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향시골에서 자라 현성으로, 연해도시로 전전하고 현재는 한국에서 외기러기 생활을 하고 있다. 그때마다 각 지방에 따른 음식과 입맛에 어쩔 수 없이 길들여지고 절여지기도 했지만 건입맛처럼 다는 아니었다.
연변 고향에서는 때마다 김치반찬이 올려진 밥상이 맞아주어서 그런지 김치가 없는 타성에 정착할 때에는 감질나게 푸새 김치라도 맛보고 싶어 빈 입맛만 다시곤 했다. 비로소 우리 김치의 본토인 한국에 나와서야 신토불이 김치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한국에서 몇 번이나 공장을 옮겼지만 맨 먼저 밥상에 한가득 오르는 것은 김치 반찬이었다. 반찬투정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 제일 좋았고 험한 일도 고된 노동의 나날도 착실히 견딜 수가 있었던 것 같다.
반찬이 홀아비김치뿐이라도 밥 한 그릇을 개운히 뚝딱 비울 수 있었던 그 비결은 과연 어디 있었을까? 김치는 우리 민족 여인의 손맛이었다.
어렸을 적에는 고향서 어머니가 해주는 겨울 반찬으로 배추김치와 함께 했다. 장백산 아래 첫 동네라 불리는 내 고향은 겨울이면 혹독히 추웠고 어머니는 겨울이 오기 전 미리 김장김치를 하시기에 바빴다. 그 많은 김장김치를 담글 때 엄마 손이 매서운 건들바람에 빨갛게 상기되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행복하셨다. 힘들지만 무거운 김장김치 담그는 과정엔 장대 같은 세 아들과 소 같은 남편이 늘 함께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해변가 청도시에서 홀로 타향살이를 시작하면서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바꿀 수 없는 우리 음식 습관이었다. 중국요리처럼 다리 부러지게 한 상 가득 차린 식탁도 한두 번뿐이지 그 중심에 뭔가 부족한 느낌이며 떠올리는 하나의 음식이 꼭 있으니 짭짤하고 얼큰하고 상큼하고 맵싸한 그 이름- 김치. 심한 김치 상사병을 앓았었다. 그때 청도시에 한국회사들이 대거 진출하면서 이촌 시장에 조선족 매장이 형성되었고 가장 먼저 김치짠지 장사꾼들이 생겨났다.
나는 총각의 체면도 내려놓고 장터에 다녀오곤 했지만 이 가게, 저 가게 열손님 고추장 맛보기로 단골이 되지 못했다. 그러다 연변 훈춘서 오셨다는 한 할머니의 배추김치 맛에 반해서 얼굴 가림도 잊고 그곳에만 다니기 시작했다. 그 할머니는 노총각이 배추김치를 좋아한다면서 언제나 사러 갈 때마다 저울눈금을 한쪽으로 기울게 떠주곤 했다.
그 후 결혼하고 애 봐주러 온 장모님이 김치를 만들어 주셨지만 아파트에 사는 우리라 김치 움이 없어 즉석 김치나 벼락 김치를 만들어 먹었고 담그는 양도 많지 않았다. 장모님은 떠나면서 아내한테 배추김치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우리 민족 여성은 가정을 이루면 무엇보다 김치를 담글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고 가족의 건강은 음식으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일깨움에 아내는 열심히 만드는 노력 끝에 점차 배추김치 색깔, 양념, 맛을 적당히 내는 데 성공했다.
한국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손맛 좋은 한국 아줌마가 식탁에 손수 만들어서 올리기도 하는 반찬은 종류들만 해도 배추김치 외에 젓갈, 짠지가 무려 십여 종을 넘을 때가 있고 맛도 제각각이었다. 배추김치 마니아가 앙증맞은 그릇에 새로 올린 김치 중 첫 젓가락으로 얼결에 깍두기를 집으면 배추김치가 삐칠 것 같은 잠깐 겸연쩍은 잡감도 들곤 한다.
엄마, 장사꾼 할머니, 장모님 외에도 한국 회사 식당 아줌마 등과 같이 주방을 감당하기엔 전혀 버겁지 않고 넉넉하고 똑 닮은 우리 민족 여성들은 무엇보다 김치를 오래전부터 만들어 왔다. 김치는 우리 민족 음식 원조의 솜씨와 맛으로 굳어지고 잘 체현되었다. 김치가 현대생활에서 사라지는 많은 전통과 다른 점은 그것에 대한 입맛이 전혀 바뀌질 않고 한결같이 전해 내려온 것이다.
그 자랑차고 공통된 전통의 맛이 있기에 우리 나그네 가는 길도 외롭지 않고 어울참에도 떠올리게 한다. 어머니의 손맛처럼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김치를 만드는 과정엔 분명히 우리 백의 겨레의 열정과 얼이 깃들어 있다.
류일복(중국동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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