙랑군이 실제로 존재했던 시기를 묘사한 《후한서》 주석은 "낙랑군은 요동에 있다"고 거듭 말하고 있다. 이런 고대 자료들을 근거로 정약용과 동시대의 조선 학자들은 "낙랑군이 요동에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중에서 주목되는 인물이 정약용을 비롯해서 많은 남인 학자들이 정신적 스승으로 여겼던 성호 이익(李瀷:1681~1763)이다. 정약용은 이익에게 배우지 않았지만 스승으로 여겼다. 이익은 〈조선사군(朝鮮四郡)〉에서 "한(漢)이 조선 땅을 취해서 사군(四郡:한사군)을 만들었으니 사군은 본래 우리 동국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익은 삼국시대 조조(曹操)가 세운 위(魏)의 장수 관구검(毌丘儉:?~255)의 고구려 침공로를 낙랑군 위치를 말해주는 사료로 주목했다. 관구검은 고구려 동천왕 20년(246) 한사군 중 하나인 현토에서 나와서 고구려를 공격하다가 패한 후 낙랑으로 퇴각했다. 그런데 《삼국지》 〈위서(魏書)〉에 따르면 그는 6년 후인 가평(嘉平) 4년(252) 남방을 정벌하는 진남(鎭南)장군이 되어 남방 오나라를 정벌하러 나선다.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면 관구검은 배를 타고 가지 않는 한 위나라로 돌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익은 "(관구검이)현토로부터 나와서 낙랑으로 물러갔으니 두 군(郡:낙랑·현토)이 요동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간파했던 것이다.

◆기자도읍이 평양이라는 고정관념

정약용은 자신이 존경했던 이익도 낙랑군이 요동에 있었다고 말했는데, 왜 끝내 '낙랑군=평양설'을 버리지 못한 것일까? 바로 기자(箕子)에 대한 인식의 오류 때문이다. 정약용의 《아방강역고》는 〈조선고(朝鮮考)〉부터 시작하는데 첫 문장이 "조선이라는 이름은 평양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는 본래 기자(箕子)가 도읍한 곳이다"는 것이다. 즉 정약용은 기자가 도읍한 곳이 지금의 평양이라는 고정관념 아래 지리지를 서술하다보니 중국의 여러 1차 사료를 무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기자조선의 도읍지=위만조선의 도읍지=평양=낙랑군'이라는 도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기자는 대략 서기전 12세기 경의 인물이다. 그런데 기자는 사후 2천수백여 년 후인 서기 12세기 경 평양에 데뷔한다. 《고려사》는 고려 숙종 때인 1102년 국가의 제사를 관장하는 예부(禮部)에서 "기자의 무덤을 찾고 사당을 세워서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주청했다. 그때까지 평양에는 기자의 무덤도 사당도 없었다. 평양에 오지도 않은 기자의 무덤을 찾으려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220여년 후인 충숙왕(忠肅王) 12년(1325) 경에는 평양에 기자의 무덤과 사당이 만들어졌다. 물론 시신 없는 허묘(虛墓)이자 제사를 받을 인물이 없는 허당(虛堂)이다. 그런데 사마천의 《사기(史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는 두예(杜預:?~295)가 "양국(梁國) 몽현(蒙縣)에 기자의 무덤이 있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양국 몽현은 현재 하남성 상구시(商丘市) 양원구(梁園區)에 있다. 서기 3세기의 학자 두예는 기자의 무덤이 하남성 상구시에 있다고 했는데, 고려의 사대주의 유학자들이 14세기 경에 평양에 기자의 가짜 무덤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식민사학자들은 남인들의 스승이었던 성호 이익이나 정약용과 동시대의 많은 학자들이 "낙랑군은 요동에 있었다"고 말한 것은 못 본 체하고 정약용의 일부 글을 우리 강토 팔아먹는데 악용하고 있다. 지하의 정약용이 벌떡 일어날 일이지만 정약용의 사례는 학문도상에서 고정관념을 갖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말해주는 사례이다.

기자묘(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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